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5일 일요일

도널드 저드, 특정한 오브젝트 번역 전반부

최근 몇 년 간 뉴욕에서 최고의 작업의 반 이상은 그림도 조각도 아니다. 최고의 작업은 대체적으로 가깝든 멀든 서로 관련이 있다. 그 작업은 다양하며, 그 작업 안에 있는 많은 것도 다양한데, 그건 페인팅과 조각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공통점도 있다. 

이 새로운 삼차원 작업은 운동이나 학파, 스타일을 구성하지 않는다. 이 공통의 측면은 운동을 규정하기엔 너무나 일반적이고 너무나 공통적이다. 유사함보다는 차이가 몹시 더 크다. 유사함은 작업으로부터 선택되는 것이다; 유사함은 운동의 우선원리나 경계짓는 규칙이 아니다. 3차원성은 페인팅이나 조각이 그렇게 보였던 것처럼 단순히 컨테이너와 가까운 존재인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페인팅과 조각은 덜 중성적이고, 덜 컨테이너적이고, 더욱 규정적이며, 부정할 수 없으며 피할수도 없다. 페인팅과 조각은 정당한 규정적 퀄리티를 생산하면서 모든 것을 제한하는 특정한 형태다. 새로운 작업의 모티베이션의 대다수는 이런 형태를 깔끔하게 지운다. 삼차원의 사용은 명백하게 대안적이다. 그건 어떤 것에도 열려있다. 이러한 것을 사용하는 많은 이유/이성(reasons)는 페인팅과 조각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네거티브한데, 왜냐면 페인팅과 조각 둘 모두를 지적하는 것은 공통된 소스이고, 네거티브한 이성reasons은 그것에 가장 가까운 공유물이기 때문이다. ... 포지티브한 이성은 더욱 부분적이다. 그림과 조각의 불충분함을 리스트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둘이 친근하며 그것들의 성분과 질이 더욱 쉽게 안착됐기 때문이다. 

페인팅과 조각에 대한 이견(objection)은 이전보다 더욱 견딜 수 없이 되어가고 있다. 그건 증명되고 있다. 페인팅과 조각의 무관심성은 그것을 반복하는 가운데 무관심하게 됐다, 그런 무관심성은 가장 나중에 진보된 버전을 발전시켰던 누군가에 의해 실행된 때의 그것이 아니다. 새로운 작업은 언제나 오래된 것에 이견을 포함하지만, 이런 이견은 정말로 새로운 것에 대해 유효하다. 그것들은 그것의 일부를 이룬다. 만약 보다 더 예전 작업이 일급이라면 그것은 이미 완료됐다. 새로운 불일치와 제한은 반동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발전되고 있는 작업에만 오직 관심이 있다. 분명하게도, 3차원 작업은 깔끔하게 성공한 페인팅과 조각이 아닐 것이다. 3차원 작업은 운동과 같지 않다; 어쨌거나 운동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또한 선적인 역사는 얼마간 파탄났다. 새로운 작업은 순수한 힘 가운데 페인팅을 초과하지만, 힘만이 오직 고려 대상은 아니며, 힘과 표현이 몹시 커다랄 수도 없다. 여기는 힘이 아닌 다른 길이며, 여기서 예술의 일종 하나는 다른 예술보다 더하거나 덜하게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납작하고 사각진 표면은 포기하기에 너무나 편리하다. 어떤 것이 납작한 표면 위에서 행해질 수 있다. 리히텐슈타인의 재현의 재현은 좋은 예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페인팅이나 조각이 아니며 거기 모두에 도전한다. 그것이 새로운 예술가에 의해 계정으로 취해져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페인팅과 조각을 바꿀 것이다.

페인팅에서 가장 잘못된 것은 그것이 벽의 역방향의 납작함에 놓인 사각판이라는 것에 있다. 사각형은 모양(shape) 자체다; 그것은 분명하게 전일적 모양이다; 그것은 어떤 것이 위에 있고 안에 있는지에 관한 배열을 결정하고 제한한다. 1946년 이전 작업에서 사각형의 가장자리는 경계며, 그림의 끝이다. 컴포지션은 가장자리에 반응해야만 하며 사각형은 통일체화 되어야 하지만, 사각형의 모양은 강조되지 않았다; 파츠parts가 더욱 중요하며, 색과 형태(form)의 관계성이 파츠로부터 발생한다. 폴락과 로스코, 스틸, 뉴먼, 최근의 라인하르트와 놀란드의 페인팅에서, 사각형은 강조된다. 사각형 안의 성분은 넓고 단순하며 사각형을 향해 가까이 조응한다. 모양과 표면이 사각판 위와 안에서 그럴듯하게 발생할 수 있다. 보통의 감각에서 파츠가 될 수 없는 통일성(unity)에 비해, 파츠는 미약하고 몹시 부차적이다. 페인팅은 거의 실체(entity), 하나의 물체(thing)며, 실체와 레퍼런스 그룹의 합으로 규정 불가능하다. 그런 하나의 물체는 예의 페인팅을 압도한다. 그것은 사각형을 규정적 형태로 설정하기도 한다; 그것은 정당성을 가진 중성적 제한이 아니다. 형태(form)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어야만 한다. 사각판은 생을 부여 받는다. 단순성은 사각형을 강조하길 요구하며, 이는 그것 안에서 가능한 배열을 제한한다. 단일성(singleness)의 감각은 지속기간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직 시작이며 페인팅의 바깥에서 더 나은 미래를 가진다. 페인팅에서 그것의 발생은 이제 시작처럼 보이며, 거기서 새로운 형태는 종종 예의 스키마와 질료로부터 만들어진다.

판(plane)은 또한 강조되며 대부분의 경우 하나다. 그것은 분명히 다른 판, 즉 벽 앞의, 그것과 평행하게 놓인 1이나 2인치의 판이다. 두 판의 관계성은 특정적이다; 그것은 형태이다. 페인팅의 판 위에, 혹은 얼마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포개어져야만 한다.

대부분 모든 페인팅은 어떤 점에서 공간적이다. 이브 클라인의 파랑 페인팅은 공간적이지 않은 유일한 사례이며, 거의 공간적이지 않은 사례는 스텔라의 작업 말고는 거의 없다. 곧추선 평판과 공간의 부재 모두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표면 위의 어떤 것이라도 그 뒤의 공간을 가진다. 같은 표면의 두 개의 색깔은 거의 언제나 다른 깊이 위에 놓인다. 심지어 색, 특히 유화에서, 모든 것이나 페인팅의 많은 부분을 덮는 그것은 대부분 언제나 납작하고 무한히 공간적이다. 그 공간은 그 모든 작업에서 얕으며, 그 작업에서 사각판은 강조된다. 로스코의 공간은 얕고, 부드러운 사각형은 그 판과 평행하지만, 그 공간은 거의 전통적으로 환영적이다. 라인하르트의 페인팅에서, 캔버스의 판으로부터 잠깐 물러나면, 납작한 판이 있으며 이것은 결국에 규정할 수 없는 깊이를 보여준다. 폴락의 물감은 분명하게 캔버스 위에 있고, 그 공간은 주로 표면 위의 어떤 흔적에 의해 만들어지므로, 그것이 몹시 설명적이거나 환영적이지는 않다. 놀랜드의 집중화된 띠(bands)는 폴락의 물감처럼 특별한 표면-위의-물감은 아니지만, 그 띠는 리터럴한 공간을 더욱 평면화한다. 놀랜드의 페인팅에서처럼 납작하고 반환영적으로, 그 띠는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한다. 심지어 원 하나라도 표면을 그렇게 왜곡할 것이고, 원 뒤에 작은 공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완결되고 변하지 않는 컬러필드나 마크필드를 제외하고, 사각형 안과 판 위 공간에 있는 어떤 것이라도 어떤 다른 것 안과 위에 있는 어떤 것을, 둘러싸여있는 무엇을 제안하며, 이는 그것의 공간 안의 오브젝트나 형상을 제안한다. 그 가운데 이것은 비슷한 세계(similar world)의 더욱 분명한 실례가 된다--이것이 페인팅의 주요 목표다. 최근의 페인팅은 완전한 단일함(single)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몇몇 지배적인 영역이 있다. 로스코의 사각형이나 놀랜드의 원에서, 그들을 둘러싼 영역이 있다. 메인 형태와 가장 표현적인 파츠와 캔버스의 나머지, 판과 사각형 사이의 갭이 있다. 중심적인 형태는 여전히 더 넓고 규정 불가능한 문맥 안에서 발생한다. 그 페인팅의 단일성은 예의 작업의 일반적이고 유일무이한 퀄리티를 삭감시키지만 말이다. 필드는 또한 보통 제한적이지 않아서, 규정할 수 없이 더 넓은 무언가로부터 잘려진 섹션을 출현하게 한다.

유화 물감과 캔버스는 상업 페인트만큼, 그리고 질료의 색과 표면만큼 강하지 않다. 특히 그 질료가 3차원 속에서 사용된다면 말할 것도 없다. 기름과 캔버스는 친숙하며, 마치 사각판처럼, 어떤 퀄리티를 가지며 한계도 가진다. 퀄리티는 특히나 예술에 의해 규정된다.

새로운 작업은 분명히 페인팅보다 조각을 닮았지만, 페인팅과 더욱 가깝다. 대부분의 조각은 폴락과 로스코, 스틸, 뉴먼보다 이른 시기의 페인팅 같다. 조각에 관해 가장 새로운 것은 그것의 광활한 스케일이다. 그것의 질료는 어떤 면에서 이전보다 훨씬 강조된다. 그 이미저리는 얼마간 서로 다른 시각성의 유사함과, 얼마간의 모호한 레퍼런스, 즉 합성가능성(compatibility)을 향해 일반화된 모든 것을 포함한다. 파츠와 공간이 암시되며, 묘사되며, 이것은 얼마간 자연주의적(naturalistic)이다. 히긴스의 조각이 예이며, 이와 닮지 않았지만, 디 수비로(Di Suvero)의 것도 그렇게 될 수 있다. 히긴스의 조각은 주로 기계와 절단된 신체를 제시한다. 석고와 메탈의 컴비네이션은 더욱 특정하다. 디 수비로는 클라인이 그랬듯이, 움직임을 모사하면서, 마치 붓질처럼 철골을 사용한다. 물질적인 것은 제 자신의 움직임을 절대로 가지지 않는다. 철골은 꿰뚫으며, 철 조각은 제스처를 불러 일으킨다; 둘 모두 자연주의적이고 인간형태주의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공간이 조응한다.

대부분 조각은 파트와 파트로 만들어지며, 그 다음, 합성된다. 메인 파츠는 공히 도드라짐을 남긴다. 메인 파츠와 작은 파츠는 크든 작든 베리에이션의 컬렉션이다. 거기엔 투명도와 힘의 위계가, 그리고 메인 아이디어 하나 혹은 둘을 향한 근사치가 있다. 나무와 메탈은 그것이 단독이든 함께 쓰이든 보통의 질료다. 그리고 그 둘이 만약 함께 쓰인다면, 큰 컨트라스트 없이 그렇게 한다. 색은 거의 없다. 수수한 컨트라스트와 자연스러운 모노크롬은 일반적이고 파츠가 통일되는 데 일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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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homas Kellein, Donald Judd: Early Work, 1955-1968, New York: D.A.P., 2002. Originally published in Arts Yearbook 8, 1965.

* 종합시험을 준비하면서 특정한 오브제 번역을 찾았는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없다. 읽은 기억은 있는데 없다니..아마 마이클 프리드의 미술과 사물성에서 간접적으로 읽은 것 같다. 유명한 글인데 왜 없지 싶어서 글을 봤더니, 글 난삽해서 뭔가 번역하기가 쉽지 않더라. 그게 이유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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