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일 월요일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잡생각

JR이라는 social practitioner (이런 반예술가 반사업가 타입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데...)와 유명한 누벨 바그 영화 감독 아녜스 바르다와의 공동작업.

일단 실제로 작업을 실행해 옮겨 나가는 JR의 궤적이 있다. 다음 그 활동을 몽타주해 나가는 바르다의 궤적이 있다.

이 영화의 감독은 현 영화의 크레딧 체제에 따르면 바르다이겠지만, 사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이 둘 사이에서 창작 활동 사이의 크레딧을 적절하게 분배할 방법은 없다고 말하는 게 더욱 정확하겠다. 바르다는 영화적 몽타주에 저자적 권한이 있겠지만, JR의 실제 작업이 없었다면 그것은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JR의 사진 작업은 당연하게도 JR에게 귀속된다. 하지만 거듭, JR의 작업은 항상 바르다와 의견 조율을 거치기 때문에 100퍼센트 JR의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얼굴들 장소들>이란 영화다. 소셜프랙티스가 아니다. 소셜프랙티스의 후일담이다. 하지만 그 후일담이 시종일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영화 자체의 내러티브이기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있었던 일, 즉 소셜프랙티스이기도 하다.

소셜프랙티스의 관객은 아마도 마을 사람들, 즉 어떤 장소의 어떤 얼굴이었을 것이다. 그 관객은 그 장소와 장소에 얽힌 문화적 관습들 습관들에 따라서 한정된다. <얼굴들 장소들>에서 염두에 둔 관객은 소셜프랙티스의 관객을 포함하지만 꼭 그들만이 아니다. 영화란 관람 형식에 익숙한 관람객들, 특히나 바르다의 영화를 기대하는 영화팬들을 포함한다. <얼굴들 장소들>은 소셜 프랙티스의 현장성을 반영할 수 없다. 당연하게도. 하지만 영화는 다른 것을 할 수 있다. 바르다 자신 특유의 철학을 녹인, 자신의 관점을 투사한 이미지의 연쇄를 통해서 JR의 작업에 관한 비평적 텍스트를 제공할 수 있다. 이렇게 영화는 일어난 특정한 사건을 더욱 공적 영역에 가까운 장소에 갖다 놓는다. 물론 그것은 여전히 특정한 관점을 담고 있지만 더 이상 JR의 관점은 아니다. 바르다의 관점이다. 이것은 최초 JR의 활동 차원에선 생생하지 않겠지만 바르다의 입장, 즉 영화적 필드에서 꽤나 생생한 것 같다. 이 말은 이런 것이다. 사건은 다시 활기를 찾을 수 있지만 꼭 원작자를 통해서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사건이 시간과 장소를 이동하며 다양한 관람자에게 전달될 때 우리는 또 다른 사건을 기대해 볼 수 있다.

JR의 작업이 구려 보인다고 <얼굴들 장소들>이 구릴 거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걸 기대해 볼 수 있다. 바르다의 <얼굴들 장소들>을 통해 JR의 사진-장소 작업은 구려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얼굴들 장소들>은 그렇다면 좋은 영화였는가? 여기에 대해선 여기선 노코멘트.

소셜프랙티스가 경험을 생산한다면 <얼굴들 장소들>은 이미지를 생산한다.
확실한 것은 소셜프랙티스가 느린 경험이라면 <얼굴들 장소들>은 훨씬 빠른 발과 확장된 접근성을 가진다. 비유가 적절한진 모르겠지만, 소셜프랙티스가 시골 텃밭에서 토마토 농사를 지어서 과실을 따먹는 (특수한) 경험에 집중한다면 <얼굴들 장소들>은 인간극장 토마토편 같은 걸 집에 앉아서 티비로 보는 경험이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건 집에 앉아서 티비를 보는 (보편화된) 경험이다.

소셜프랙티스는 항상 특정성 때문에 이득을 취하고 또 망한다. 영화는 좋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특정 감독의 특정 방식의 영화라는 특정성은 특정한 관객을 상정한다. 그렇다면 또 이동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 다른 특정한 영역으로. 지금의 특정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여기서 그렇다면 여전히 <얼굴들 장소들>은 누구의 작업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얼굴들 장소들>이 그리고 있는 제 삶의 궤적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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