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이랑 너무 비슷해서 깜놀.
보리스 그로이스에 대한 저격으로부터 시작한 글. 초창기엔 부리요라던지 그로이스라던지 저격을 많이 한 거 같다.
그로이스는 큐레이터를 영화의 디렉터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러니까 영화처럼 전시는 공동창작이고, 마치 영화가 끝나면 크래딧이 막 올라오는 것처럼 큐레이터의 총괄 디렉팅 하에 공동 저자성을 나눠가지는 것처럼 이해한다.
비숍은 그게 틀렸다고 말한다. 아니 누가 진짜 저자인지 질문하는 게 그리 중요하냐? ㅋㅋ고 비웃는다. 푸코가 저자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며 저자의 기능을 심문했듯이, 비숍은 큐레이터의 기능이 작가와 서로 다른 층위의 담론적 기능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큐레이터의 어서쉽은 작가의 오리지널한 저자성을 메타적으로 교섭하는 기능이며 이것은 윤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그로이스가 큐레이터나 작가나 동일한 어서쉽을 가진다고 무디게 평했다면, 비숍은 서로 다른 레이어 안에서 큐레이터가 작가를 행정 질서 안에, 마케팅적 질서 안에 편입시키는 기능을 하는지를 더욱 주목한다.
또 하나. 큐레이터 어서쉽의 자율성의 등장은 설치예술의 종말과 관련이 있다. 둘은 공간의 컨트롤을 떠나 의미의 컨트롤을 사이에 두고 경쟁한다. 브루타스는 그것을 경고한 작가다. 이후는... 큐레이터의 압승. 그래서 둘이 다르다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작가 어서쉽의 자율성이 지금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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