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3일 수요일

인간의 강도

바케모노가타리였나 잘 모르겠다. 맞다면 아라라기 코요미가 하는 대사 중에서 이런 말이 있다. "친구는 필요 없어. 친구를 만들면 인간강도가 떨어지거든." 이 말이 요즘은 다 이해가 된다. 어떤 일을 할 때 함께 하는 것보다 혼자 하는 게 효율적이다. 특정 누군가와의 친분이 판단미스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차라리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아무것도 지킬 필요가 없는 상태가 편한 것 같다. 어설프게 가진 결과는 고통 뿐이다.

2025년 8월 29일 금요일

성유물로서의 굿즈

굿즈는 일종의 성유물인 것 같다. 성유물은 성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파편으로 성인과 직접 연결할 수 있는 매개체다. 그래서 신비한 힘이 있다고 여겨진다. 중세 가톨릭의 면벌부 같은 것도 일종의 성유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애니 <페이트>에 보면 특정 소환수를 소환해 전투에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 소환수와 관련된 전승이 있는 성유물이 필요하다. 미드 <로스트 룸>에서는 그러한 미스테리한 성유물이 가진 힘을 알아내어 범죄에 쓰기도 하고 성유물을 조합하여 제3의 힘을 사용하기도 한다. <페이트>나 <로스트 룸>은 성유물을 가지고 있으면 수동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은총을 너머 성유물의 힘을 능동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앞으로 굿즈 역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단순히 우상의 파편을 소중히 간직하며 기분 좋아지는 것을 너머, 파편의 '기능성' 역시 중요해질 것 같다. 모 그런 걸 기획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려나? 개소리..

2025년 8월 28일 목요일

신세대 멘탈리티

아주 웃긴 이야길 봐서 옮긴다. "나와 비슷하게 시작한 거 같은데"에서 출발선을 평등의 기준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여기는 모습을 알 수 있고, "속도가 빨라서"라는 게 1+1은 2라는 식의 투여한 시간 대비 결과는 무조건 같을 것이라는 믿음, "내면의 시작점" 운운도 비슷한 인식. 또 "그 사람이 걸었던 길을 나도 유사하게라도 밟아보고 싶다"는 건 캐리어 패스 쌓는 과정을 게임이라고 보는, 그래서 공략집이 필요하다는 인식처럼 들린다. (만약 그렇다면 이건 그들의 진짜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실전인생'은 아닌 셈이다. 게임은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점에서.)

모두가 똑같은 계층에 있다, 혹은 무계급의 사회라는 이상은 말 그대로 유토피아라는 데 동의한다면, 혹은 적어도 한 세대의 사이클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민하가 프랑스의 예를 들려준 것과 같이, 계층 자체를 문제삼기보다는 계층과 상관없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유한자에게는 더욱 중요해 보일 수 있다. 그렇담 행복이란 무엇이냐?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면 조던 피터슨과 슬라보예 지젝 정도는 거론해야겠지만, '이 정도면 그래도 행복해'라는 사회적 합의가 최소한 인문주의적 성찰을 통해 도출될 필요는 있어 보인다. 그것이 행복이란 불가능하다 이데올로기다 같은 해체적 성찰보다는 최소한의 스텐다드여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 하자면 '모든 사람들에게 더 나은, 더 많은 행복의 옵션이 인간적 수준에 부합하게 주어져야 한다.'

암튼 평등주의란 게 있다면 이 스레드가 약간의 힌트를 주는 것 같기도 하다.

2025년 8월 21일 목요일

미술비평 웹진 목록

[미술]

xhibits : 엑시빗

https://pong.pub/

ACK미술비평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

WEBZINE • ART IN CULTURE

마코

SSALAD

권태현, 라시내, 조형빈, 하상현, 하은빈, 한수민 – editorial collective null


[영화]

https://55cinema.tistory.com/

이슈 - ma-te-ri-al

http://www.ccoart.com/

https://cine21.com/

https://figk.net/


[기타]

웹진 《비유》

🦜AI 윤리 레터


[영어]

Triple Canopy

제작과 담론

제작과 담론은 미술의 두 가지 영역이다. 미술은 두 가지 모두 있어야 성립한다. 그런데 거칠게 둘은 서로 다른 활동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면서도 둘은 서로를 끌어 당겨야 한다. 좋은 작가나 큐레이터, 비평가는 두 가지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선 어떤가? 

작가들은 제작만 알고 비평가와 큐레이터는 담론만 안다. 이렇게 양분해야 공평한가 싶으나, 대부분의 큐레이터는 제작의 결과물을 재료삼아 또 다른 제작에 이용하면서 그걸 담론이라고 우긴다. 이건 따지고 보자면 덜떨어진 제작, 덜떨어진 담론이다. 그나마 비평가가 제작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하지만 그들은 현재 멸종위기종이다. 

한국에서 현재 미술이 근근이 성립한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소수 비평가의 노력에 의해서다. 작가와 큐레이터에 의한 제작은 차고 넘친다. 그런데 작가는 담론의 영역에서 거의 기여하는 바가 없다. 큐레이터는 담론과 제작 영역에서 별로 기여하는 바가 없다. 비평가는? 노력은 한다. 결과물은 신통찮지만.

2025년 8월 20일 수요일

글쓰기

권시우는 언젠가부터 반자동기술법을 터득한 것 같다. 초현실주의 이후의 글쓰기 혁명이다. 미술계 자기고백적 글쓰기에서 가히 원탑이 아닌가 한다. 그 중 글쓰기에 대한 부분이 인상깊어 기록한다.

어제 집이 비어서, 빈 집에 주변 사람들을 좀 초대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그래서 혼자 술 마셨다. 막걸리와 소주 조금. 혼자서 마시니까, 금방 지루해지고 재미가 없어서 또 금방 그만뒀다. 책 안 읽은지 며칠 됐지? 얼마 안 됐다. 무슨 책이든 간에, 읽다 보면 글이 쓰고 싶어진다. 그런 충동이 싫다. (싫어졌다?) 그래서 무기한 회피 중인 것 같다. 무기한? 또 이러다 다시 읽겠지 싶지만, 중요한 건 루틴이 꼬였다는 거다. 책 안 읽고 글 안 쓰면 하루에 숭숭 구멍이 뚫린 것 같다. 왜일까? 내가 하루하루 멍청해지는 기분... 그래봤자 며칠이지만. 글쓰는 일을 잠깐 그만두면 정말로 멍청해지는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도, 참 이상한 강박이다.(권시우, 고민, 미래의 손 : 네이버 블로그)

읽다 보면 쓰고 싶다니..그런 충동이 싫다니 나로선 참 부럽다. 글쓰는 일을 잠깐 그만두면 멍청해진다는 질문에 나의 답은 '그렇다.' "그럴리가 없는데"란 부분은 부동의. 글쓰기는 수많은 '정립'하는 행위 중 가장 코어에 가까운 활동 중 하나다. 언어를 매체로 다루기 때문에. 최소한 근대 이후의 시대가 언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상 그렇다고 생각. 그리고 다음 문단.

푸코는 언젠가 (정확한 출처는 까먹었다.) 글쓰는 사람, 철학자든 비평가든 뭐든 간에 하여튼 ‘그들’은 범죄자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미 글을 써버려서, 그 사실만으로 그 사람한테 낙인이 생겼고, 그걸 계속 의식하는 한 이렇게 계속 쓸 수밖에 없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여기서 범죄자의 정의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직업을 너무 과대 평가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와 별개로 글쓰는 사람은 글을 안 쓰면, 심지어 그러기로 본인이 선택한 게 아니라면, 갈수록 내적으로 망가지는 건 어느 정도까진 사실인 것 같다. 내적으로 망가지면, 외적으로도 망가진다. 외적인 것은 이를테면... 설거지, 집안일 같은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글을 안 쓰면 내적으로 망가진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사실 나로선 글을 안 쓰니 고통스럽다기보단 좀 깔끔해진 느낌이다. 어쩌면 멍청해진다는 말을 서로 다르게 표현하는 것일지도. (ㅎㅎ)

2025년 8월 19일 화요일

《녹색은 잎으로》에 부쳐

정석우, <녹색은 잎으로#1(Green is in the Leaf#1)>, 2025, 캔버스에 유채, 77cm x 72.7cm.

내가 정석우의 작업을 보고 처음으로 인상이라고 할 만한 것을 얻은 때를 더듬어 보면, 기억하기로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쯤, 파주에 있는 스튜디오에 놀러갔을 적이 아닌가 한다. 자그마한 체구와 항상 겸손하고 예의바른 태도와는 다른, 혹은 정반대의 느낌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작가 자신으로선 지겹고 싫은 말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작은’이라든지 ‘예의’ 같은 인신에 속하는 단어를 결례를 무릅쓰고 굳이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대비는 극명하달까, 그만큼 예외적이랄까. 캔버스 3개를 이어 붙여 외형상으론 한자로 山(뫼산) 비스무레한 형태를 만들었는데, 그 크기가 문자 그대로 산과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갓 그림의 크기를 산의 크기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그러니까 물리적 크기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실로 나로선 그런 비슷한 ‘거대한 기운’을 느낀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나는 슬며시 크다는 의미에 기운이라는 말을 집어넣었는데, 무언가 이질적이고, 기분이 나빠지고, 그리고 허락한다면, 악마적이라고 할 법도 한 그런 종류의 기운이라고 부연해야 하겠다. 자문컨대, 바닥에서부터 또아리치는 거칠고 무수한 줄기, 혹은 곤충의 다리, 촉수와 같은 선 때문일까? 거듭 실례를 무릅쓰자면 우중충하다는 단어 말고 더 나은 표현을 찾기 힘든 배색이 인상주의 이래로 의심의 여지없이 자리 잡은 순색 선호의 미감을 무언가 건드린 것일까? 어두운 기운이 향하고 있는 소실점에서 희미하게 타오르는 빛의 기둥을 보면서 나는 왜 이단적 숭배의 감성을 느꼈던 것일까? 3개의 캔버스는 실로 유구한 가톨릭의 삼면화 전통을 흉내 내고 있었다. 이 작업의 제목은 <볼천지>라고 한다—생각해 보면 이 제목도 참으로 이상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언젠가는 왜 이렇게 구정물만 바르느냐고 농반진반 따져 물은 적이 있는데, 실로 범인의 눈으로 보기엔 팔레트에 혼색을 하고 남은, 원래라면 닦아 버려야 했을 오래된 물감 찌꺼기를 조용히 칠하고 있는 장면을 기어코 상상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는 진지하게 ‘탁색’이야말로 자신이 진정으로 매료된 연구 대상이며, 탁색을 잘 써야 색을 진짜 잘 쓰는 것이라고 자주 읊조렸다. 그런데 그 탁색이 대체 어떤 의미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런 색을 만드는 방식이 매우 기이했다. 이번 전시에 출품하기로 했다는 <사일런트 아크(Silent Arc)>(2021-2025)로 말하자면, 아직 유화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캔버스를 밖에 들고 나가서 눈에 맞힌다던지, 갑자기 그림을 며칠 밖에 눕혀 놓고 얼렸다가 실내로 가지고 들어와 녹인다던지, 물을 가득 채운 바가지로 화면을 때리듯 부어 제친다던지 했다는 것인데, 본디 회화가 물감층을 견고하게 쌓아가야 하는 이유는 반드시 있을 터이다. 물감과 기름의 배합에 따라 마르는 속도가 일정치 못하거나 불순물이 첨가되거나 온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지 못한다거나 하면 자연히 그림에 원치 않는 균열이 생기고 후에는 반드시 변질되며 이는 완성도의 결함과 직결될뿐더러 본의 아니게 그림을 사고자 하는 귀한 손님에게까지 의심을 사게 된다. 필시 화가라면 누구나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할 터인데, 정석우의 경우는 혹시 악의가 담긴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잘못된 행동을 정성을 들여 퍼붓는다는 것이다. 작가가 이런 과정을 ‘에이징(aging)’이라고 부른다는 것이 나로선 조금은 웃음이 나기도 하고 그럴싸하다고나 할까. 이유는 아니나 다를까 와인 숙성 따위가 떠올라서 그런 것인데 흔히 작품에 붙이는 명제의 주요 항목이 와인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평소의 쓸 데 없는 단상 때문이다.

언젠가는 정석우의 많은 작업이 퇴적층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시간성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냐 물어본 적이 있는데, 미묘하게 반응이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작가 특유의 결정짓지 않는 태도 때문일 수도 있지만, 고쳐 생각해보면 질문 자체가 원인과 결과를 뒤바꿨던 건 아닐까. 고라니가 뿔을 가지지 않는 대신 송곳니를 가졌다던가 나무의 뿌리가 거미줄처럼 생겼다던가 구름이 솜사탕 같이 생긴 것이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듯이 말이다. 아무튼 에이징이 노화하는 과정이고 사람으로 치면 유물론적 견지에서 시간이 몸에다가 새겨지며 형질이 변형해가는 과정이라면 정석우의 작업 역시 그런 과정 비슷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관련해서 정석우는 그림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거시적인 삶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진술하기도 하고 거대한 규칙 속에서 작품이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상상도 한다고 하는데, 특히 후자는 초현실주의자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초현실주의자가 인간 내부의 비인간성을 사회에 해방하는 데 골몰해있었다면, 내가 알기로 정석우가 더욱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인간도 사회도 상관없는 몰인간적 세계라서 그렇다. 이렇게 색이 다양한 질감과 함께 쌓이고 쌓인다. 탁도가 올라간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색은 보이지 않고 다만 입자가 보인다. 정석우는 그 풍부하고 복잡한 질감을 빛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런 작업을 작가는 구도의 과정으로 여긴다. 뚱딴지같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오늘날 같이 인류세나 행성적 사유 따위의 말들이 많은 시대에 나는 정석우가 내가 아는 작가 중 가장 거기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하게 된다. 정말로 빛에 가까워지는 과정이 정석우의 구도라면, 정말 거기서 그런 세계를 봤다면 나도 그것을 함께 보고 싶은 의향이 있다.

2025.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