2018년 2월 7일 수요일

개인에 관한

요즘 벌어지고 있는 문제, 성폭력과 갑질,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다수의 방조 같은 문제를 구조의 탓으로만 보는 데 동의할 수 없다. 

구조 탓을 하는 데는 하나 부동의 전제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위주체가 권력 구조 하에서 발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권력은 관계 안에서 상대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하위주체는 누군가에게 권력일수도 있다. 이 사실은 중요한데 하위주체가 영원히 하위주체로만 고정되지 않는다는 존재론적 상황에 관해 힌트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권력도, 하위주체도 아닌 상태로 끊임 없이 변화하는 중간 영역은 포착하기 까다로운 대상이다. 그럼에도 규정하자면 아무 것도 안하길 자기 스스로, 그러니까 주체적으로 선택한 주체다. 아마도 세상이 별볼일 없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깨우친 것이 이유 아닐까 싶다. 마치 쇼펜하우어처럼 세상은 살기 위한 의지로 가득 차있다는, 그러니까 이 위험한 세계에서 생존이 인생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그래서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하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는.

그러니까 회색지대의 이들은 책임을 짊어지길 기꺼이 거부하는 것을 선택한 자다. 전체주의가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게 만든다면 역으로 이들은 개인을 위해 전체를 희생한달까. 전체주의적 개인주의? 그런 측면에 엄연히 존재하며, 이것은 소수가 아니라 대다수의 회색지대의 멘털리티인 것 같다. 이들이 구조 안에 가득차 있는 한, 최종 책임자만 날리거나 정권을 교체하거나 구조에 대한 무차별적 폭격을 일삼는 것은 정말로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회색지대의 사람들은 어떤 때는 동의하고 어떤 때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계속 살아 남을 것이고 그들은 여전히 지나간, 그리고 또 다시 생겨나는 새로운 권력에 책임을 떠 넘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는 변한다. 그것도 이따금씩은 수동적이겠지만 이따금은 능동적으로 그렇게 될 수도 있다.

내 생각에 아직 우리는 이른바 생성적 구조라는 걸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구조는 같은 것을 반복 재생산하기 마련이며, 여기서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도 만들어내지 않는 것도 결국 인간의 선택이다. 그것도 어떤 순간순간의 개인이다. 모든 사안에서 이 개인을 드러내게 만들고 그들에게 책임성을 씌우고 상벌을 적절하게 마련하는 것이 갑질 문제의 해결이라고 한다면 너무 추상적이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특히나 전체주의를 개인의 이기를 위해 취사선택하는 그런 희안한 이데올로기를 깨는 데에는 그것만큼 특효약이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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