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2일 화요일

R. Buckminster Fuller, Operating Manual for Spaceship Earth (1969)

사회는 전문화가 성공의 열쇠라는 이론 위에서 운영되고 있지만, 전문화가 종합적 사고를 가로막는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는 사회에 무수한 전문 분야들로부터 축적될 수 있는 잠재적으로 통합 가능한 기술·경제적 이점들이 종합적으로 이해되지 못하고, 따라서 실현되지 않거나, 실현되더라도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인류의 주요한 본능 중 하나는 이해하고 또 이해받으려는 것이다. 다른 모든 생명체들은 매우 전문화된 과업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국지적 우주(local universe)의 사안들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조율하는 데 있어 독특한 존재로 보인다. [...]

우리의 대전략을 조직하려면, 먼저 우리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해야 한다. 즉, 보편적 진화의 틀 안에서 우리의 현재 항해 위치가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 ‘우주선 지구(Spaceship Earth)’ 위에서 우리의 위치를 설정하려면, 먼저 즉시 소비할 수 있고, 분명히 바람직하거나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자원이 지금까지는 우리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도록 충분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원은 결국 고갈되고 변질될 수 있는 것이며, 지금까지는 충분했지만 바로 이 중대한 시점까지가 한계였다. [...]

우리는 부분만을 다루는 전문가의 역할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대신 의도적으로 수축적 사고가 아닌 확장적 사고를 추구하며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전체를 생각할 수 있을까?” 만약 생각이 커질수록 그 효과가 오래 지속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크게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

현대 지적 우위의 도구 중 하나는 ‘일반 시스템 이론(general systems theory)’의 발전이다. 이를 활용하면 우리는 가장 크고 포괄적인 시스템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다. 먼저 문제에 작용하는 중요한 ‘이미 알려진’ 모든 변수를 목록화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큰’이란 것이 실제로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충분히 크게 시작하지 못할 수 있으며, 그 경우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중요한 변수를 시스템 밖에 두게 될 것이고, 그 변수들은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시스템의 자의적으로 정해진 경계 안팎에 존재하는 알려지지 않은 변수들의 상호작용은 아마도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명백히 잘못된 결론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가장 크고 또 가장 세밀하게 파고드는 방식으로 사고해야 한다. [...]

우리가 ‘우주(universe)’라는 개념을 충분히, 그리고 정확히 정의하고 진술할 수 있을까? 우주는, 추론적으로, 가장 큰 시스템이다. 만약 우리가 우주에서 출발할 수 있다면, 전략적으로 중요한 변수를 빠뜨리는 일은 자동적으로 피할 수 있을 것이다. [...]

과학자들의 경험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두고, 나는 물리적 세계와 형이상학적 세계를 모두 포함하는 ‘우주(universe)’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주는 인간이 의식적으로 파악하고 전달한 모든 경험의 총합으로서, 이는 동시적이지 않고, 동일하지 않으며, 단지 부분적으로만 겹치고, 언제나 상호 보완적이며, 측정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모두 포함하고, 끊임없이 전면적으로 변형되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

전체 시스템을 충분히 정의한 뒤에는, 점진적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이는 두 부분으로 점차 나누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중 하나는, 정의상, 답을 포함할 수 없으므로 제거하고, 쓸모없는 부분을 버린다. 이렇게 하여 단계별로 보존되는 살아있는 부분 각각을 ‘비트(bit)’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는 이전에 남아 있던 살아있는 부분을 예/아니오의 이진 절단(bisection)으로 나누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걸러내기’ 작업의 규모는, 원하는 특정 정보를 고립시킬 때까지 필요한 연속적인 비트의 수로 결정된다. [...]

그렇다면 모든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찾고자 하는 특정 정보를 명확하게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몇 개의 ‘이진 절단 비트’가 필요할까? 첫 번째 우주 개념의 세분화 — 즉 첫 번째 비트 — 는 우리가 ‘시스템(system)’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나눈다. 시스템은 우주를 시스템 밖에 있는 모든 것(거시세계, macrocosm)과, 시스템 안에 있는 나머지 우주(미시세계, microcosm)로 나누는데, 이때 시스템 자체를 구성하는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은 예외로 한다. 시스템은 우주를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로 나눌 뿐 아니라, 동시에 우주의 전형적인 개념적 측면과 비개념적 측면으로도 나눈다. 즉, 한쪽에는 겹쳐서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연관 지을 수 없고, 겹쳐 고려할 수 없으며, 동시에 변환되지 않는, 주파수 범위가 서로 맞지 않는 사건들이 있다. [...]

시너지(Synergy) 는 언어 속에서 유일하게, 전체 시스템의 거동이 그 시스템의 개별 부품이나 부품의 하위 조합을 따로 관찰했을 때의 거동으로부터는 예측되지 않는 현상을 뜻하는 단어다. [...]

전자 하나만 가지고는 양성자를 예측할 수 없고, 지구나 달만 가지고는 태양의 공존을 예측할 수 없다. 태양계는 시너지적이며, 이는 그 개별 부품들만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태양이 지구의 ‘보급선’ 역할을 하는 것과, 달의 중력에 의해 발생하는 지구의 조석(潮汐) 맥동이 상호작용하여, 생물권의 화학적 조건을 만들어낸다. 이 조건은 생명의 재생을 가능하게 하지만, 생명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모두 시너지적이다. 지구의 녹색 식생이 호흡 작용을 통해 방출하는 가스에는, 그것이 모든 포유류의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예측하게 해주는 요소가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포유류가 호흡을 통해 내뿜는 가스가 지구 식생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것도 예측할 수 없다.

우주는 시너지적이다. 생명은 시너지적이다. [...]

James Lovelock, Geophysiology: The Science of Gaia (1989)

분리된 학문 분야별 접근만으로는 행성 규모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 점점 커지고 있다. 행성의 구획 중 가장 단순한 부문인 대기를 이해하려고 해도, 단순히 지구물리학자만으로는 부족하며, 화학과 생물학의 지식도 필요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다른 학문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하는 연구팀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전문가들의 모임에 가본 사람이라면, 각 전문가는 자기 말만 하고 듣지 않거나, 혹은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

이를 개선하려면, 개별 학문들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보다 폭넓은 기반의 일반과학 혹은 과학적 운영체계가 필요하다. 현대의 우려들은, 인간이 대기의 구성과 토지 표면 및 생물상을 변화시킨 결과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현대적 우려들은, 의학이 발달하던 초기 시절에 인체에 대해 가졌던 비슷한 우려들을 여러 면에서 반영한다.

19세기 말, 생화학과 미생물학은 이미 크게 발전했으나, 서로 단절되어 있었고 질병을 다루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의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생리학이라는 일반과학의 존재 덕분에 가능했다. 생리학은 학문 간 경계를 넘는(transdisciplinary) 학문이었고, 살아있는 유기체의 본질적인 창발적 특성(emergent properties) 을 인식했다. 예를 들어, 인체의 중심 체온이 섭씨 37도로 유지되는 원인을 알고자 할 때, 생화학적 접근만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 체온 조절은 시스템 제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리학에서 출발하면, 산화 대사와 같은 생화학적 측면이 자연스럽게 그 체계 안에 맞춰 들어간다.

이 글의 주된 목적은, 이러한 유추를 토대로 지구생리학(geophysiology) 이라는, 행성 규모 문제를 다루는 학문 간 환경을 제시하는 것이다. 특히 다양한 분야가 얽혀 있는 문제에 적용하기 위해서다. 창발적 특성이 존재한다고 가정(증명되지 않았더라도)할 때, 지구를 살아있는 유기체로 간주하는 것은 실용적인 목적에서 유용할 수 있다.

19세기 이전의 과학자들은 살아있는 지구라는 개념에 비교적 익숙했다. 그중 한 명인 제임스 허튼(James Hutton, 흔히 ‘지질학의 아버지’라 불림)은 그의 저서 『지구 이론(Theory of the Earth)』(1788)에서 지구를 초유기체(superorganism) 에 비유하며, 이를 연구하기 위한 과학으로 생리학을 권장했다.

그러나 허튼의 건전한 지구관은 지난 세기 초에 폐기되었다. 이는 지구와 생명 과학 모두에서 ‘기원’과 ‘진화 이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결과였을 것이다. 생물학자들에게는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종 진화라는 위대한 비전이 있었고, 지질학자들에게는 지구 물질 환경의 진화가 단순히 물리적·화학적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완전히 독립적인 이론이 있었다.

이로 인해 19세기에 지구 과학과 생명 과학의 분리는 불가피했다. 탐험과 개발이 진행되면서 지구에 관한 정보가 급격히 늘어났지만, 생물체를 연구하는 기법과 해양·대기·암석을 연구하는 기법은 매우 달랐다. 아마도 당시 과학은 흥분에 가득 찬 시기였을 것이다. 허튼의 ‘초유기체’ 개념을 지키거나 더 넓은 관점을 유지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놀라운 것은 과학이 분리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서로 매우 다른 두 가지 진화 이론이 오늘날까지 공존해왔다는 점이다.

이 분리가 지속된 이유는, 지구 과학자와 생물 과학자가 ‘적응(adaptation)’이라는 마취제 같은 개념을 서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응이라는 개념은 의심스럽다. 현실 세계에서, 유기체가 적응하는 환경은 단순히 물리·화학적 힘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 생물들의 활동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세계에서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게임의 일부’일 수 있으며, 환경을 바꿈으로써 더 많은 자손을 남길 수 있다면, 유기체들이 물질 환경을 바꾸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윈의 시대에는,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것 — 우리가 숨 쉬는 공기, 바다, 암석이 모두 생물의 직접적인 산물 혹은 그들의 존재로 크게 변형되었다는 사실 — 을 알 수 없었다. 생물은 단지 ‘죽어 있는’ 물리·화학적으로만 결정된 세계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숨결과 뼈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살고 있으며, 지금도 그것을 유지하고 있다.

가이아(Gaia) 이론은 빅토리아 시대 생물학과 지질학의 ‘분리’를 비판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훨씬 더 나아간다. 가이아 이론은 대기·해양·지표 암석으로 구성된 물질 환경과 생물권(biota)이 긴밀히 결합된 시스템의 진화를 다룬다. 기후와 화학 조성 같은 중요한 성질의 자가 조절(self-regulation) 은 이러한 진화 과정의 결과로 본다. 살아있는 유기체나 많은 폐쇄 루프 자기 조절 시스템처럼, 전체는 부분의 합을 뛰어넘는 창발적 특성을 나타낼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시스템은 발명가들이 잘 아는 것처럼, 단순한 인과 관계의 논리로는 설명하기 매우 어렵다.

공학자와 생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피드백의 미묘함을 알고 있었다. 항상성(homeostasis)은 피드백이 적절한 세기(amplitude)와 위상(phase)으로, 그리고 시스템의 시간 상수(time constant)가 적절할 때만 가능하다. 긍정적·부정적 피드백 모두, 적용 시점에 따라 안정이나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 이론 생태학 모델이 수학적으로 난해한 것은 엔지니어에게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이를 ‘열린 루프 시스템(open loop system)’에서 피드백이 임의로 적용된 경우로 볼 것이다.

반면, 데이지월드(Daisyworld) 같은 지구생리학 모델은 부정적·긍정적 피드백을 일관되게 포함하며, 그 결과 견고하고 안정적이다. 이런 모델은 수많은 비선형 방정식을 포함해도 안정적인 어트랙터(attractor) 를 유지한다.

나는, 어떤 지구의 특정 성질의 조절이 전부 혹은 상당 부분 결정론적 물리·화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에 반대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시스템은 화학을 경제적으로 사용하며, 물리·화학을 ‘더 잘 하려고’ 애쓸 이유가 없다. 가이아의 목적은 지구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고, 실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예측을 만드는 것이다.

가이아의 작동 원리를 고민하면서 생긴 호기심이 없었다면, 디메틸 설파이드, 이황화탄소, 메틸 요오드화물, 메틸 클로라이드와 같은 중요한 미량 기체들이 발견될 시점에 찾아지고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가이아 이론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1. 생명은 행성 규모의 현상이다. 행성 위에 생명이 드물게 존재하는 상태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동물의 절반만 존재하는 것처럼 불안정하다. 생명체는 그 행성을 조절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물리·화학 진화의 피할 수 없는 힘이 그 행성을 거주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2. 가이아 이론은 다윈의 비전을 확장한다. 종의 진화를 환경의 진화와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두 과정은 단일하고 불가분한 하나의 과정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가장 많은 자손을 남기는 종이 성공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성공은 유기체의 진화와 물질 환경의 진화가 일관성 있게 연결되는 것에도 달려 있다.

3. 가이아 이론이 지구물리학에 주는 선물은 알프레드 로트카(Alfred Lotka, 『물리생물학의 요소』1925)의 통찰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즉, 복잡한 역학의 혼돈이 부과하는 한계에 압도되지 않고, 자연의 비선형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수학적 지구관을 제시하는 것이다.

2025년 8월 11일 월요일

여미혜인지 뭔지

조국을 사면하라는 요구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견해는 '조국 일가'가 벌인 일은 상류층 일반에 무감각하게 퍼진 계급의 불법적 세습 행위로, 그것에 동정하는 놈들은 모두 명예 부르주아로서, 진정한 평등의 장애물이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법 앞에서의 평등은 별로 진정한 평등에 비해서 중요한 게 아닌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계급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부당하게 더 많이 버는 사람들이 있고 부당하게 더 쉽게 좋은 길로 가 좋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고 정당하게(?) 해도 덜 벌고 안 좋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이고 있다. 박권일에게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편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불평등, 차별에 저항하는 소수자가 '이미 존재'한다. 이들의 존재는 조국의 계급 세습을 위한 위법행위를 '법 앞에서의 평등'이란 말로 인정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이는 잘못된 것이라기보다 원래 그런것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불평등의 감각을 느끼는 것이라기보다 각자의 위치에서 그럭저럭 살만한가? 일지도 모른다. 

<내가 감히 표창장을 위조할만한 힘이 없어 좋은 대학을 가지 못했지만 표창장을 위조할만한 힘이 있었다면 나도 당연히 했겠지.> 

박권일은 이를 비굴한 중산층 의식이라고 할 것이다. 박권일은 그것에 영합하기보다 최저층에 있는 헐벗은 생명의 편이 되고자 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 지지하면서도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란 걸 안다. 나는 < > 안에 들어간 내용에 더욱 가까울지도 모른다. 박권일은 나 같은 소시민과 적대한다. 그런데 나 같은 소시민과 적대하는 게 무슨 이득이람?

소시민을 부정하기보다 소시민 의식이 현실의 불평등을 참으면서 바라는 결과가 무엇인지, 그것을 가지고 논쟁하는 편이 덜 숨이 막힐 것 같다. '진영이 아닌 의제'라는 명제는 뭐 그런 바람 아닐까 싶다.

조국 입시비리와 상류층 관행 관련된 팩트

 여미애

조국 사태는 진보진영에도 거의 악몽에 가까운 경험이었는데 아주 사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이 일로 5년을 만나던 사람과 결별했다. 남들이 우스게소리로 제네 이별 사유가 “조국”이야 하면서 농담을 하지만 실제 그랬다. 그애가 서초동 집회 나간 뒤로, 그리고 그런 그애하고 매주 싸운 뒤로 아마 헤어짐을 앞당겼던 것 같다.
조국 사태에 대한 입장들이 첨예하게 달라지면서 쏟아지는 글들을 다 따라가기도 바빴다. 당 내부에서도 내홍이 심했는데 사면 이야기가 나오는 시점 나는 내가 아는 것만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2010년대 초중반 수시 전형이었다. 논술 자소서 등을 업으로 하다보니 그때 상황이 생생하다. 당시 수시전형은 지금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전형”이었다. 사교육계에 종사하는 나도 감당하지 못하는 전형이었다. 일단 기본틀은 서류+면접전형이었는데 서류전형의 아무 제한이 없었다.
1단계 서류 평가 특징은 연구참여, 인턴봉사, 비교과 활동을 모두 기록할 수 있고 증빙자료만 첨부하면 되는 식이었다. 쉽게 말하면 학교 밖에서 한 모든 일을 생활기록부에 적을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때 내가 제일 많이 받은 오더는 논문 대필이었다. 학생 5명분의 원고료를 줄테니 5명을 논문 공저자로 만들어서 몇 가지 논문과 보고서를 완성해 달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주문은 꽤 있었고 다른 사교육업체들 알아보니 장당 얼마씩으로 가격을 메겨 돈을 받고 있었다.
나는 석사로 최우수논문상을 탔고 박사과정에 재학하면서 독서수업으로 먹고 사는 중이었다. 학자금 대출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상황에서 나에게 학부모들이 제안한 금액은 내 한 학기 등록금에 가까웠다. (700정도)
주변에 알아보니 그 일로 떼돈을 보는 사교육업자가 대치동에 엄청 많았다. 논문 대필, 보고서, 자소서 대필은 사교육 시장에 거대한 기회였다. 심지어 평생 영어 수학만 수업하던 강사들이 날 보고 “너희 로또 맞은 거 아니냐 이때 왕창 벌어라” 라고 말할 정도였다.
나는 거절했다. 양심이 깊고 도덕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고 단순히 쫄아있었다. “대필해서 서류에 잔뜩 이름만 기재했다가 면접 때 다 들통날 게 뻔해요” 라며 거절했다. “차라리 논문 쓰는 법 강좌를 열테니 그걸 수강해서 학생이 직접 듣게 하면 어떨까요?” 라고 했다가 나에게 상담 요청했던 학부모들은 나를 손절했다. 성적과 수능에 신경써야해서 그런건 필요없다고 했다.
추후 교수님들에게 그 전형에 대해 물을 기회가 있었고 면접에서 그 진위를 가릴 수 있냐 물어보니 정말 나를 세상물정 모르는 인간이라는 표정으로 보면서 그건 그냥 잘사는 학생들을 뽑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한거 모르니? 라고 답해줬다.
그렇다고 나에게 그런 작업을 의뢰한 학부모들이 다 잘사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분들은 누구는 교수 딸이라 누구는 대기업 다니는 누구 아빠 아들이라 누구는 고위공직자라 서로 네트워크가 잘 돼 있어 다 부모 빽으로 알아서 처리해준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그럴 능력이 없어 이렇게 사교육 업계에 돈이라도 밀어넣어 해줘야하는 처지라고 했다.
끔찍한 시절이었다. 인턴과 봉사활동도 일반 학생들은 청소와 노인간호 말고 없는데 교수 공직자 아들 딸들은 여기저기 고급스러운 인턴과 봉사를 하고 심지어 하지 않아도 다 발급서를 끊어준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나는 그저 그런 의뢰들을 다 거절하고 구청에서 봉사활동을 하거나 청소를 한 학생들 자소서 작성을 도왔고 학생들하고 성실히 썼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쓰는 것을 금지했다. 상담 데스크에 아예 그런 류의 어떤 의뢰도 받지 않겠다고 적어놓기도 했다. 그 광기의 시절에 아등바등해 모든 악재를 뚫고 합격한 학생들도 있었다. 차라리 이딴 전형에 목숨거느니 수능 잘봐서 승부보겠다고 학교를 떠난 제자들도 꽤 있었다.
2017년~2020년쯤 돼서야 학교 밖 어떤 활동도 기재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런 제도는 족히 7년 이상 지속된 것이다.
조민과 비슷한 나이 또래 학생들은 웬만해선 그 트라우마를 다 가지고 있다.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이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뼈 때리게 경험한 세대. 그 세대들이 청년이 되어 586을 증오하고 진보를 참징하는 자들을 경멸하며 차라리 극우에 편에 서겠다고 했다면? 이 모든 것이 정말 아무 연관도 없는 이야기인가?
단순히 한 기득권 가정의 일탈일 뿐이며 검찰권력의 무도한 피해자로 정리될 수 있는지 맥락을 살펴야 한다.
진보적 의제를 내세우고 진보의 매력자본을 거머쥐고 법무부장관까지 된 그와 그들은 어떤 세대에 혹은 그 사회 전체에게 “아? 한국은 신분제 사회였지 참” 재확인 시킨일이라면 그 죄가 작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안은 없는가?

이여로의 글: 서울문화재단의 〈연극in〉 일방적 휴간에 부쳐: '2005년 체제'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이기는 싸움을 만들기로써… : 네이버 블로그

김민관의 글: 연극인, 남웅, 인미공에 대하여 :: ARTSCENE

둘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연극인>이란 게 (아방가르디스트라고 부르든 진보라고 부르든 엘리트라고 부르든) 소수에게 닫힌 영역, 그 소수가 소수성을 향해 그 영역을 열어 젖힌다는 역설을 포함한다면, <스파크>란 것은 다수성에게 열림으로써 반대로 소수성을 밋밋하게 해버린다는 것. 이건 가짜 민주적 지향이란 측면에서 기만이라는것.

짜치는 부분이 몇 군데 있지만 무엇보다 보편성을 지향하는 소수 엘리트의 아방가르드 실천을 '소수성'으로 부르는 장면인데. 사실 역사적으로도 현재도 그렇고 아방가르드는 남근적인 것이다. <연극인> 같은 채널은 현재 <세마코랄>이 그렇듯 마지널한 영역에 있지 않았을 것 같은데? 혹여나 그런 비슷한 게 있다면 정말로, 그건 주류가 다수이면 주류일 수 없다(의대 정원수 제한 류의 담론)는 의미에서 '소수'이지 않을까?

아방가르드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 사이에서 정녕 <스파크>가 더욱 해악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혹은 <스파크>가 해악이라고 해서 <연극인>이 과연 '실재'로 상정될 수 있는가? ㅋㅋ <연극인>과 <스파크> 양자택일에서 <스파크>를 선택할 수 없고 <연극인>은 이제 사라졌으니 성급하게 '이제 실재의 자리에 등극했다'고 선언하고 수긍하는 자의 이분화된 세계에서 그야말로 '소수성'이 끼어들 자리가 있는가? 

TBS 시절 <뉴스공장>의 예를 떠올려 본다. TBS 공영방송의 프로그램이 갑자기 유튜버가 되었다. 그래도 문제의식이 있는 사람이 문제를 풀 수밖에 없다. 

2025년 8월 6일 수요일

지원을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내란의 시대에 되돌아 보는 DJ의 문화민주주의 < 문화 모꼬지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팔길이 원칙이니 하면서 문화예술 정책의 고질적인 문제를 지적할 때 항상 나오는 말이다. 물론 고마운?말이지만 한없이 권력의 입장에서만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이기도 하다. 약자를 돕자라는 말이 전제하는 건 (선한) 강자와 (순진무구한) 약자다. 

언제부턴가 문화정책 담론에 시큰둥해진다. 나와 전혀 다른 계통의 일인 것 같기 때문이다. 문화정책이 상상하는 문화구조란 대통령-문체부-산하기관-지원사업의 관료적 체계 안에서 벌어지는 소요일 뿐이다. 만약 문화정책이 예술생산에 무언가 기반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그건 예술에 맹독을 타서 조금씩 들이키는 것과 같다. 

<간섭을 하든 말든 작업을 하자> 같은 슬로건은 어떨까? 이게 정신승리일지라도, 최소한 방법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2025년 8월 3일 일요일

만들기/말하기

한국은 미술을 작품제작의 영역에 국한해서 생각한다. 미술비평, 미술사와 이론, 큐레이팅, 토크, 교육 프로젝트 등등은 미술이라기보다 미술을 지원해주는 무엇이다. 한국에서 성공적인 미술 정책의 핵심은 제작된 작품을 관객에게 잇는 것에 있다. 이 말이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미술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 이 아이디어는 1800년대 후반 일본의 식산흥업 정책. 공예품을 만국박람회에 가져나가서 파는 것을 어마어마한 국제 무역 활동이라고 생각했던 그 아이디어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미술은 산업이고 미술작품은 산업생산품이다. 왜 이렇게 한국에선 작품과 관람객이 중요할까? 사실 관람객은 소비자이고 소비자를 유인하기 위한 상품/작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게 중요하니까. 사토 도신이 말하길, 미술은 제작과 연구, 만들기와 말하기로 구성된다고 한다. 만들기와 말하기는 다르다. 제작과 연구는 그냥 다른 활동이다. 지원하고 말고의 그런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연구는 지원하는 활동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결론은 좋은 상품과 좋은 소비자를 만들자는 구호에서 주저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