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30일 수요일

Jay W. Wilkey, Marshall McLuhan and Meaning in Music (1969)

"나는 매클루언의 기본 아이디어, 특히 의미(meaning)에 관한 아이디어를 찜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나는 매클루언이 철학적 스테이트먼트를 제공하는 것 속에서 어떠한 철학자나 음악가보다 중요하게 음악에서의 의미의 문제를 다뤘다고 본다."(53)

"우리는 모두 인지하고 있다. 많은 음악가--"절대주의자"가 음악이 의미를 가진다는 주장의 합법성을 부정한다는 것을. ... 마샬 매클루언은 그러나 얼마간의 통찰을 준다. 그 통찰이란 전통적인 절대주의자와, 음악은 반드시 그것이 기호화되기 위해서 의미를 가진다는 참조주의자 사이의 합의를 위해 지반을 제공할지도 모른다."(53)

"매클루언의 미디엄 개념은 공히 분명하지만, 메세지 개념은 용어의 상식적 정의와 얼마간 대치된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사이버네틱 혁명에 속한 대다수 과학자와 철학자에 의해 공유된다. 그들은 메시지를 컨트롤이나 효과, 변화의 관점에서 정의한다. 분리된, 목적론적 매너 속에 프로젝션된 정보나 컨텐츠의 관점에 아니라. 케네스 볼딩을 매클루안은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메시지의 의미는 변화이며 이미지 안에서 그것을 생산한다." 오직 효과나 피드백의 프로세스를 통해 누군가는 메시지가 이해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53)

"문맥 하나에 적절해서 변화를 촉진시킬 법한 것은 또 다른 문맥 안에서 부적절하고 고로 무의미(즉, 효과 없음)할 수 있다. 그처럼, 어떤 청자에게 잠재적으로 좋은 음악적 미디엄은 감성 혹은 신체적 미성숙함이 이유든 아니면 기본 지성과 교육의 결핍이 이유든 그것을 듣는 데 준비되지 않은 다른 이에게 무의미할 수 있다. 이런 토탈 커뮤니케이션 상황 안에서, 매글루언에 따르면, 문화적 문맥(cultural context)을 취하는 미디엄은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의미 개념의 상식은 미디엄의 중요성을 인지하지만, 컨텐츠나 정보를 토텔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매클루언은 컨텐츠의 주제에 목을 매는 이 경향이 시각으로부터 연원한 문화의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문화가 구텐베르크 컴플렉스--시각지향적, 프린트지배적 서구 문화를 위한 용어--의 희생양은 아니다. 세계 대다수는 구술로부터 연원된다.
서구 사회의 시각적-문자적 지향은 아마도 절대주의-참조주의 논쟁이 왜 음악적 서클 안에 영원히 머물게 됐는지 설명한다. 르네상스와 프린팅 프레스의 발명 이후, 유럽인은 점점 더 시각적으로 지향됐다. 이 프로세스의 결과 하나는 형이상학적 중요성 안에서 음악이 탈강조된 것이다. 예를 들어 칸트는 음악을 가장 덜 중요한 예술--원리적 기준이 되는 컨텐츠의 결핍--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감성적으로 파워풀한, 음악의 효과성 혹은 의미를 명확하게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시각적으로 지향된 사회와 함께, 많은 진지한 음악가가 이런 장식적이고 감성 중심의 존재에서 벗어나 음악을 지성적이고 의지적인 것을 포함하는 더욱 중요한 지위로 키워내려고 애쓴 것은 지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프로그램 뮤직과 참조주의 미학의 아이디어는 시각 지향 사회의 뻔한 발전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프로그램 뮤직은 매클루언의 컨텐츠와 미디엄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이상적인 예시를 제공한다. 절대주의 음악은 주어진 악보의 음악적 컨텐츠는 음악 자체--즉, 톤, 얼마나 그것들이 연결되어 있는지, 형식--와 동일하다고 계속 주장할 것이다. 다른 말로, 형식(미디엄)과 내용은 동일하다. 평범한 하나의 프로그램 음악에서--말하자면, 리처드 스트라우스 심포닉 포엠에서--프로그램(컨텐츠)는 형식(미디엄)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극렬한 레퍼런셜리스트는 특정한 작업의 가치는 프로그램(컨텐츠)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음악적 프로세스--즉, 형식(미디엄)--에 달려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나 <돈 퀴호테>의 철학적 깊이는 <Till Eulenspieel's Merry Pranks>보다 나은 작업을 만들지 않는다. 다른 말로, 우리는 음악적 미디엄이 메시지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혹은 반대로, 음악적 컨텐츠라는 것, 구별가능한 컨텐츠가 존재하는 장소인 그것이 청자에게 행해지는 컨트롤을 결정하는 데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53-6)

"구텐베르크 시대에서, 반응react없이--즉시적인 피드백의 이득 없이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것--작곡가가 행위act할 수 있게 됐다. 프린팅의 발전과 함께 전문화--작곡가, 퍼포머, 교사, 결국엔 지휘자--의 발전이 도래했다. 구텐베르크 컴플렉스의 효과는 청자로부터 작곡가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 궁국적인 인간 미디엄은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다. 그는 반드시 그의 커뮤니케이션 미디엄과 고로 프린트된 스코어에 의해 상징화된 그의 메시지를 종종 왜곡하는 다른 사람의 도구성에 의존해야만 한다. 전자 음악의 발전은 의심할 여지 없이 자신의 음악을 다시 컨트롤하기 위한 시도를 보여준다.
마샬 매클루언의 그림책 <미디엄은 마사지다>에서, 사진의 단 한명의 음악가는 미스 샬럿 무어만으로, 케이지와 아방가르드주의자의 음악을 지지하는 첼로주자다. 그녀는 특정한 케이지의 작업, 즉 드라이 클리닝을 커버하는 데 사용하는 비닐백을 위한 콘서트 의상을 입고 사진이 찍혔다. 미스 무어만은 미디엄으로서의 퍼포머에 관한 고찰을 위해 흥미롭고 중요한 포인트를 만든다. 그녀의 퍼포먼스의 메시지는 그녀의 가상적 누드성에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퍼포먼스된 그 작업은 (정확히, 케이지에 따르면) NBC 텔레비전에서 퍼폼된 것(그녀가 똑같은 시나리오를 따라갔지만 의상을 전부다 갖춰 입은)과 다른 작업이다. 그리고 그 작업은 그러므로 콘서트 홀에서 퍼포먼스된 그 작업은 벌레스크 무대에서 퍼포먼스된 똑같은 시나리오와 다르다; 혹은 최소한, 다른 메시지가 커뮤니케이션됐다.
콘서트의 비틀즈나 멍키스를 생각해보라. 젊은 관중은 즉시 들리는 피드백을 시작한다. 그 특정한 퍼포먼스가 잘 수행됐는지 아닌지 듣기 위해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 미디엄은 거기 있고 기능하고 있다; 그 메시지는 즉시 이해된다. 이런 현상은 10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
근본적인 감각에서, 그 퍼포머는 음악적 미디어의 세 가지 층위에서 가장 중요하며 그러므로 가장 영향력있는 메시지다. 이것은 자신의 개성에 음악을 맞게 만드는 퍼포머와, 작곡가의 오리지널 의도의 현실화에서 도구성으로서 자신을 우선적으로 보는 퍼포머 모두에게 진실이다. 전자의 접근은 개별 작업이 완전한 현실화를 위해 개인적 개입에 의존하는 특정 음악 스타일--재즈, 소울, 음악 코미디--에 적절하다. 하지만 대부분 스타일은 후자의 접근을 요구한다; 맥시멈 효과는 퍼포머가 자신의 개성을 부정하는 동시에 듣기위한 스타일과 개별 작업의 묽은 미디어를 허용할 때 성취된다.
역설적으로, 오직 강한 개성--파워풀한 통제하는 미디엄--만이 서로 다른 음악 스타일에서 메시지를 저자적으로 프레젠테이션할 수 있으며, 이것은 전체 세계와 우리가 화해하는 데 중요하다: 동과 서, 젊음과 늙음, 부와 빈, 교육됨과 아님. 오직 성숙한 퍼포머만이 그의 예술성을 보증할 수 있고, 그는 바흐부터 Boulez에 이르는 창조적인 정신의 메시지로부터 발산하는 생동하는 힘의 지휘자로 수행할 수 있다. ... 질문은 음악의 퍼포머가--그리고 음악 퍼포머의 교사가--매클루언의 메시지(미디엄은 메시지다)의 도전을 충분히 진지하게 취할 것인지 아닌지다."(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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