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1일 목요일
제작과 담론
2025년 8월 20일 수요일
글쓰기
권시우는 언젠가부터 반자동기술법을 터득한 것 같다. 초현실주의 이후의 글쓰기 혁명이다. 미술계 자기고백적 글쓰기에서 가히 원탑이 아닌가 한다. 그 중 글쓰기에 대한 부분이 인상깊어 기록한다.
어제 집이 비어서, 빈 집에 주변 사람들을 좀 초대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그래서 혼자 술 마셨다. 막걸리와 소주 조금. 혼자서 마시니까, 금방 지루해지고 재미가 없어서 또 금방 그만뒀다. 책 안 읽은지 며칠 됐지? 얼마 안 됐다. 무슨 책이든 간에, 읽다 보면 글이 쓰고 싶어진다. 그런 충동이 싫다. (싫어졌다?) 그래서 무기한 회피 중인 것 같다. 무기한? 또 이러다 다시 읽겠지 싶지만, 중요한 건 루틴이 꼬였다는 거다. 책 안 읽고 글 안 쓰면 하루에 숭숭 구멍이 뚫린 것 같다. 왜일까? 내가 하루하루 멍청해지는 기분... 그래봤자 며칠이지만. 글쓰는 일을 잠깐 그만두면 정말로 멍청해지는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도, 참 이상한 강박이다.(권시우, 고민, 미래의 손 : 네이버 블로그)
읽다 보면 쓰고 싶다니..그런 충동이 싫다니 나로선 참 부럽다. 글쓰는 일을 잠깐 그만두면 멍청해진다는 질문에 나의 답은 '그렇다.' "그럴리가 없는데"란 부분은 부동의. 글쓰기는 수많은 '정립'하는 행위 중 가장 코어에 가까운 활동 중 하나다. 언어를 매체로 다루기 때문에. 최소한 근대 이후의 시대가 언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상 그렇다고 생각. 그리고 다음 문단.
푸코는 언젠가 (정확한 출처는 까먹었다.) 글쓰는 사람, 철학자든 비평가든 뭐든 간에 하여튼 ‘그들’은 범죄자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미 글을 써버려서, 그 사실만으로 그 사람한테 낙인이 생겼고, 그걸 계속 의식하는 한 이렇게 계속 쓸 수밖에 없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여기서 범죄자의 정의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직업을 너무 과대 평가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와 별개로 글쓰는 사람은 글을 안 쓰면, 심지어 그러기로 본인이 선택한 게 아니라면, 갈수록 내적으로 망가지는 건 어느 정도까진 사실인 것 같다. 내적으로 망가지면, 외적으로도 망가진다. 외적인 것은 이를테면... 설거지, 집안일 같은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글을 안 쓰면 내적으로 망가진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사실 나로선 글을 안 쓰니 고통스럽다기보단 좀 깔끔해진 느낌이다. 어쩌면 멍청해진다는 말을 서로 다르게 표현하는 것일지도. (ㅎㅎ)
2025년 8월 19일 화요일
《녹색은 잎으로》에 부쳐
![]() |
| 정석우, <녹색은 잎으로#1(Green is in the Leaf#1)>, 2025, 캔버스에 유채, 77cm x 72.7cm. |
내가 정석우의 작업을 보고 처음으로 인상이라고 할 만한 것을 얻은 때를 더듬어 보면, 기억하기로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쯤, 파주에 있는 스튜디오에 놀러갔을 적이 아닌가 한다. 자그마한 체구와 항상 겸손하고 예의바른 태도와는 다른, 혹은 정반대의 느낌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작가 자신으로선 지겹고 싫은 말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작은’이라든지 ‘예의’ 같은 인신에 속하는 단어를 결례를 무릅쓰고 굳이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대비는 극명하달까, 그만큼 예외적이랄까. 캔버스 3개를 이어 붙여 외형상으론 한자로 山(뫼산) 비스무레한 형태를 만들었는데, 그 크기가 문자 그대로 산과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갓 그림의 크기를 산의 크기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그러니까 물리적 크기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실로 나로선 그런 비슷한 ‘거대한 기운’을 느낀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나는 슬며시 크다는 의미에 기운이라는 말을 집어넣었는데, 무언가 이질적이고, 기분이 나빠지고, 그리고 허락한다면, 악마적이라고 할 법도 한 그런 종류의 기운이라고 부연해야 하겠다. 자문컨대, 바닥에서부터 또아리치는 거칠고 무수한 줄기, 혹은 곤충의 다리, 촉수와 같은 선 때문일까? 거듭 실례를 무릅쓰자면 우중충하다는 단어 말고 더 나은 표현을 찾기 힘든 배색이 인상주의 이래로 의심의 여지없이 자리 잡은 순색 선호의 미감을 무언가 건드린 것일까? 어두운 기운이 향하고 있는 소실점에서 희미하게 타오르는 빛의 기둥을 보면서 나는 왜 이단적 숭배의 감성을 느꼈던 것일까? 3개의 캔버스는 실로 유구한 가톨릭의 삼면화 전통을 흉내 내고 있었다. 이 작업의 제목은 <볼천지>라고 한다—생각해 보면 이 제목도 참으로 이상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언젠가는 왜 이렇게 구정물만 바르느냐고 농반진반 따져 물은 적이 있는데, 실로 범인의 눈으로 보기엔 팔레트에 혼색을 하고 남은, 원래라면 닦아 버려야 했을 오래된 물감 찌꺼기를 조용히 칠하고 있는 장면을 기어코 상상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는 진지하게 ‘탁색’이야말로 자신이 진정으로 매료된 연구 대상이며, 탁색을 잘 써야 색을 진짜 잘 쓰는 것이라고 자주 읊조렸다. 그런데 그 탁색이 대체 어떤 의미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런 색을 만드는 방식이 매우 기이했다. 이번 전시에 출품하기로 했다는 <사일런트 아크(Silent Arc)>(2021-2025)로 말하자면, 아직 유화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캔버스를 밖에 들고 나가서 눈에 맞힌다던지, 갑자기 그림을 며칠 밖에 눕혀 놓고 얼렸다가 실내로 가지고 들어와 녹인다던지, 물을 가득 채운 바가지로 화면을 때리듯 부어 제친다던지 했다는 것인데, 본디 회화가 물감층을 견고하게 쌓아가야 하는 이유는 반드시 있을 터이다. 물감과 기름의 배합에 따라 마르는 속도가 일정치 못하거나 불순물이 첨가되거나 온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지 못한다거나 하면 자연히 그림에 원치 않는 균열이 생기고 후에는 반드시 변질되며 이는 완성도의 결함과 직결될뿐더러 본의 아니게 그림을 사고자 하는 귀한 손님에게까지 의심을 사게 된다. 필시 화가라면 누구나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할 터인데, 정석우의 경우는 혹시 악의가 담긴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잘못된 행동을 정성을 들여 퍼붓는다는 것이다. 작가가 이런 과정을 ‘에이징(aging)’이라고 부른다는 것이 나로선 조금은 웃음이 나기도 하고 그럴싸하다고나 할까. 이유는 아니나 다를까 와인 숙성 따위가 떠올라서 그런 것인데 흔히 작품에 붙이는 명제의 주요 항목이 와인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평소의 쓸 데 없는 단상 때문이다.
언젠가는 정석우의 많은 작업이 퇴적층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시간성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냐 물어본 적이 있는데, 미묘하게 반응이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작가 특유의 결정짓지 않는 태도 때문일 수도 있지만, 고쳐 생각해보면 질문 자체가 원인과 결과를 뒤바꿨던 건 아닐까. 고라니가 뿔을 가지지 않는 대신 송곳니를 가졌다던가 나무의 뿌리가 거미줄처럼 생겼다던가 구름이 솜사탕 같이 생긴 것이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듯이 말이다. 아무튼 에이징이 노화하는 과정이고 사람으로 치면 유물론적 견지에서 시간이 몸에다가 새겨지며 형질이 변형해가는 과정이라면 정석우의 작업 역시 그런 과정 비슷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관련해서 정석우는 그림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거시적인 삶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진술하기도 하고 거대한 규칙 속에서 작품이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상상도 한다고 하는데, 특히 후자는 초현실주의자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초현실주의자가 인간 내부의 비인간성을 사회에 해방하는 데 골몰해있었다면, 내가 알기로 정석우가 더욱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인간도 사회도 상관없는 몰인간적 세계라서 그렇다. 이렇게 색이 다양한 질감과 함께 쌓이고 쌓인다. 탁도가 올라간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색은 보이지 않고 다만 입자가 보인다. 정석우는 그 풍부하고 복잡한 질감을 빛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런 작업을 작가는 구도의 과정으로 여긴다. 뚱딴지같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오늘날 같이 인류세나 행성적 사유 따위의 말들이 많은 시대에 나는 정석우가 내가 아는 작가 중 가장 거기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하게 된다. 정말로 빛에 가까워지는 과정이 정석우의 구도라면, 정말 거기서 그런 세계를 봤다면 나도 그것을 함께 보고 싶은 의향이 있다.
2025. 8. 19.
2025년 8월 13일 수요일
불평등과 불공정
2025년 8월 12일 화요일
Niklas Luhmann, The Function of Art and the Differentiation of the Art System (1995)
체계 형성과 체계 경계, 기능, 매체와 형식, 작동적 폐쇄(operative closure), 자기생산(autopoiesis), 1차 및 2차 관찰, 부호화(coding)와 프로그래밍 같은 문제들은 어떤 기능 체계에 대해서도 연구될 수 있다. 이러한 연구가 구체화되어 답을 얻게 되면, 사회 이론은 사회의 통일된 의미를 찾아내려는 시도—예를 들어, 사회를 인간 본성, 창립 계약, 궁극적 도덕 합의로부터 유도하려는 시도—에 의존하지 않게 된다. 이런 명제들은 사회 체계가 가질 수 있는 자기서술(self-description)의 다양한 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바로 그 하위 체계들의 비교 가능성 속에서 나타난다.
예술(법, 과학, 정치 등과 마찬가지로)이라는 영역에서 발견되는 것은 예술만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라, ‘적절한 변경을 거쳐’ 다른 기능 체계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특성들이다. 예를 들어, 2차 관찰의 방식으로의 전환이 그렇다. 예술은 하나의 체계로서 스스로를 분화함으로써 사회에 참여하며, 이는 다른 기능 체계와 마찬가지로 작동적 폐쇄의 논리에 예술을 종속시킨다. 현대 예술은 작동적 의미에서 자율적이다. 아무도 예술이 하는 일을 대신하지 않는다. 현대 예술의 사회적 성격은 이러한 작동적 폐쇄와 자율성에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분에 기초하여 분석을 진행한다. 즉, 한편으로는 체계/환경 관계, 다른 한편으로는 체계/체계 관계라는 구분이다. 체계/환경 관계를 다룰 때, 체계는 형식의 내부를 구성하며, 환경은 표시되지 않은(unmarked) 공간이다. 그러나 체계/체계 관계를 다룰 경우, 다른 쪽도 표시되고 지시될 수 있다. 이 경우 예술은 더 이상 ‘나머지 모든 것’과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정치적 편의에 의해 동기 부여를 받았는지, 부유한 고객의 의뢰를 받았는지와 같은 문제를 다루게 된다.
다른 사회 영역—경제, 정치, 과학 등—이 기능 체계로서 확립된다면, 예술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들이 특정 문제에 더 좁게 초점을 맞추고, 모든 것을 그 관점에서 바라보며, 궁극적으로 그 문제를 중심으로 폐쇄하게 된다면? 14세기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이 의심스러운 방식으로 획득한 돈을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예술을 후원하고, 그것을 정치적 지위를 강화하는 데 재투자한다면, 예술은 어떤 모습일까? 다른 체계들의 기능 지향적 분화가 사회 전체를 기능적 분화로 밀어붙인다면, 예술은 이제 다른 기능 체계의 노예가 될 것인가? 아니면—우리가 주장하듯—기능 체계들의 점증하는 자동화가 오히려 예술로 하여금 자기 고유의 기능을 발견하고 오로지 그 기능에만 집중하도록 촉구하는 것인가?
[...]
예술이 세계 속에서 만들어내는 차이를 보다 급진적으로 공식화해야 한다. 한 가지 가정은, 예술이 ‘지각’을 사용함으로써, 의식이 자기 바깥을 외화하는 활동 수준에서 의식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의 기능은 본질적으로 전달 불가능한 것—즉, 지각—을 사회의 의사소통 네트워크에 통합하는 데 있을 것이다. 칸트는 이미 예술의 기능(미적 관념의 제시)의 핵심을, 언어나 개념적 이해를 넘어서는 사고를 자극하는 능력에서 찾았다. 예술 체계는 지각하는 의식에게 작품 관찰이라는 고유한 모험을 허락하면서도, 그 모험을 촉발한 형식적 선택을 의사소통으로서 제공한다.
지각은, 사유나 의사소통과는 달리, 독립적으로 중복성과 다양성의 관계를 가진다. 지각은 놀라움과 인식을 단일한 순간에 제시할 수 있다. 예술은 이러한 지각의 가능성을 활용하고, 확장하며, 심지어 ‘착취’하여, 이 구별의 통일성을 제시할 수 있게 한다. 달리 말하면, 예술은 관찰이 놀라움과 인식 사이를 오가도록 허용한다. 예를 들어, 다른 작품에서의 전유를 통해 반복이 동시에 낯설고도 친숙하게 느껴지도록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의 식별은 개념적 추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에 의존한다. 예술은 이러한 문제에 특화되어 있으며, 이것이 일상 지각에서의 작은 불편을 해결하려는 평범한 시도와 구분되는 지점이다.
따라서 예술 작품은 일상의 현실과는 다른 고유한 현실을 수립한다. 그러나 작품의 지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성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동시에 또 다른 현실—그 의미가 허구적이거나 상상의—을 구성한다. 예술은 세계를 현실 세계와 상상 세계로 분리한다. 이는 언어의 상징 사용이나 종교의 성스러운 사물·사건 처리 방식과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예술의 기능은 이 분할의 의미와 관련된다. 이는 단순히 주어진 세계를 더 많은 사물(‘아름다운’ 것일지라도)로 풍부하게 만드는 문제가 아니다.
예술의 상상적 세계는 다른 어떤 것을 ‘현실’로 규정할 수 있는 위치를 제공한다. 이는 언어 세계가 오용의 가능성을 가지고 그렇게 하듯이, 또 종교 세계가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하듯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차이의 표지가 없다면, 세계는 그저 있는 그대로일 것이다. 오직 ‘거기 밖에 있는’ 현실이 허구적 현실과 구별될 때만, 우리는 한쪽을 다른 쪽의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다. 언어와 종교는 이러한 ‘이중화(doubling)’를 수행하여, 주어진 세계를 현실로 지시할 수 있게 한다. 예술은 여기에 새로운 변화를 가한다. 즉, 상상을 거쳐 현실로 돌아오는 우회로를 통해, 그러나 지각 가능한 사물의 영역에서 자신을 실현한다. 현실과 꿈, 현실과 놀이, 현실과 환상, 심지어 현실과 예술 사이의 다른 어떤 이중화도 예술 세계의 상상적 현실 속으로 복제될 수 있다. 언어와 종교와 달리, 예술은 ‘만들어진 것’이기에, 형식 선택의 자유와 제약이 모두 존재한다.
오직 현실과 허구적·상상된 현실 사이의 분화가 구체적인 현실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예술은 현실이 보여주지 않는 것을 ‘모방’하거나(본질적 형태, 관념, 신성한 완전성 등), 현실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을 ‘비판’하거나(그 결함, ‘계급 지배’, 상업적 지향성 등), 혹은 현실을 ‘긍정’할 수도 있다(그 표현이 실제로 성공적이며, 작품 제작과 감상이 즐거움을 준다는 것을 보여줌). 모방/비판/긍정이라는 개념들은 가능성을 다 소진하지 않는다. 또 다른 목적은 관찰자를 개인으로 호명하여, 현실(결국 자기 자신과도)을 직면하게 하고, 현실에서 결코 배울 수 없는 방식으로 그것을 관찰하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질문을 다시 말하면, 예술이 있을 때 현실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현실의 복제를 만들어내어 현실을 관찰할 수 있게 하는 예술 작품은 관찰자가 이 분할을 극복하도록 맡길 수도 있다. 그것이 이상화적, 비판적, 긍정적 방식이든, 혹은 자신만의 경험을 발견하는 것이든 말이다. 어떤 텍스트는 긍정적이기를 의도하며, 지나친 부정성에 중독된 태도에 맞선다. 그러나 그 텍스트도 아이러니하거나 멜랑콜리한 태도로 읽힐 수 있고, 자신이 겪은 소통 경험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
예술은 그 형식을 사물에 내재시키므로, 현실에 대한 합의와 반대, 긍정과 비판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지 않는다. 예술은 합리적 정당성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지각 가능한 사물의 영역에서 자신의 설득력을 펼쳐 보임으로써 이를 증명한다. 전통적 교리에 따르면 예술 작품이 주는 ‘쾌감’은 허영심을 조롱하는 악의적 즐거움, 즉 이성을 통해 세계에 접근하려는 헛된 시도를 향한 경멸의 힌트를 포함한다.
독립적으로 발전한 예술의 형태 감각은 자율성의 증대로 이어지며, 특히 예술이 자기 자신에 반응하는 역동성을 발전시킬 때 그렇다. 일상생활은 예술의 가치 있는 대상이 되며, 예전에는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왜곡되고 허위로 표현된다. 보편적 가치는 단순히 부정되거나 전복되는 것을 넘어서 중립화되고 거부된다. 이는 예술이 가치가 아닌 ‘가능성의 질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에 맞서 예술은 자체의 절차와 원칙을 발전시켰다. 즉, 새로움, 모호성, 스타일 의식, 그리고 다양한 예술 장르를 주제로 삼아 이들을 신(新) 합리주의와 구분 짓는 자기 서술이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실제 사물과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자신을 표현하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일반 사물이 스스로 평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길 요구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요구하는 작품은 그 자체로 자신을 배신한다. 이런 경우 예술의 기능은 예술의 차이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 이 차이를 없애려 하고 실패했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변명이나 비판보다 예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여기서 우리는 관찰해야 할 것은 차이의 불가피하고 지워지지 않는 법칙임을 배운다.
철학과 달리, 예술은 다른 경험들을 환상적이거나 상상적이라고 배제하거나, 2차적 속성이나 쾌락, 상식의 세계로 거부하는 ‘안전한 섬’을 찾지 않는다. 예술은 현실과 단지 가능한 것 사이의 차이를 급진화하여, 자신의 작품을 통해 가능성의 영역에도 결국 질서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 기능의 중력장 안에서, 현대 예술은 형식적 수단으로 실험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형식’이란, 현대 예술 초기에 중요했던 ‘형식과 물질’ 또는 ‘형식과 내용’의 구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의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을 ‘눈가림하듯’ 관찰하는 ‘지시적 작용’의 특성을 뜻한다. 작품은 관찰자에게 형식 관찰의 관찰이라는 지점을 가리킨다. 이것이 ‘자기목적적(autotelic)’이라는 개념의 의미였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의 사회적 기능은 단순히 잠재적인 관찰 가능성을 재구성하는 것 이상이다. 오히려, 가능성의 영역에서 질서의 강력한 힘을 증명하는 데 있다.
예술은 어떤 작동적 연쇄 내에 ‘형태 발생(morphogenesis)’의 경향이 암시될 수 있는지, 그리고 관찰자가 ‘관찰하는 관찰’을 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어떤 질서를 기준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되는지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 관점에서, 작품이 달성할 수 있는 형식적 복잡성은 결정적 변수이며, 핵심적이다. 형식의 ‘반대편’으로 작동하는 것은 자체로 또 다른 형식을 요구하고, 그 형식도 다시 ‘반대편’을 만들기 때문에, 작품의 재귀적 완전성이 얼마나 많은 다양성을 수용하고 통제할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된다.
널리 퍼진 통념과 달리, 예술의 기능은 더 이상 세계를 재현하거나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회에 대한 ‘비판’을 행하는 것도 아니다. 예술이 자율화되면, 강조점은 외부 참조에서 내부 참조로 이동하는데, 이것이 곧 자기 고립(self-isolation)이나 목적 자체를 위한 목적(art for art's sake)과는 다르다. 이런 과도기적 표현은 이해될 수 있지만, 자기 참조(형식) 없는 외부 참조는 없다. 자기 참조가 배제되는 순간, 자신을 어떻게 지시할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예술이 지각 또는 상상이라는 매체에서 자기 지시적 질서를 드러낼 때, 이는 실재뿐 아니라 허구적 현실에서도 표현되는 현실의 논리를 환기한다. 현실과 허구적 현실이라는 차이 내에서, 세계의 통일성(이 차이의 통일성)은 관찰을 피해 스스로를 구별의 형식의 질서로 제시한다.
예술은 미학적 통제를 통해 점점 확장되는 가능성의 영역에서 사회를 구원하려는 야망이 없다. 예술은 사회의 여러 기능 체계 중 하나에 불과하며, 비록 보편주의적 야망을 품을 수 있지만, 다른 체계를 대체하거나 지배하려는 진지한 의도는 없다. 예술의 기능적 우위는 오직 예술 자체에만 적용된다. 이런 이유로, 예술은 작동적 폐쇄에 의해 보호받으며, 자신의 기능에 집중하고, 내부에서 점점 넓어지는 경계 내에서 적합한 형식 결합을 지향하며 가능성의 영역을 관찰할 수 있다.
헤겔이 ‘예술의 종말’을 말할 때, 이는 오직 한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즉, 예술이 사회 및 세속적 문제와의 직접적 관계를 상실했고, 앞으로는 자신의 분화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은 여전히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보편적 역량을 주장할 수 있지만, 그것은 오로지 예술 자체의 한 형태로서,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고유한 작동 양식에 기반해서만 가능하다.
예술가가 대표하는 예술이 사회의 어느 곳에든 지식 있고 공감하는 상대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 역시 포기해야 한다. 만약 그런 ‘지원적 맥락’을 찾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가와 감식가가 상호보완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모델은 예술 체계와 사회 간 결합을 더 이상 나타내지 못한다. 오히려, 예술의 분화는 사회 내에서 소통으로서 이루어지며, 예술가, 전문가, 소비자 간의 상호작용은 오로지 예술 체계 내에서 이루어지고, 예술 체계는 이 과정으로써 자신을 확립하고 재생산한다.
낭만주의가 ‘예술 비평’이라 부르던 것은, 예술 체계에 ‘반성의 매체’로 통합되었으며, 이는 예술가의 작업을 완성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실제 반성하는 대상은 예술에 부과된 자율성, 즉 사회의 기능적 분화다.
예술 체계의 분화—연속성과 불연속성이 공존하는 과정—는 체계와 환경의 관계를 자기 참조와 외부 참조 관계로 다시 도입할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하지만, 자기 참조는 외부 참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지시할 때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어떻게 표시할 수 있겠는가? 자기 참조와 외부 참조의 통일성이 문제될 때, ‘참조의 참조’라는 공통 분모를 찾는 것이 자연스럽다.
자기 참조와 외부 참조의 관계가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따라, 우리는 주로 상징적인 예술과 자신을 기호로 생각하는 예술을 구분하며, 더 나아가 형식 조합을 실험하는 예술도 구분한다.
분화 이전 예술은 상징적이라 여겨졌는데, 이는 응축된 장식적 관계에서 더 높은 의미를 추구했다. 궁정과 시장 중심의 분화 과정에서 예술은 기호(sign)로 변모했다. 기호는 객관적 참조를 가진 것으로 믿어졌고, 예술가, 감식가, 애호가가 공통으로 가진 것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 공동체의 분화가 의사소통으로서 실현되고 나면, 유일한 선택지는 예술 체계의 작동에서 자기 참조와 외부 참조의 균형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자기 참조와 외부 참조의 연결점은, 관찰의 관찰을 촉진하는 작품의 형식적 조합에서 발견된다.
Helen Mayer Harrison and Newton Harrison, Shifting Positions towards the Earth: Art and Environmental Awareness (1993)
우리는 우주를 수조 개의 목소리와 수십억 개의 언어로 동시에 진행되는 거대한 대화로 이해한다. 그중 대부분은 우리가 존재를 안다고 해도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목소리들 중,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줄 만큼 존재가 부딪혀 온 경우조차 우리는 그 관계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관계들로 얽힌 살아 있는 시스템을 함부로 파괴하거나 교란하는 것은 극도의 오만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우리에게 모든 것은 1960년대 후반,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한 생존의 문제만을 다루기로 한 결정에서 시작되었다. 각 작업은 ‘생존’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예술가로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더 크고 포괄적인 틀이나 이해를 모색했다. 예를 들어, <라군 사이클>의 ‘일곱 번째 라군’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을 다른 데이터베이스를 중심으로 재편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 우리의 직관적 생각을 풀어내고 있다.
우리의 가장 최근 작업은 생태계를 위한 안전망, 즉 사회보장제도와 비슷한 ‘생태 안보 시스템’을 구축하는 개념을 제안한다. 그러나 인구 폭발과 같은 문제는 별도로, 그리고 포괄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마치 초원이 다른 모든 식생을 몰아내듯, 확장하는 인구 역시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발한 기술이 한편으로는 인구 압력을 해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히 확장하는 시장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생각은 단순한 환상이다. 모든 기업 활동은, 심지어 재활용조차도 생태계에 부과되는 하나의 세금이라는 사실을 잊기 쉽다.
라군 사이클 (1973~1985)
이 작품은 길이 360피트, 평균 높이 8피트, 60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일부 벽화이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제작되었으며, 운반이 가능하도록 포토뮤럴 용지를 두꺼운 면 캔버스에 부착해 만들었다. 재료로는 사진, 유화, 흑연, 크레용, 잉크를 사용했다. 1985년 코넬 대학교 존슨 갤러리에서 처음 전시되었으며, 이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도 전시되었다.
<라군 사이클>은 7개의 이야기로 된 연작으로 읽을 수 있으며, 각 이야기는 피카레스크 소설처럼 독립적인 구성을 가진다. 아주 독특한 영화의 스토리보드로도 읽을 수 있다. 예술가로서 우리는 이것을 환경 서사로 보는데, 그 형태와 주제는 관람자를 완전히 둘러싸는 특성을 가진다. 이 작품은 20세기 환경 예술뿐만 아니라 과거의 다양한 벽화 프로그램들과도 관련된다.
이 이야기는 두 인물이 나누는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우리가 살아가는 은유가 서로와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탐구한다. 즉, 우리가 세계관을 어떻게 만들고 또 그 세계관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준다. ‘라군 사이클’이라는 제목은 전 세계적으로 위기에 처한 하구 라군에서 따왔으며, 라군은 문화와 심지어 삶 자체의 은유로 사용된다.
이야기 속 두 인물은 ‘박물관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인한 생명체’를 찾기 위해 여정을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변모한다. 첫 번째 라군에서 두 인물은 서로 다른 가치와 인식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데, 한 명은 자신을 ‘라군 메이커’라 부르고, 다른 한 명은 ‘위트니스’라 부른다. 두 사람은 각자 그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하며, 결국 상황에 떠밀려 점점 더 큰 틀 속에서 대화를 이어가게 된다.
여섯 번째 라군: 은유와 담론에 대하여
다섯 번째 라군은 콜로라도 강의 수로에서 인위적 실수로 흘러넘친 물이 형성한 살턴 호수를 다룬다. 여섯 번째 라군은 콜로라도 강 전체 유역을 주제로 삼는다. 라군 메이커와 위트니스는 수생 생태계를 관찰하며 얻은 통찰을 되새긴다. 그들의 사고 범위는 살턴 호수에서 콜로라도 강 유역 전체로 확장된다. 이 지역은 엄청난 전력과 관개를 요구하는 생활 방식에 의해 크게 변화했다.
20세기의 폭발적인 거대기술은 환경에 충격을 주었으며, 스스로 ‘자리를 잡을’ 시간조차 없었다. 위트니스는 모든 자연을 요소들 간의 담론으로 보고, 두 인물 모두 이렇게 촉구한다. “신념 체계와 환경 체계 간의 담론에 주목하라.”
물의 흐름에 주목하라
흐르는 물의 온전함에 주목하라
물이 어디로 흐르는지 주목하라
물이 흐르기를 바라는 곳에 주목하라
물이 흐르도록 의도된 곳에 주목하라
물의 흐름과 소금의 섞임에 주목하라
물의 흐름과 흙과의 섞임에 주목하라
땅과 물의 담론의 온전함에 주목하라 — 유역은 그 결과물이다
땅, 물, 사람 사이의 담론에 주목하라 — 그 단절은 결과물이다
이러한 담론의 본질과 단절의 의미를 주목하라
결국 담론은 덧없고 일시적인 형태이며, 일종의 즉흥 연주다
그리고 누구든, 현재 상태를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면, 어떤 담론이든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릴 수 있다
상태의 변화를 주목하라
우리가 앞서 말했듯, 우리는 우주가 거대한 대화라고 믿으며, 새로운 생각, 은유, 가능성이 도입되면 그 대화는 변화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작품을 ‘만들어’ 왔지만, 태도와 행동의 변화를 이끄는 대화의 변화 또한 그 어떤 물리적 작품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R. Buckminster Fuller, Operating Manual for Spaceship Earth (1969)
우리의 대전략을 조직하려면, 먼저 우리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해야 한다. 즉, 보편적 진화의 틀 안에서 우리의 현재 항해 위치가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 ‘우주선 지구(Spaceship Earth)’ 위에서 우리의 위치를 설정하려면, 먼저 즉시 소비할 수 있고, 분명히 바람직하거나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자원이 지금까지는 우리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도록 충분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원은 결국 고갈되고 변질될 수 있는 것이며, 지금까지는 충분했지만 바로 이 중대한 시점까지가 한계였다. [...]
우리는 부분만을 다루는 전문가의 역할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대신 의도적으로 수축적 사고가 아닌 확장적 사고를 추구하며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전체를 생각할 수 있을까?” 만약 생각이 커질수록 그 효과가 오래 지속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크게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
현대 지적 우위의 도구 중 하나는 ‘일반 시스템 이론(general systems theory)’의 발전이다. 이를 활용하면 우리는 가장 크고 포괄적인 시스템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다. 먼저 문제에 작용하는 중요한 ‘이미 알려진’ 모든 변수를 목록화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큰’이란 것이 실제로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충분히 크게 시작하지 못할 수 있으며, 그 경우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중요한 변수를 시스템 밖에 두게 될 것이고, 그 변수들은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시스템의 자의적으로 정해진 경계 안팎에 존재하는 알려지지 않은 변수들의 상호작용은 아마도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명백히 잘못된 결론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가장 크고 또 가장 세밀하게 파고드는 방식으로 사고해야 한다. [...]
우리가 ‘우주(universe)’라는 개념을 충분히, 그리고 정확히 정의하고 진술할 수 있을까? 우주는, 추론적으로, 가장 큰 시스템이다. 만약 우리가 우주에서 출발할 수 있다면, 전략적으로 중요한 변수를 빠뜨리는 일은 자동적으로 피할 수 있을 것이다. [...]
과학자들의 경험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두고, 나는 물리적 세계와 형이상학적 세계를 모두 포함하는 ‘우주(universe)’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주는 인간이 의식적으로 파악하고 전달한 모든 경험의 총합으로서, 이는 동시적이지 않고, 동일하지 않으며, 단지 부분적으로만 겹치고, 언제나 상호 보완적이며, 측정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모두 포함하고, 끊임없이 전면적으로 변형되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
전체 시스템을 충분히 정의한 뒤에는, 점진적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이는 두 부분으로 점차 나누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중 하나는, 정의상, 답을 포함할 수 없으므로 제거하고, 쓸모없는 부분을 버린다. 이렇게 하여 단계별로 보존되는 살아있는 부분 각각을 ‘비트(bit)’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는 이전에 남아 있던 살아있는 부분을 예/아니오의 이진 절단(bisection)으로 나누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걸러내기’ 작업의 규모는, 원하는 특정 정보를 고립시킬 때까지 필요한 연속적인 비트의 수로 결정된다. [...]
그렇다면 모든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찾고자 하는 특정 정보를 명확하게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몇 개의 ‘이진 절단 비트’가 필요할까? 첫 번째 우주 개념의 세분화 — 즉 첫 번째 비트 — 는 우리가 ‘시스템(system)’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나눈다. 시스템은 우주를 시스템 밖에 있는 모든 것(거시세계, macrocosm)과, 시스템 안에 있는 나머지 우주(미시세계, microcosm)로 나누는데, 이때 시스템 자체를 구성하는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은 예외로 한다. 시스템은 우주를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로 나눌 뿐 아니라, 동시에 우주의 전형적인 개념적 측면과 비개념적 측면으로도 나눈다. 즉, 한쪽에는 겹쳐서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연관 지을 수 없고, 겹쳐 고려할 수 없으며, 동시에 변환되지 않는, 주파수 범위가 서로 맞지 않는 사건들이 있다. [...]
시너지(Synergy) 는 언어 속에서 유일하게, 전체 시스템의 거동이 그 시스템의 개별 부품이나 부품의 하위 조합을 따로 관찰했을 때의 거동으로부터는 예측되지 않는 현상을 뜻하는 단어다. [...]
전자 하나만 가지고는 양성자를 예측할 수 없고, 지구나 달만 가지고는 태양의 공존을 예측할 수 없다. 태양계는 시너지적이며, 이는 그 개별 부품들만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태양이 지구의 ‘보급선’ 역할을 하는 것과, 달의 중력에 의해 발생하는 지구의 조석(潮汐) 맥동이 상호작용하여, 생물권의 화학적 조건을 만들어낸다. 이 조건은 생명의 재생을 가능하게 하지만, 생명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모두 시너지적이다. 지구의 녹색 식생이 호흡 작용을 통해 방출하는 가스에는, 그것이 모든 포유류의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예측하게 해주는 요소가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포유류가 호흡을 통해 내뿜는 가스가 지구 식생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것도 예측할 수 없다.
우주는 시너지적이다. 생명은 시너지적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