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R이라는 social practitioner (이런 반예술가 반사업가 타입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데...)와 유명한 누벨 바그 영화 감독 아녜스 바르다와의 공동작업.
일단 실제로 작업을 실행해 옮겨 나가는 JR의 궤적이 있다. 다음 그 활동을 몽타주해 나가는 바르다의 궤적이 있다.
이 영화의 감독은 현 영화의 크레딧 체제에 따르면 바르다이겠지만, 사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이 둘 사이에서 창작 활동 사이의 크레딧을 적절하게 분배할 방법은 없다고 말하는 게 더욱 정확하겠다. 바르다는 영화적 몽타주에 저자적 권한이 있겠지만, JR의 실제 작업이 없었다면 그것은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JR의 사진 작업은 당연하게도 JR에게 귀속된다. 하지만 거듭, JR의 작업은 항상 바르다와 의견 조율을 거치기 때문에 100퍼센트 JR의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얼굴들 장소들>이란 영화다. 소셜프랙티스가 아니다. 소셜프랙티스의 후일담이다. 하지만 그 후일담이 시종일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영화 자체의 내러티브이기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있었던 일, 즉 소셜프랙티스이기도 하다.
소셜프랙티스의 관객은 아마도 마을 사람들, 즉 어떤 장소의 어떤 얼굴이었을 것이다. 그 관객은 그 장소와 장소에 얽힌 문화적 관습들 습관들에 따라서 한정된다. <얼굴들 장소들>에서 염두에 둔 관객은 소셜프랙티스의 관객을 포함하지만 꼭 그들만이 아니다. 영화란 관람 형식에 익숙한 관람객들, 특히나 바르다의 영화를 기대하는 영화팬들을 포함한다. <얼굴들 장소들>은 소셜 프랙티스의 현장성을 반영할 수 없다. 당연하게도. 하지만 영화는 다른 것을 할 수 있다. 바르다 자신 특유의 철학을 녹인, 자신의 관점을 투사한 이미지의 연쇄를 통해서 JR의 작업에 관한 비평적 텍스트를 제공할 수 있다. 이렇게 영화는 일어난 특정한 사건을 더욱 공적 영역에 가까운 장소에 갖다 놓는다. 물론 그것은 여전히 특정한 관점을 담고 있지만 더 이상 JR의 관점은 아니다. 바르다의 관점이다. 이것은 최초 JR의 활동 차원에선 생생하지 않겠지만 바르다의 입장, 즉 영화적 필드에서 꽤나 생생한 것 같다. 이 말은 이런 것이다. 사건은 다시 활기를 찾을 수 있지만 꼭 원작자를 통해서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사건이 시간과 장소를 이동하며 다양한 관람자에게 전달될 때 우리는 또 다른 사건을 기대해 볼 수 있다.
JR의 작업이 구려 보인다고 <얼굴들 장소들>이 구릴 거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걸 기대해 볼 수 있다. 바르다의 <얼굴들 장소들>을 통해 JR의 사진-장소 작업은 구려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얼굴들 장소들>은 그렇다면 좋은 영화였는가? 여기에 대해선 여기선 노코멘트.
소셜프랙티스가 경험을 생산한다면 <얼굴들 장소들>은 이미지를 생산한다.
확실한 것은 소셜프랙티스가 느린 경험이라면 <얼굴들 장소들>은 훨씬 빠른 발과 확장된 접근성을 가진다. 비유가 적절한진 모르겠지만, 소셜프랙티스가 시골 텃밭에서 토마토 농사를 지어서 과실을 따먹는 (특수한) 경험에 집중한다면 <얼굴들 장소들>은 인간극장 토마토편 같은 걸 집에 앉아서 티비로 보는 경험이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건 집에 앉아서 티비를 보는 (보편화된) 경험이다.
소셜프랙티스는 항상 특정성 때문에 이득을 취하고 또 망한다. 영화는 좋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특정 감독의 특정 방식의 영화라는 특정성은 특정한 관객을 상정한다. 그렇다면 또 이동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 다른 특정한 영역으로. 지금의 특정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여기서 그렇다면 여전히 <얼굴들 장소들>은 누구의 작업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얼굴들 장소들>이 그리고 있는 제 삶의 궤적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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