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30일 수요일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 1기 (2016) / 2기 (2017)


★★☆
그냥 피식하고 볼 정도는 되는듯.

레디 플레이어 원 (2018)



★★★
고전 게임의 향수를 불러 일으켜 즐겁게 감상했다. 가상현실 대 현실에서, 현실적 화해에 무게를 둔 것은 다소 식상했다.

2018년 4월 7일 토요일

에밀 뒤르켐, 종교 생활의 원초적 형태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912540

백남준의 총체피아노

백남준은 볼프강 슈타이케네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존 케이지를 향한 경의>에 대한 아이디어를 전하는 가운데, 자신의 조작된 피아노와 케이지의 것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거기에 장난감과 라디오와 자동차가 연결된다. 백남준은 이것을 1963년 <<음악의 전시>>에서 <총체피아노>를 통해 명확하게 구체화했다. <총체피아노>에는 다양한 오브제가 연결되었는데, 보기에, 악기라기보다는 조악한 아상블라주에 가까웠다. 케이지는 백남준에 대해 쓴 글에서 <총체피아노>는 미술관에 들어가있다고 적으며, 악기로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총체피아노>는 연주가 불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분명히 악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연주 그 자체를 초과하는 무언가가 <총체피아노>에 포함되어 있었다. 요는, <총체피아노>는 순수하게 소리를 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케이지는 여기에 대해 불편해 했던 것이다.

케이지가 불편했던 것을 조금 더 파고 들어가 보자. 케이지의 <준비된 피아노>는 철저하게 소리를 내기 위한 것이었다. 나사못과 조개껍데기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우연에 의해 발견된 것들이었고, 그것은 연주 시에 피아노의 현을 다양한 음색으로 약음화하기 위해 사용됐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케이지에게 <준비된 피아노>는 자신의 곡을 '연주'하기 위한 악기에 불과했다. 케이지에게 새로운 소리는 사실 이미 있는 소리와 같았다. 소리는 자연 어디에도 존재하는 레디메이드다. 우리가 그것을 의미있는 소리로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케이지의 작곡과 연주는 모두 그런 레디메이드 소리를 우연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핵심적 실천이었다. 하지만 백남준의 <총체피아노>는 케이지와 똑같이 발견된 오브제를 피아노에 연결했지만 발견된 오브제 그 자체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두 명의 뒤샹주의 작곡가는 레디메이드를 주요한 개념으로 취했지만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달랐던 것이다. 말하자면 케이지는 음악에서 빼기를 통해 레디메이드에 도달하려고 했지만 백남준은 더하기를 통해 그렇게 했다. 빼기를 통해 도달한 것은 순수 소음이었다. 하지만 더하기가 향하는 곳은 어떤 겹층의 구조체, 물질과 시간의 짜임이었다. <총체피아노>는 소리를 포함하는 오브제를 일종의 레디메이드 음원처럼 가져왔다. 여기서 오브제는 오브제가 포함하고 있는 모든 소리와 이미지를 포괄적으로 표상하는 기호로 다뤄진다. 그 결과, <총체피아노>의 연주자는 소리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기호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래서 케이지는 실제로 연주될 필요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사실 이런 아이디어는 오늘날 신디사이저에서 일반화 됐다. 신디사이저는 모든 음원을 데이터로 가지고 있으며, 연주자는 필요할 때마다 그것을 샘플링하고 조작할 수 있다. 신디사이저가 저장하고 있는 음원을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 연주자가 할 일은 근본적으로 연주가 아니라 선택이다. 연주는 선택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때의 음원은 소리일뿐만 아니라 대상(object)이다. 그런데 1960년대 당시 독일에서는 이런 실험이 이미 전개되고 있었다. 새로운 음악을 위해서 전자 악기의 발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실로 WDR 같은 전자음악 스튜디오는 새로운 음향을 조직하는 하나의 공간적 신디사이저 같은 것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총체피아노>는 새롭게 발명된 악기일지는 몰라도, 그것이 새로운 기술의 소산은 아니었다. <총체피아노>는 새로운 기술의 개념을 구태의연한 미술의 형태--슈비터스 식의 아상블라주--안에 가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총체피아노>는 당시 가장 진보한 음향 기술인 신디사이저를 가장 진보적이지 않은 형상과 결합한 이미지였다. <총체피아노>는 신디사이저의 원시적 형상을 새롭게 발명했다. 케이지가 느낀 또 다른 불편함은 여기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총체피아노>는 실로 새로운 소리의 조직을 위해 유용한 악기가 아니었다. 대신 <총체피아노>는 새로운 새로운 개념의 조직을 제안하고 있었다. 그것은 소리의 물질화되고 공간화되고 시각화된 차원을 주목하자는 요청 같은 것이었다.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기 위해서는 백남준의 이벤트 스코어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여기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의 플럭서스 동료라는 우회로를 통해야 한다. 리즈 코츠의 플럭서스 이벤트 스코어에 관한 분석은 내가 본 것중에 가장 뛰어나다. 
...

조지 브레히트는 레디메이드로서의 일상적 행위를 이벤트 스코어에 물화하려고 했다.
"논-아트란 이런 것이다. '예술'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예술가가 창조하지 않은 모든 것. 그래서 당신의 이벤트는 당신이 그 이벤트를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논-아트다--그것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당신이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나는 당신의 이벤트 몇몇이 우리 페스티벌에서 "실종된"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더욱 실종되거나 알아차릴 수 없다면 더욱 진실되게 그것이 논 아티피셜이라는 것..."


하지만 암컷 고래의 질 속으로 기어 들어가라는 백남준의 <딕 히긴스를 위한 위험한 음악>은 도무지 일상적인 행위가 아닐뿐만 아니라 오히려 실현될 수 없는 행위였다.

. 백남준의 이 텍스트이 재상연되는 곳은 상상imagination 즉 이미지의 영역이다. 백남준은 딕 히긴스의 <위험한 음악>을 청각이나 행위적 차원이 아니라 이미지적 차원으로 만들었다. 텍스

2018년 4월 6일 금요일

리즈 코츠, 포스트 케이지안 미학과 "이벤트" 스코어

[...] 관습적인 기보를 타자로 밀도있게 친 일군의 숫자와 단어로 교체하면서, 4분 33초는 효과적으로 스코어의 모델을 독립적인 그래픽/텍스트 오브젝트로서, 분리 불가능한 읽히기 위한 말과 퍼폼되어야 하는 액션으로서 창시한다. 케이지가 이 모델을 개시한 반면, 이것은 다른 이에게 남겨졌다. 1959-62년 사이의 프로젝트 시리즈에서 발전되기 위해서.

상연enactment와 퍼폼된 응답performed response이 직접 도입되는 가운데, 이런 "이벤트 스코어"는 1960년대에 "생산적 활동"으로서의 읽기를 위한 비평적 요청을 조악하게 문자 그대로 구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구체적이고, 오퍼레이션적인 그러한 "스코어"의 차원이 명시적인 타동사성transitivity, 매터리얼 위의 잠재적 행동하기acting와 연루되는 것만 빼고, 그런데, 이건 롤랑 바르트가 1967년에 쓰기의 일종인 "자동사성"과 "수행동사성performative"를 요청하는 가운데 제안한, 내가 아니라 "오직 언어만이 행위하고, '퍼폼'한다"는, 환원 불가능한 복수적 "텍스트"의 자폐적 활동과 대치된다. 음악을 혁신적인 텍스트성을 위한 모델로 취하면서, 움베르트 에코의 "열린 작업"의 시학은 명시적으로 루치아노 베리오, 헨리 포시르, 다른 전후 유럽 작곡가의 "열린 형식"으로 실험적인 문학 실천을 모델화했다. 바르트가 <작업에서 텍스트로>에서 제안했듯이, "우리는 오늘날 포스트-시리얼 음악이 급진적으로 "해석자"의 역할을 변경했고 해석자는 그것에 표현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스코어의 공동 저자가 되라는 감각으로 불려진다는 것을 안다. 텍스트는 이런 새로운 종류의 스코어다: 그것은 독자가 실천적 콜라보레이션을 하라고 한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는, 이런 새롭게-활성화된 "텍스트성"의 모델은 어떤 순환성의 위험을 가진다--왜냐면 그들이 미학적 선구자로 인용하는 바로 그 포스트 시리얼 컴포지션은 부분적으로 케이지의 우연성과 비결정성의 전략에 유러피안이 반응한 역사적 산물이었고, 케이지의 그 전략 자체도 글쓰기와 특별히 관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론적 교착은 쓰여진 스코어나 스크립트--오랫동안 작업의 특권화된 장소를 점유했던--, 그리고 이차적인 것으로 보였던 그것의 다양한 퍼포먼스의 상대적 지위와 관련해 현재 음악학과 연극 연구 모두 봉착하고 있으며, 그것은 "저자" "퍼포머", 텍스트, 독자, 관객 사이의 릴레이에 관한 독해의 엄청난 어려움을 선사한다. 더욱 적절한 분석은 아마도, 다양한 링귀스틱/리터러리 메터리얼이 특정한 물질적 형태와 문맥 안에서 순환할 때 이들 속에서 가능하게 된, 퍼포먼스, 상연, 현실화의 특정 모드를 구체화하면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에코가 잘 알고 있었듯이, 연주자나 배우의 그 "실천적 발명"은 "소비자적 감각의 해석자"--그는 이들을 동일화하는 데로 나아간다--와 꽤나 다르다.[11]

이런 이벤트 스코어의 케이스에서, 이벤트 스코어의 이상하게 농축되고 기이한 형태는 퍼포먼스와 출판, 전시 포멧 사이의 빠른 순환을 돕는다: 작고 이상하고 장르에 속하지 않는 그들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당시 다양한 신문과 "작은 잡지" 안에서 이벤트 스코어의 재생산은 도발적인 레벨링 효과를 가졌다: 페이지 공간 안에서 재생산된, 모든 (타이핑된/타이포그라피적) 말들은 간단하게 글쓰기, "프린트"가 된다. "말 예술"이나 시의 "자율적인 작업, 퍼포먼스 지시문의 도구적인 형식, 프로그램 노트나 스코어, 심지어 비평과 다이어그램 사이의 명백한 차이는 사라진다. 이런 잠재적인 교감가능성과 전이가능성은 매터리얼로서의 언어에 본질적이다. 특히 제도적 컨테이너의 특정한 종류로부터 축출됐을 때. 오소독스하지 않은 디자인과 극단적인 포멧과 메터리얼, 장르의 이종성 가운데, <앤솔로지>는 이런 텍스트적 비결정성과 상호침투를 위한 키 사이트를 제공한다. [...]

이렇게 벌써부터 모호한, "스코어"로서의 텍스트의 개념에 본질적인 이중 구조--분리 불가능한 언어와 퍼포먼스--를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세번째 모드를 염두에 둬야 한다: 이런 텍스트와 오브젝트 프로덕션 사이의 관계. 영의 초기 작곡에서 보이는 도구와 사운드생성 장치로서 일상 매터리얼을 조작하기부터 브레히트와 오노 등이 수행했던 조각적 프로덕션까지, 이런 초기 말 작업 다수는 오브젝트 형태를 취하거나 매터리얼한 잔여물을 생산한다: 매터리얼 오브젝트는, 스코어가 전시될 수 있듯이 전시를 위해 잠재적으로 제시됐다. 암시적인 3중 구조를 가지고 작업한다는 것은 이것들이 언어와 오브젝트, 퍼포먼스로 "현실화"되게 했으며, 이 이벤트 스코어 몇몇은 로버트 모리스나 조세프 코수스 같이 기호의 3중 구조를 연구했던 예술가에 의한 다음 프로젝트를 예견한다. (그리고 그것은 예의 작업에서 억압됐던 사진적이고 공히 재생산적인 차원에 연루된다.)[13] 말들(사인, 오브젝트, 액션, 등 하나의 말 안에 포함된 모든 것) 사이의 대치물(또한 분기화, 주저함, 풀기)의 체인을 설정 다 하고, 브레히트의 <엑시트> 같은 당황스런 짧은 텍스트는 세미오틱한 것의 기이한 심연을 열어 젖혔다. 1960년대 시각 예술로 향하는 링귀스틱 구조와 매터리얼의 엔트리를 향한 문을 열었다.

어떻게 그렇게 희귀하고 밀도있는 실천이 그러한 프로그램된 불협화음으로부터 혹은 따라서 떠오를 수 있을가? 그리고 왜 그것이 "음악"이란 외양 아래에서 발생했을까? 여기서, 1950년대 후반에 발생했던 다다와 콜라주 전통의 복잡한 재협상화가 아마도 핵심적일 거다. <앤솔로지>에 콜렉팅된 매터리얼 무리들은 모두 네오-다다이스트 구체시, 음양시, 찬스 컴포지션, 동시성의 매너다--많은 것들이 라이브로 퍼폼될 수 있다. 그러나, 이벤트 스코어는 드물게 소리내어 읽혀졌다--그들이 제안한 링귀스틱 "퍼포머티비티"는 사인의 되풀이성iterability의 그것과 더욱 가깝다. 공히 오랄 (그리고 더욱 관례쩍으론 "리터러리") 퍼포먼스 시학의 그것보다 말이다.  [...]

물리적으로 수수하고 별다른 기술이 보이지 않는, 이런 "스코어"는 레코딩과 재생산 테크놀로지(전후 시대의 사운드와 랭귀지를 점차 재구조화했던)에 츼해 추동되기도 하고 동시에 반하기도 하는 예술 실천을 재현한다. 바로 그 세미오틱스 프로젝트는 모두 이 프로세스의 효과이자 모토인데, 여기서 랭귀지와 사운드, 이미지, 시간은 디컴포지션, 정량화quntification, 리컴비네이션, 아날라시스의 오브젝트가 됐다(이거 보다 전단계는 이미 큐비즘과 다다의 재현과 사인의 붕괴에서 명백하다). 그럼에도 다양한 테크닉과 테크놀로지는 2차대전 동안 생성됐다--사이버네틱스와 "정보 이론"부터 자기 오디오테이프의 완성--이런 프로세스가 심화되면서, 복잡한 인포메이션을 전송가능한 일련의 바이너리 디짓트로 환원하고, 인덱스적 사인(문법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그것은 잠재적으로 기호화signification를 "코드화되지 않은 이벤트의 음소거된 현전presence"으로 환원한다)을 확산했다.[15] 레코딩, 리프로덕션, 트랜스미션의 (기계적, 전자적, 후에 디지털적) 테크놀로지의 만연한 압력 아래에서, 명시적으로 시간적이고 되풀이 가능한 미디어(포노그라프, 필름, 후에 오디오테이프와 비디오테이프)의 인식적 조건perceptual conditions은 전후 시대에 명백히 "정지된static" 메터리얼(오브젝트, 이미지, 프린트된 텍스트)로 점차 굴절하게 됐다--또한 예전에 한시적이었던 것은 일종의 오브젝트가 되기도 했다. 계속된 재상연reenactment에 구조적으로 의존하게 된 것과, 그리고 기입의 시스템에서 깊은 역사적 함의를 고려해 볼때, 랭귀지는 특수한 케이스, 일종의 모델이다--"이벤트 스코어"는 그것의 하나의 예일 뿐이다. 이 과정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 전후 음악의 몇몇 역사적 문맥을 재구축하는 것이 도움을 줄 것이다. [...]




"자, 뒤샹이 메인으로 레디메이드 오브젝트에 관해 생각했다. 존 케이지는 그걸 레디메이드 사운드로 확장했다. 조지 브레히트는 그것을 더욱 확장했다 ... 레디메이드 액션, 에브리데이 액션으로. 예를 들어 조지 브레히트는 그가 불을 키고 끄는 작곡을 했다. 오케이? 그게 작곡이다. 불을 키고 끄고. 자 당신이 매일 하는 거다. 맞지?" -- 조지 마키우나스 (1978)



OCTOBER 95, Winter 2001, pp. 55-89. (c) 2001 October Magazine, Ltd. and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2018년 4월 5일 목요일

에피스테메

평행한 움직임을 동시에 감지하는 것.

공시성--에피스테메

2018년 4월 1일 일요일

왕가위, 중경삼림 (1994)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있고 비행기는 언젠가 떠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