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ough the 89plus research we learned that many are critically addressing the phenomenon of the so-called “filter bubble.” This is an algorithmic mechanism used by companies through which a user’s online experience becomes a static, ever-narrowing version of their own pre-existing preferences. It is a tool by which algorithms select online content that a user might want to see based on pre-existing data harvested from the same user, such as location, search history, and personal information. It guards users against exposure to any content that might contradict their viewpoints, therefore isolating them within a coherent, restricted ideological environment; Eli Pariser, who coined the concept, calls it a “personal ecosystem.”
...
By listening to the artists in the “Filter Bubble” show, we might gain some insight into the new ideas and iconoclastic approaches that will transform our relationship to knowledge.
...
Above all, these artists’ practices investigate and challenge the assumption that our future actions should be determined by our past behavior. As with all of the projects outlined in this short manifesto, the basic principle stands that it is urgent for us to overcome the fear of pooling knowledge. We must remain radically open to new ideas. And we must preserve and promote the systems by which it is possible to share, collaborate, and investigate. The future depends on it!"
hans ulrich obrist
source: https://m.artsy.net/article/hans-ulrich-obrist-the-future-of-art-according-to-hans-ulrich-obrist
2016년 2월 3일 수요일
멜랑콜리아
쓸 데 없는 것을 버리고 추려서 정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의 경우는 버리지 않는 쪽에 가깝다. 아무리 사소한 거라고 해도 어딘가에는 반드시 방치해 두는 편이다. 그렇다고 그것에 의미를 두느냐,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의미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둔다는 게 정확하다. 그래서 혹 어떤 계기로 그것을 찾아야 했을 때 발견하지 못한다거나 심지어 망가졌다고 하더라도 아쉽거나 한 적이 전혀 없다. 그러고 보면 이런 버리지 않는 습관에는 어떤 근본적인 무관심 같은 것이 바탕에 깔려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음 자체를 확인하는 것에 안도하는 그런 건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 적을 수 있는 건 버리는 건 싫다. 분명히 그걸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버리는 건 역시 싫은 것이다. 나는 이것을 기억의 물화라고 불렀다. 이건 학부 시절 그림 그릴 때 생각해낸 말인데, 기억하기 싫은 것을 물건에 대리하는 습관에 그렇게 이름 붙였다. 설령 내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이 물건이 그것을 기억해준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이상 아무 것도 버릴 수 없다.
생각해보면 이건 먀샬 매클루언 같은 사람이 미디어 테크놀로지 발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며 참조한 생리학 용어 '자가-절단' 개념과 닮았다. 자가절단은 쉽게 말해서 도마뱀 꼬리자르기다. 신경 수준에서 외부 자극에 위협을 느낄 시점, 그것을 잘라내어 본체를 보존하는 일종의 생존술이다. 매클루언에 의하면 테크놀로지가 발전할 수록 인간은 자신의 감각을 테크놀로지에 대리 이전하는 한편, 본래 감각을 닫아버린다. 본래 신체로선 한도 초과인 것이다. 나르키소스의 멜랑콜리아. 그러니까 기억의 물화는 기억의 자가절단과 닮았다고 볼 수 있다. 기억을 다른 장치에 이전시켜버리는 것. 그리고 거기에 대한 감각을 닫아버리는 것. 지키기 위해서랄까.
이건 사실 나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하드디스크가 날아가면 곤란할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클라우드 서비스는 데이터를 얼마나 실시간으로, 글로벌하게 긁어 모으고 있는지. 데이터베이스가 확장될 수록 인간, 혹은 그의 신체는 우울해진다. 이건 헤겔식의 역사의 종말과 인간의 소멸 테제의 또 다른 버전일지도 모른다.
여튼. 침실에 우두커니 걸려 있는 옛날 사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오래 전에 제주도 놀러갔을 적 사진일 텐데 그걸 아직까지 걸어 놓은 것이다. 그냥 못이 있고 비어 보여서 사진 액자를 걸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손에 잡히는 대로 그냥 걸었던 것 같다. 분명히 행복했던 때다. 지금은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지만. 오늘의 아침 일기 끝-
흐아
1강부터 6강까지 다시 한 번 훑었다. 고칠 거 정말 많고 앞으로 더 고쳐야겠지. 그래도 일단 털기로 했다. 모아놓고 보니 나름 박찬경 선생님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알찬 강의록이다. 오늘날 한국 문화에서 탈식민주의 방법론이 필요한 이유부터 미디어시티 2014에 관한 의도, 현세상을 보는 시각, 사적인 컨페션까지 꽤나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다. 꽤나 설득력도 있고, 지루할 법한 이야기가 무난하게 풀려 있다. 그동안 헛짓을 한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 책이 잘 됐으면 좋겠다, 그런 희망 아닌 희망도 한 번 가져 본다고.
의심을 찬양함 Lob des Zweifels
- 베르톨트 브레히트
의심을 품는 것은 찬양받을 일이다! 당신들에게 충고하노니
당신들의 말을 나쁜 동전처럼 깨물어보는 사람을
즐겁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환영하라!
당신들이 현명하여 너무 믿을만한 약속은
하지 않기를 나는 바랐었다.
역사를 읽고 무적의 군대가
혼비백산 도주하는 것을 보아라.
곳곳에서
난공불락의 요새가 함락되고
출범할 때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던
무적함대가 돌아올 때는
몇 척 안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날인가 사람이 올라갈 수 없었던 산봉우리 위에 한 사나이가 올라섰고
끝이 없다고 믿었던 바다의 끝에
한 척의 배가 도달했다.
확고불변의 진리를 부정하면서
오 멋져라, 머리를 옆으로 흔드는 것은!
구할 길 없어 포기한 환자에 대하여
오 과감해라, 의사의 치료는!
모든 의심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그러나
겁많고 허약한 사람들이 머리를 쳐들고 일어나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강력한 힘을 이제는 더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오, 얼마나 힘들여 하나의 교리는 쟁취되었던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던가!
이것은 꼭 이러한 것이지 대충 그러한 것이 아님을
알기까지는 얼마나 어려웠던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어느날 한 사람이 그 교리를 지식의 비망록에 써 넣었다.
아마 오랫동안 그것은 그 책에 수록되어 있었고. 많은 세대가
그것과 함께 살아오면서 그것을 영원한 지혜로 알고
전문가들은 그것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다음에 불신이 생겨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경험이
그 교리에 의혹을 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의심이 일어난다.
그리고 언젠가 뒷날 신중하게 어떤 사람이 지식의 비망록에서
그것을 지워버린다.
사방에서 울려오는 명령을 받으면서, 수염을 기른 의사들에게
자기의 유용성 여부를 검사받으면서, 황금빛 훈장을 단
눈부신 인사들에게 검열을 받으면서, 하느님이 스스로 만드신 책을
귀에다 대고 떠들어대는 엄숙한 목사들의 경고를 받으면서,
참을성 없는 선생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가난한 사람은 서서 듣는다.
이 세계가 모든 세계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세계이며
자기 방의 천장에 뚫린 구멍도 하느님이 손수 계획하신 것이라고.
진실로 가난한 사람이
이 세계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는 힘들다.
자기가 살지도 않을 집을 짓는 남자가 땀을 뚝뚝 흘리면서 고된 일을 한다.
절대로 의심할 줄 모르는 생각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 소화능력은 놀라웁고, 그들의 판단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사실을 믿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믿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사실이 그들을 믿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그들의 참을성은
한계가 없다. 논쟁을 할 때
그들은 첩자의 귀로 듣는다.
절대로 의심할 줄 모르는 생각없는 사람들을
절대로 행동할 줄 모르는 생각깊은 사람들이 만난다.
이 생각깊은 사람들은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단을 피하기 위해서 의심한다. 그들은 자기의 머리를
오직 옆으로 흔드는 데만 사용한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은 침몰하는 배의 승객들에게 물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살인자가 치켜든 도끼 아래서
그들은 살인자 역시 인간이 아닐까 자문한다.
이 일은 아직도 충분히 연구 검토되지 않았다고
중얼거리면서 그들은 잠자리에 들어간다.
그들의 활동은 우유부단을 본질로 한다.
그들이 애용하는 말은, 아직 결단을 내릴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당신들이 의심을 찬양하더라도,
절망적인 것을 의심하는 것은
찬양하지 말아라!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너무 빈약한 근거에 만족하는 사람은
잘못 행동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근거를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위협 속에서 머물게 마련이다.
이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신 옛날에 지도자들에게 의심을 품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
의심을 품는 것은 찬양받을 일이다! 당신들에게 충고하노니
당신들의 말을 나쁜 동전처럼 깨물어보는 사람을
즐겁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환영하라!
당신들이 현명하여 너무 믿을만한 약속은
하지 않기를 나는 바랐었다.
역사를 읽고 무적의 군대가
혼비백산 도주하는 것을 보아라.
곳곳에서
난공불락의 요새가 함락되고
출범할 때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던
무적함대가 돌아올 때는
몇 척 안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날인가 사람이 올라갈 수 없었던 산봉우리 위에 한 사나이가 올라섰고
끝이 없다고 믿었던 바다의 끝에
한 척의 배가 도달했다.
확고불변의 진리를 부정하면서
오 멋져라, 머리를 옆으로 흔드는 것은!
구할 길 없어 포기한 환자에 대하여
오 과감해라, 의사의 치료는!
모든 의심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그러나
겁많고 허약한 사람들이 머리를 쳐들고 일어나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강력한 힘을 이제는 더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오, 얼마나 힘들여 하나의 교리는 쟁취되었던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던가!
이것은 꼭 이러한 것이지 대충 그러한 것이 아님을
알기까지는 얼마나 어려웠던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어느날 한 사람이 그 교리를 지식의 비망록에 써 넣었다.
아마 오랫동안 그것은 그 책에 수록되어 있었고. 많은 세대가
그것과 함께 살아오면서 그것을 영원한 지혜로 알고
전문가들은 그것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다음에 불신이 생겨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경험이
그 교리에 의혹을 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의심이 일어난다.
그리고 언젠가 뒷날 신중하게 어떤 사람이 지식의 비망록에서
그것을 지워버린다.
사방에서 울려오는 명령을 받으면서, 수염을 기른 의사들에게
자기의 유용성 여부를 검사받으면서, 황금빛 훈장을 단
눈부신 인사들에게 검열을 받으면서, 하느님이 스스로 만드신 책을
귀에다 대고 떠들어대는 엄숙한 목사들의 경고를 받으면서,
참을성 없는 선생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가난한 사람은 서서 듣는다.
이 세계가 모든 세계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세계이며
자기 방의 천장에 뚫린 구멍도 하느님이 손수 계획하신 것이라고.
진실로 가난한 사람이
이 세계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는 힘들다.
자기가 살지도 않을 집을 짓는 남자가 땀을 뚝뚝 흘리면서 고된 일을 한다.
절대로 의심할 줄 모르는 생각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 소화능력은 놀라웁고, 그들의 판단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사실을 믿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믿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사실이 그들을 믿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그들의 참을성은
한계가 없다. 논쟁을 할 때
그들은 첩자의 귀로 듣는다.
절대로 의심할 줄 모르는 생각없는 사람들을
절대로 행동할 줄 모르는 생각깊은 사람들이 만난다.
이 생각깊은 사람들은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단을 피하기 위해서 의심한다. 그들은 자기의 머리를
오직 옆으로 흔드는 데만 사용한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은 침몰하는 배의 승객들에게 물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살인자가 치켜든 도끼 아래서
그들은 살인자 역시 인간이 아닐까 자문한다.
이 일은 아직도 충분히 연구 검토되지 않았다고
중얼거리면서 그들은 잠자리에 들어간다.
그들의 활동은 우유부단을 본질로 한다.
그들이 애용하는 말은, 아직 결단을 내릴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당신들이 의심을 찬양하더라도,
절망적인 것을 의심하는 것은
찬양하지 말아라!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너무 빈약한 근거에 만족하는 사람은
잘못 행동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근거를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위협 속에서 머물게 마련이다.
이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신 옛날에 지도자들에게 의심을 품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
[스크랩] [유운성의 시네마나우] 예술가/테러리스트
지난 7월 마르세유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월드프리미어된 필립 그랑드리외의 신작이 이후 몇몇 영화제와 특별상영회에서 소개되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랑드리외는 영화 이외에 설치미술 및 비디오아트 영역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아방가르드 작가로, 한국에 그의 작업이 폭넓게 소개된 적은 없지만, 장편 데뷔작 <음지>(1999)를 비롯해 <새로운 삶>(2002), <호수>(2008) 등의 실험적 픽션이 전주영화제, 부산영화제 및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된 바 있어 시네필들에게 낯선 이름은 아니다. 올해 발표한 작품은 그가 프랑스 영화비평가 니콜 브르네와 공동기획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20세기에 저항과 해방의 투쟁에 참여했던 저명한 혹은 미지의 시네아스트들에 관한- <우리의 결의를 다진 것은 아름다움이었으리라>의 첫 결과물로서, 1960~70년대 일본의 전투적 시네아스트 아다치 마사오에 대한 것이다.
일본영화 사상 가장 특이한 이력의 영화감독 가운데 하나인 아다치 마사오는, 니혼대학 재학 시절에 연출한 (다소 혼란스럽지만 대담무쌍한 실험정신으로 충만한) 중·단편 <밥그릇>(1961)과 <쇄음>(1963)으로 주목을 끌었고 이후 와카마쓰 고지와 오시마 나기사 영화의 각본작업에 참여하는 한편, <섹스 게임>(1968)과 <여고생 게릴라>(1969)처럼 정치적 담론으로 무장한 핑크영화, 초현실주의적 감수성을 한껏 분출시킨 걸작 <은하계>(1967), 정치적 풍경영화 <약칭: 연쇄살인마>(1969) 등을 직접 연출해 언더그라운드의 총아로 떠올랐다. 하지만 와카마쓰와 공동연출한 팔레스타인의 게릴라 투사들에 대한 기록 <적군/PFLP: 세계전쟁선언>(1971)을 발표하고 나서 얼마 뒤, 그는 적군파 병사로 중동지역의 투쟁에 직접 뛰어들면서 일본영화계에서 사라지고 만다. 1997년 레바논에서 체포되어 3년간 수감되었다 일본으로 강제송환당한 그는 2007년에 36년 만의 신작 <테러리스트>를 발표했고 최근엔 와카마쓰의 <캐터필러>(2010) 각본작업에도 참여했다.
1920년대 후반 쇠퇴해가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한복판에서, 앙드레 브르통은 운동의 미래는 앞으로 도래할 이들의 순수성과 분노에 달려 있다고 외쳤다. 자신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건 항상 초현실주의자였다고 말하는 아다치는 그러한 순수성과 분노를 줄곧 자신의 현재 속에 간직해온 인물이다. (그랑드리외-브르네가 기획한 시리즈의 전체 타이틀 ‘우리의 결의를 다진 것은 아름다움이었으리라’는 <테러리스트>의 대사 가운데서 따온 것으로, 브르네에 따르면 이는 “영화의 전투적 기능과 시적 기능 사이의 분리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공식”과도 같은 문장이다.) 그랑드리외가 밝힌 바에 따르면, 그가 아다치를 처음 만난 것은 프랑스대사관 주관으로 도쿄에서 그의 특별전이 열렸던 2008년이다. 이때 아다치는 <새로운 삶>을 보러 영화관에 왔었고 상영 뒤 이 영화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그랑드리외 편에 서서 영화를 옹호했다. 아다치가 자신과 같은 입장과 취향을 공유하는 영화적 동지라는 것을 알게 된 그랑드리외는 언젠가 그와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의 결의를 다진 것은 아름다움이었으리라: 아다치 마사오의 초상>이라는 시네마틱한 시정(詩情)과 우정으로 넘쳐나는 작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영화 이미지를 그 아래 강렬히 박동하는 생명이 깃든 얇은 피부처럼 동적인 동시에 촉각적인 것으로 만드는 그랑드리외의 솜씨는 예전 그대로다. 여기서 그 영화적 피부가 감싸고 있는 건, 추억이나 회한에 잠겨 과거를 돌이켜보는 왕년의 투사가 아니라 삶과 예술은 절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굳은 신념 아래 또 다른 작품을 구상 중인, 노쇠한 육체 안에 여전히 청년의 영혼을 간직한 한 예술가/테러리스트의 형상이다.
일본영화 사상 가장 특이한 이력의 영화감독 가운데 하나인 아다치 마사오는, 니혼대학 재학 시절에 연출한 (다소 혼란스럽지만 대담무쌍한 실험정신으로 충만한) 중·단편 <밥그릇>(1961)과 <쇄음>(1963)으로 주목을 끌었고 이후 와카마쓰 고지와 오시마 나기사 영화의 각본작업에 참여하는 한편, <섹스 게임>(1968)과 <여고생 게릴라>(1969)처럼 정치적 담론으로 무장한 핑크영화, 초현실주의적 감수성을 한껏 분출시킨 걸작 <은하계>(1967), 정치적 풍경영화 <약칭: 연쇄살인마>(1969) 등을 직접 연출해 언더그라운드의 총아로 떠올랐다. 하지만 와카마쓰와 공동연출한 팔레스타인의 게릴라 투사들에 대한 기록 <적군/PFLP: 세계전쟁선언>(1971)을 발표하고 나서 얼마 뒤, 그는 적군파 병사로 중동지역의 투쟁에 직접 뛰어들면서 일본영화계에서 사라지고 만다. 1997년 레바논에서 체포되어 3년간 수감되었다 일본으로 강제송환당한 그는 2007년에 36년 만의 신작 <테러리스트>를 발표했고 최근엔 와카마쓰의 <캐터필러>(2010) 각본작업에도 참여했다.
1920년대 후반 쇠퇴해가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한복판에서, 앙드레 브르통은 운동의 미래는 앞으로 도래할 이들의 순수성과 분노에 달려 있다고 외쳤다. 자신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건 항상 초현실주의자였다고 말하는 아다치는 그러한 순수성과 분노를 줄곧 자신의 현재 속에 간직해온 인물이다. (그랑드리외-브르네가 기획한 시리즈의 전체 타이틀 ‘우리의 결의를 다진 것은 아름다움이었으리라’는 <테러리스트>의 대사 가운데서 따온 것으로, 브르네에 따르면 이는 “영화의 전투적 기능과 시적 기능 사이의 분리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공식”과도 같은 문장이다.) 그랑드리외가 밝힌 바에 따르면, 그가 아다치를 처음 만난 것은 프랑스대사관 주관으로 도쿄에서 그의 특별전이 열렸던 2008년이다. 이때 아다치는 <새로운 삶>을 보러 영화관에 왔었고 상영 뒤 이 영화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그랑드리외 편에 서서 영화를 옹호했다. 아다치가 자신과 같은 입장과 취향을 공유하는 영화적 동지라는 것을 알게 된 그랑드리외는 언젠가 그와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의 결의를 다진 것은 아름다움이었으리라: 아다치 마사오의 초상>이라는 시네마틱한 시정(詩情)과 우정으로 넘쳐나는 작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영화 이미지를 그 아래 강렬히 박동하는 생명이 깃든 얇은 피부처럼 동적인 동시에 촉각적인 것으로 만드는 그랑드리외의 솜씨는 예전 그대로다. 여기서 그 영화적 피부가 감싸고 있는 건, 추억이나 회한에 잠겨 과거를 돌이켜보는 왕년의 투사가 아니라 삶과 예술은 절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굳은 신념 아래 또 다른 작품을 구상 중인, 노쇠한 육체 안에 여전히 청년의 영혼을 간직한 한 예술가/테러리스트의 형상이다.
Beauty and the Beast - Aoi Teshima
노래 좀 추천해 보라 했더니 한나씨가 알려준 노래. 셀린 디온의 단단한 버전에 비해 느린 템포의 보사노바 리듬과 재즈 코드를 섞어 요즘 말로 달달하게 편곡했다. 세션 구성으론 목소리와 콘트라베이스, 건반이 다인 듯. 노래 자체를 보면, 건반 라인이 인상적이다. 엄청 단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