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7일 토요일

백남준의 총체피아노

백남준은 볼프강 슈타이케네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존 케이지를 향한 경의>에 대한 아이디어를 전하는 가운데, 자신의 조작된 피아노와 케이지의 것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거기에 장난감과 라디오와 자동차가 연결된다. 백남준은 이것을 1963년 <<음악의 전시>>에서 <총체피아노>를 통해 명확하게 구체화했다. <총체피아노>에는 다양한 오브제가 연결되었는데, 보기에, 악기라기보다는 조악한 아상블라주에 가까웠다. 케이지는 백남준에 대해 쓴 글에서 <총체피아노>는 미술관에 들어가있다고 적으며, 악기로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총체피아노>는 연주가 불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분명히 악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연주 그 자체를 초과하는 무언가가 <총체피아노>에 포함되어 있었다. 요는, <총체피아노>는 순수하게 소리를 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케이지는 여기에 대해 불편해 했던 것이다.

케이지가 불편했던 것을 조금 더 파고 들어가 보자. 케이지의 <준비된 피아노>는 철저하게 소리를 내기 위한 것이었다. 나사못과 조개껍데기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우연에 의해 발견된 것들이었고, 그것은 연주 시에 피아노의 현을 다양한 음색으로 약음화하기 위해 사용됐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케이지에게 <준비된 피아노>는 자신의 곡을 '연주'하기 위한 악기에 불과했다. 케이지에게 새로운 소리는 사실 이미 있는 소리와 같았다. 소리는 자연 어디에도 존재하는 레디메이드다. 우리가 그것을 의미있는 소리로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케이지의 작곡과 연주는 모두 그런 레디메이드 소리를 우연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핵심적 실천이었다. 하지만 백남준의 <총체피아노>는 케이지와 똑같이 발견된 오브제를 피아노에 연결했지만 발견된 오브제 그 자체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두 명의 뒤샹주의 작곡가는 레디메이드를 주요한 개념으로 취했지만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달랐던 것이다. 말하자면 케이지는 음악에서 빼기를 통해 레디메이드에 도달하려고 했지만 백남준은 더하기를 통해 그렇게 했다. 빼기를 통해 도달한 것은 순수 소음이었다. 하지만 더하기가 향하는 곳은 어떤 겹층의 구조체, 물질과 시간의 짜임이었다. <총체피아노>는 소리를 포함하는 오브제를 일종의 레디메이드 음원처럼 가져왔다. 여기서 오브제는 오브제가 포함하고 있는 모든 소리와 이미지를 포괄적으로 표상하는 기호로 다뤄진다. 그 결과, <총체피아노>의 연주자는 소리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기호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래서 케이지는 실제로 연주될 필요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사실 이런 아이디어는 오늘날 신디사이저에서 일반화 됐다. 신디사이저는 모든 음원을 데이터로 가지고 있으며, 연주자는 필요할 때마다 그것을 샘플링하고 조작할 수 있다. 신디사이저가 저장하고 있는 음원을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 연주자가 할 일은 근본적으로 연주가 아니라 선택이다. 연주는 선택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때의 음원은 소리일뿐만 아니라 대상(object)이다. 그런데 1960년대 당시 독일에서는 이런 실험이 이미 전개되고 있었다. 새로운 음악을 위해서 전자 악기의 발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실로 WDR 같은 전자음악 스튜디오는 새로운 음향을 조직하는 하나의 공간적 신디사이저 같은 것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총체피아노>는 새롭게 발명된 악기일지는 몰라도, 그것이 새로운 기술의 소산은 아니었다. <총체피아노>는 새로운 기술의 개념을 구태의연한 미술의 형태--슈비터스 식의 아상블라주--안에 가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총체피아노>는 당시 가장 진보한 음향 기술인 신디사이저를 가장 진보적이지 않은 형상과 결합한 이미지였다. <총체피아노>는 신디사이저의 원시적 형상을 새롭게 발명했다. 케이지가 느낀 또 다른 불편함은 여기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총체피아노>는 실로 새로운 소리의 조직을 위해 유용한 악기가 아니었다. 대신 <총체피아노>는 새로운 새로운 개념의 조직을 제안하고 있었다. 그것은 소리의 물질화되고 공간화되고 시각화된 차원을 주목하자는 요청 같은 것이었다.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기 위해서는 백남준의 이벤트 스코어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여기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의 플럭서스 동료라는 우회로를 통해야 한다. 리즈 코츠의 플럭서스 이벤트 스코어에 관한 분석은 내가 본 것중에 가장 뛰어나다. 
...

조지 브레히트는 레디메이드로서의 일상적 행위를 이벤트 스코어에 물화하려고 했다.
"논-아트란 이런 것이다. '예술'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예술가가 창조하지 않은 모든 것. 그래서 당신의 이벤트는 당신이 그 이벤트를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논-아트다--그것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당신이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나는 당신의 이벤트 몇몇이 우리 페스티벌에서 "실종된"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더욱 실종되거나 알아차릴 수 없다면 더욱 진실되게 그것이 논 아티피셜이라는 것..."


하지만 암컷 고래의 질 속으로 기어 들어가라는 백남준의 <딕 히긴스를 위한 위험한 음악>은 도무지 일상적인 행위가 아닐뿐만 아니라 오히려 실현될 수 없는 행위였다.

. 백남준의 이 텍스트이 재상연되는 곳은 상상imagination 즉 이미지의 영역이다. 백남준은 딕 히긴스의 <위험한 음악>을 청각이나 행위적 차원이 아니라 이미지적 차원으로 만들었다. 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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