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제 1. 하마구치의 워크숍 영화는 관계미학의 실천을 영화 매체에 이식한 형태다.
테제 2. 바쟁식 리얼리즘과 부리오의 관계미학을 접목할 때, 영화는 더 이상 재현의 매체가 아니라 관계 생성의 장치로 이해될 수 있다.
테제 3. 클레어 비숍의 비판(관계미학의 탈정치성 관련)을 끌어올 때, 하마구치 영화가 드러내는 미시적 갈등·심리적 긴장은 관계미학의 정치적 빈곤을 보완한다.
2025년 9월 8일 월요일
2025년 9월 5일 금요일
서울을 붙이는 작명 sense
03화 미치코 런던의 그녀는 정말 런던에서 살고 있었을까?
<<엑시빗>>의 어떤 글을 읽다가 'IMF 서울'이란 공간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됨. '큐레이팅 스쿨 서울'도 있고 '웨스 서울' 등등. 뒤에 서울을 붙이는 센스가 마치 90년대 내가 중학교때 양아치 친구들이 많이 입었던 미치코 런던을 떠올리게 한다. (지방에서 어른들 옷을 흉내내서 입는 중삐리는 다 양아치.) 일본의 미치코상이 런던패션위크에서 선보이는 패션브랜드 같은 센스의 작명인데. 일본의 영국 선망은 유명하다. 그렇담 한국 인디 공간의 서울 커밍아웃은 국뽕인가? ㅎㅎ 그렇다기보다 서울은 재발견된 도시라는 해설이 더욱 그럴싸하다. 이들은 누런피부의 하얀가면을 쓴 사람들이고 그 맥락에서 서울은 가성비 좋은 '힙'일지도 모른다. 애매하게 국뽕도 가능하고...
2025년 9월 3일 수요일
2025년 8월 29일 금요일
성유물로서의 굿즈
굿즈는 일종의 성유물인 것 같다. 성유물은 성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파편으로 성인과 직접 연결할 수 있는 매개체다. 그래서 신비한 힘이 있다고 여겨진다. 중세 가톨릭의 면벌부 같은 것도 일종의 성유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애니 <페이트>에 보면 특정 소환수를 소환해 전투에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 소환수와 관련된 전승이 있는 성유물이 필요하다. 미드 <로스트 룸>에서는 그러한 미스테리한 성유물이 가진 힘을 알아내어 범죄에 쓰기도 하고 성유물을 조합하여 제3의 힘을 사용하기도 한다. <페이트>나 <로스트 룸>은 성유물을 가지고 있으면 수동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은총을 너머 성유물의 힘을 능동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앞으로 굿즈 역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단순히 우상의 파편을 소중히 간직하며 기분 좋아지는 것을 너머, 파편의 '기능성' 역시 중요해질 것 같다. 모 그런 걸 기획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려나? 개소리..
2025년 8월 28일 목요일
신세대 멘탈리티
아주 웃긴 이야길 봐서 옮긴다. "나와 비슷하게 시작한 거 같은데"에서 출발선을 평등의 기준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여기는 모습을 알 수 있고, "속도가 빨라서"라는 게 1+1은 2라는 식의 투여한 시간 대비 결과는 무조건 같을 것이라는 믿음, "내면의 시작점" 운운도 비슷한 인식. 또 "그 사람이 걸었던 길을 나도 유사하게라도 밟아보고 싶다"는 건 캐리어 패스 쌓는 과정을 게임이라고 보는, 그래서 공략집이 필요하다는 인식처럼 들린다. (만약 그렇다면 이건 그들의 진짜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실전인생'은 아닌 셈이다. 게임은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점에서.)
모두가 똑같은 계층에 있다, 혹은 무계급의 사회라는 이상은 말 그대로 유토피아라는 데 동의한다면, 혹은 적어도 한 세대의 사이클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민하가 프랑스의 예를 들려준 것과 같이, 계층 자체를 문제삼기보다는 계층과 상관없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유한자에게는 더욱 중요해 보일 수 있다. 그렇담 행복이란 무엇이냐?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면 조던 피터슨과 슬라보예 지젝 정도는 거론해야겠지만, '이 정도면 그래도 행복해'라는 사회적 합의가 최소한 인문주의적 성찰을 통해 도출될 필요는 있어 보인다. 그것이 행복이란 불가능하다 이데올로기다 같은 해체적 성찰보다는 최소한의 스텐다드여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 하자면 '모든 사람들에게 더 나은, 더 많은 행복의 옵션이 인간적 수준에 부합하게 주어져야 한다.'
암튼 평등주의란 게 있다면 이 스레드가 약간의 힌트를 주는 것 같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