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7일 토요일
Philip Auslander, "Introduction," in From Acting to Performance: Essays in Modernism and Postmodernism (1997)
As some notes and passing references in several chapters here suggest, I have wondered particularly whether the body in performance can be accounted for semiotically, for the body seems in some ways to defeat signification. On the other hand, to posit the body as an absolute, originary presence beyond signification is neither accurate nor theoretically defensible. The problematic of the performing body lies in the tension between the body’s inevitably serving as a signifier while simultaneously exceeding, without transcending, that function: “when the intention is to present the body itself as flesh...it remains a sign nonetheless.... When the intention is to present the performer’s body as primarily a sign..., corporeality always inter- venes...” (Erickson 1995:66–7). The essays in the third section, entitled “Postmodern body politics,” continue the discussion of the signifying body begun in Chapter 8 and atttempt in various ways to arrive at a non-essentialist view of the body that nevertheless acknowledges its corporeality.[6] (8)
2018년 7월 6일 금요일
2018년 7월 5일 목요일
2018년 7월 4일 수요일
2018년 7월 3일 화요일
뻘글 단편적
https://www.youtube.com/watch?v=WrGfzsEDwMM
이런식의 영상이 심심찮게 유튜브 동영상으로 만들어져 온라인을 떠돈다. 나는 이게 사실이라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의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점은 좀 재미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있음직한 일을 들려주는 리얼리즘 소설인데, 적어도 세 가지 즉 소설과 카카오톡, 유튜브 동영상이라는 세 가지 미디어의 믹스된 버전이다.
영상을 보면 항상 카톡에 등장하는 여자가 소위 이야기하는 김치녀라는 것이 "팩트"를 통해 판명이 되고, 그것을 통해 꼼짝할 수 없이 궁지에 몰린 여자를 향해서 처리가 내려진다. 그 처리란 경제적 혜택의 박탈이다. 남자가 그동안 제공해주었던 많은 경제적 이득을 다 거세시키는 것이다. 방세 안 내주고 차를 뺏고 친정 용돈을 뺏고 뭐 그런 식. 그러고 나면 여자는 "오빠..잘못했어" 같은 말을 연신 내뱉지만 남자에겐 이제 먹히지 않는다. 참을 만큼 참고 내가 그럴만 해서 그런 거니까 닥쳐라라는 것. 그것을 꽤나 의기양양하게 말하고 쾌감을 느낀다는 것.
돈으로 사랑을 주고 돈으로 사랑을 뺏는 이미지가 꼭 한국 남성의 소유물인 것 같진 않다. 과거 우리의 부모 세대가 그랬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그때 돈은 정말로 사랑이기도 했다. 돈은 그들의 모든 것이었다. 이런 시공간에서 사랑하기 때문에 돈을 쓴다(준다)는 것은 적어도 돈으로 사랑을 산다 따위의 자본주의 교환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런 관념이 우리 세대를 거치면서 말소됐을까? 아니라고 본다. 가치관의 일정부분은 반박되지만 일정부분은 되물림한다. 즉, 우리 세대에서도 돈은 곧 사랑일 때가 있다. 문제는 그 명제에 이중잣대가 생겼다는 것이다. 우리 부모세대에게 그런 이중잣대가 있었을 거 같진 않다. 하지만 우리 세대에겐, 돈을 주고 받는다고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은 아니다. 판단은 때와 장소에 따라 기분에 따라 그랬다가도 아니게 되기도 한다. 경제력이 약화되고 있는 한국 남성에게 이는 큰 위기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들은 사랑의 불가능성 혹은 최소한 불확실성에 절망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돈은 곧 사랑이라는 명제의 의미가 이중화되기 시작하면서 이 모든 혼란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절박함의 최대한의 표현을 뜻하기도 천박함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식의 영상이 심심찮게 유튜브 동영상으로 만들어져 온라인을 떠돈다. 나는 이게 사실이라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의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점은 좀 재미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있음직한 일을 들려주는 리얼리즘 소설인데, 적어도 세 가지 즉 소설과 카카오톡, 유튜브 동영상이라는 세 가지 미디어의 믹스된 버전이다.
영상을 보면 항상 카톡에 등장하는 여자가 소위 이야기하는 김치녀라는 것이 "팩트"를 통해 판명이 되고, 그것을 통해 꼼짝할 수 없이 궁지에 몰린 여자를 향해서 처리가 내려진다. 그 처리란 경제적 혜택의 박탈이다. 남자가 그동안 제공해주었던 많은 경제적 이득을 다 거세시키는 것이다. 방세 안 내주고 차를 뺏고 친정 용돈을 뺏고 뭐 그런 식. 그러고 나면 여자는 "오빠..잘못했어" 같은 말을 연신 내뱉지만 남자에겐 이제 먹히지 않는다. 참을 만큼 참고 내가 그럴만 해서 그런 거니까 닥쳐라라는 것. 그것을 꽤나 의기양양하게 말하고 쾌감을 느낀다는 것.
돈으로 사랑을 주고 돈으로 사랑을 뺏는 이미지가 꼭 한국 남성의 소유물인 것 같진 않다. 과거 우리의 부모 세대가 그랬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그때 돈은 정말로 사랑이기도 했다. 돈은 그들의 모든 것이었다. 이런 시공간에서 사랑하기 때문에 돈을 쓴다(준다)는 것은 적어도 돈으로 사랑을 산다 따위의 자본주의 교환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런 관념이 우리 세대를 거치면서 말소됐을까? 아니라고 본다. 가치관의 일정부분은 반박되지만 일정부분은 되물림한다. 즉, 우리 세대에서도 돈은 곧 사랑일 때가 있다. 문제는 그 명제에 이중잣대가 생겼다는 것이다. 우리 부모세대에게 그런 이중잣대가 있었을 거 같진 않다. 하지만 우리 세대에겐, 돈을 주고 받는다고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은 아니다. 판단은 때와 장소에 따라 기분에 따라 그랬다가도 아니게 되기도 한다. 경제력이 약화되고 있는 한국 남성에게 이는 큰 위기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들은 사랑의 불가능성 혹은 최소한 불확실성에 절망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돈은 곧 사랑이라는 명제의 의미가 이중화되기 시작하면서 이 모든 혼란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절박함의 최대한의 표현을 뜻하기도 천박함을 뜻하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