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23일 수요일




집단 트라우마라고 했던가.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는 듯하다. 뭔가 바닥이 뻥 뚫린듯 한 느낌이 하루 종일 든다.
우연히 듣게 된 노래인데, 가사가 그래서 그런지 계속 듣게 된다.

2014년 4월 21일 월요일

지긋지긋

누군가의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는 대통령
이 상황을 정치적 상황으로 이해하는 정치인
이 상황을 정치적 상황으로 이해하길 바라는 좌파
이 상황을 정치적 상황으로 이해하길 바라지 않는 우파
선장, 홍가혜를 까는 언론
특정인을 미친듯이 비난하는 누군가
미친듯이 감정을 표출해대는 누군가
이 상황을 냉소하는 누군가
이 상황에서 손석희, 교감을 모에하는 누군가

2014년 2월 18일 화요일

2014년 2월 14일 서동진, '예술가를 위한『자본』읽기' 6강

2014년 2월 14일 서동진, '예술가를 위한『자본』읽기' 6강

예술가는 『자본』을 읽고 뭘 배울 수 있을까? 우리가 ‘예술가를 위한 『자본』 읽기’를 했었고 여러분들과 『자본』 1권을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읽었어요. 2권과 3권도 읽으면 좋겠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 제한이 있으니까. 가끔 필요하다면 그것을 미리 고려해 넣은 채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말이죠.

무엇을 배웠을까? 경제의 해석학은 어떻게 예술의 해석학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관해서 제가 여러분들께 어떤 질문을 던지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지난 몇 차례의 강연에서 공을 들여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자본주의라 불리우는 것은 어떠한 형태의 환상, 신기루. 마르크스에게는 유령적인 체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유령적인 체제인 자본주의가 가지는 가장 커다란 특징은 무엇이냐면.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관념적인 체제에요. 제가 자본의 형이상학이라고 얘기했었던. 자본은 자기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면서 굴러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불리우는 것은 무엇이냐면, 방금 이야기했던 것을 참조하자면,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와 같은 마르크스 스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령적인 성격, 즉, 허무적인 성격, 하지만 현실적인. 왜냐하면 말 그대로 유령이 현실이 돼서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시스템이 갖는. 사실 이 문제에 관해서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노동자라고 불리우는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힘에 대한 저항을 할 수 있는 예술가들이기도 하다는 거에요. 유령으로부터 유령을 푸닥거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사실 노동자 계급은 그와 같은 가능성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가능성에 근접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그 환상의 형식 안에서만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 환상을 깰 수 있는 건 우울하게도 스스로부터 출현하진 않아요. 한때 그것을 의식의 깨어있는 혁명적인 아방가르드가 노동자 계급에게 들어가서, 즉, 자기 자신의 주어져있는 삶의 조건 안에서밖에 생각할 수 없는 그들. 그걸 표현한 유명한 표현이 '즉자적 계급'이었는데. 그들을 '대자적 계급', 자기 자신을 의식적으로 반성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의식적인 교습. 바로 이제 교육을 받고 있었던 전위. 이런 사람들이겠죠. 이런 사람이 노동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노동자 더하기 전위’ 이런 거겠죠. 그죠? 우리는 이런 의식화를 위해서 많은 학생들이 공장에 들어가고 그랬었죠. 하지만 이제 그런 일은 불가능해요. 어떤 시기 안에서는 사실 의식화가 아니라, 단순하게 자기 삶에서 저항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노동 운동이 가능했었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아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직면해있다고 볼 수 있겠죠?

저는 이제 그와 같은 문제를 여러분들이,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가장 무엇보다도 물질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형식이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것이 작용하는 것은 사고의 형식이기도 하고 감각의 형식이기도 하다라는 거에요. 여러분들과 함께 ‘자본주의가 어떻게 물신성을 통해서 지배되고 있느냐?’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다고 보자면 우리가 사실 이 문제, 자본주의 비판 안에서 예술가들이 직면해야 할 문제들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물론 경제학 강의를 직접적으로 대상화로 하지 않아요. 무엇을 대상으로 할까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고 있었던 관념의 형식, 감각의 형식을 대하는 거죠. 따라서 노동자만 자본주의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은 감각의 형식, 사고의 형식, 환상의 형식이라 부를 수 있는, 상품 물신성이라 부르기도 했었고 화폐라고 부르기도 했었던, 이 모든 표현들은. 알고 보면 “우리가 어떻게 감각하고 사고하고 체험하고 살아가는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여러분들은 이런 인식의 형식, 감각의 형식이라 불리우는 것은 노동자들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 일이기도 하죠. 그런데 이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예술가들이에요. 바로 이런 점에서 보자면, 『자본』을 읽는 것은 “경제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자본』을 읽으려 할 때 가장 우리가 힘을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왜 현실은 나에게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는가”, “왜 현실은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게 되는 사고 형식이 되느냐”, 왜 우리는 그와 같은 방식, 주어져있는 경제문제를 대할 때 그것을 알고 보면은 그런 식으로 인식하게 되는 어떤 주관의 존재를 염두에 둘 수 밖에 없어요. 현실의 발생은 주관의 발생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각의 형식은 이미 자본주의를 다루고 있는 것이기도 해요.

여러분들이 경제 문제에 관해서, 가장 천박한 방식은 뭘까요? “그래, 진보적이어야지”라고 얘기하면서 경제 문제를 바로 다룰 수 있다고 예술가들이 믿게 될 때 자기가 노동자 계급의 삶의 현실을 다룸으로서 자동적으로 비판적일 수 있다 생각하는 건 제일 진부하다는 거죠. 주어져 있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감각의 형식과 사고의 형식이라 불리우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섬세하게 기울여야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부분들이죠. "도대체 어떤 형식인가?" 말 그대로 소설이라면, 미술이라면, 어떤 형식인가가 중요한 쟁점입니다. 물론 이것을 여러분들과 직접적으로 다룰 수는 없어요. 왜냐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주어진 삶의 재료를 어떠한 방식으로 형식화하고 있는가가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것을 뭐라고 부를까요? 사회관계, 사회적 관계의 조직이 그것이겠죠? 물론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관념화하는 거에요.

이와 같은 과정들을 우리가 염두에 둔다면 주어져있는 현실에 직접적으로 갈 수 있다고 하는 환상을 깨야겠죠. 왜? 우리는 예를 들어서 화폐의 매개를 거치지 않은 채, 상품의 매개를 거치지 않은 채, 추상적 노동이라는 매개를 거치지 않은 채, 무엇보다도 물신이라고 불리우는 매개를 거치지 않은 채, 신학적인 것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것이 만들어 냈었던 그 유령과도 같았던 믿음의 신비를 내가 스스로 의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채, 자본주의에 참여할 길은 없어요. 따라서 우리가 어떤 현실을 만나는 순간은 자본의 눈길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거에요. 그 눈길 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할 수 있는 가장 유일한 방식은 노동운동은 아니에요. 예술가들의 몫이기도 하고, 지식인의 몫이기도 하고, 노동자 스스로 발굴하고 개척할 수 있는 어떤 미적 감수성의 형식일 수도 있겠죠. 이 모든 것들 안에서 이 모든 문제를 매개해줄 수 있는 새로운 감각 형식의 조직자. 이런 사람들이 제가 생각하기에는 예술가입니다. 그런데 이때 말하는 예술가는 미술가 더하기 소설가 더하기 영화 감독 더하기 뮤지션은 아니에요. 방금 이야기 했었던 자본주의가 만들었던 삶의 감각 형식, 우리를 주관하는 방식에 대해서 저항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들이겠죠. 『자본』을 읽으면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이 문제는 여러분들과 깊이 있게 『자본』을 읽음으로써 그런 단서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찾아내는 겁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이야기 했었던 것은 저 주어져있는 리얼리티, 자본주의라 불리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했던 것은 ‘이 리얼리티를 이해하기 위해서 보고 있는 나는 어떻게 빚어 졌던가’라는 거에요. 왜냐하면 보는 나와 보여지는 대상 사이에서, 인식하고 체험하는 나와 인식 되어지는 대상 사이에서의 차별은 없다는 거에요. 바로 내가 그것을 상품으로 응시하는 순간 그것을 화폐로 응시하는 순간 나는 뭐냐하면 어떤 유령에 사로잡힌다는 거에요. 유령이라고 불리우는 비유는. 사실 관념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아요. 관념은 관념의 건너편에 있는 관념이 반성해야 되는 대상들이 있기 때문인 거죠.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 중에 한 사람은 이렇게 얘기해요. 마르크스주의는 변증법이고, 변증법의 목적은 두제곱이라고 얘기를 해요. 왜 두제곱이냐면 내게 어떤 대상이 주어져있고 그 대상을 나의 생각 속에서 받아들이는 것, 이걸 내 생각 속에서 조직하는 것, 무엇이 이뤄지고 있지? 내가 지금 보았던 것은 무엇이지? 라는 것을 생각 속에서 조직해내는 것을, 철학이 부르는 말은 유명한 표현인 반성이에요 Reflection이죠. 그죠? 모든 의식은 반성 작용이죠. 그런데 왜 두제곱이라고 할까요? 두제곱은 당연히 왜 그와 같은 의식형태가 필연적인지를 또 한번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또 한번 더 곱해줘야 한다라는 거죠. 그래서 그것이 바로 변증법이에요. 변증법이라 불리우는 것은, 방금 주어져있는 대상과 의식, 주어져있는 현실과 감각 사이에서 관계가. ‘왜 이와 같은 감각 형태가 필연적이었냐’라는 거죠. 이걸 두제곱이라고 보면 되요. 예술가는 거기에 제곱을 더해야 한다는 거에요. 왜? 그와 같은 의식 형태는 왜 이와 같은 미적 형태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냐 까지도 파헤쳐야 하는 거죠. 그죠? 이를테면, “금융자본주의와 하루키는 뭔 상관이지?” 그렇게 말이에요. “금융자본주의의 등장과 올드 뮤직의 횡행은 무엇 때문이지?” 이런 걸 말이에요. 이와 같은 세제곱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 현실, 의식형태, 그것이 가지고 있는 미적 형태로의 완결. 제곱과 제곱, 두 개의 변증법. 경제의 해석학을 문화의 해석학으로 다듬어내기 위한 배가된 노력. 이런 것이 우리가 『자본』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자본』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읽음이 예술가들을 위한 텍스트라고. ‘미적 형식이 관련돼있는, 보기 드물게 예술에 관해서 단 한번의 언급도 없으면서 예술의 형식과 우리가 가진 사회적 관계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희귀한, 드문 텍스트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아마 이 때문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거칠게 단숨에 여러분들과 몇 개의 용어로 요약했던 강의이긴 하지만 아마 여러분들이 저와 함께 6강 동안 만나는 동안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이 수업이 예술가를 위한 『자본』 읽기 취지에 맞게 이야기가 되었다면. 제일 마지막에 요약했었던 ‘예술가에게 『자본』 을 읽는 것은 어떤 쓸모가 있는가에 관한 나의 답변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뭐 정치경제학도 아니고 『자본』의 달인도 아니고, 이것도 찔끔 저것도 찔끔 주변 머리 없는 인물이긴 한데요. 여러분들과 함께 예술이라고 불리우는 것과 『자본』이라고 불리우는 자본주의상에서 감각과 의식의 형식에 관련된 가장 탁월한 텍스트로서 선택했었던 『자본』과의 관계를 한번 점검해보고 탐색해보려고 하려는 6주 간의 강의를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길어졌죠 그죠? 6주 동안 저와 함께 묵묵히 따라와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자 6주 간의 강의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2월 17일 월요일

김종철, 후쿠시마, 계속되는 홀로코스트 中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나치스에 의한 유태인 대학살은 실제로 인간성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속의 ‘시적 가능성’까지도 제거해버렸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아도르노의 비통한 선언은 물론 그 자신의 비범한 통찰력과 민감한 감수성의 소산이다. 그러나 그 통찰과 감수성에는 개인과 시대와 사회를 넘어서는 보편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홀로코스트적 상황에서 시를 쓰려고 한다는 것은 부도덕하다기보다 우둔한 짓일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아마도 가장 위엄 있는, 그리고 가장 진지한 행동은 근원적 의미에서의 ‘침묵’인지도 모른다."

김종철, 후쿠시마, 계속되는 홀로코스트 中
http://www.greenreview.co.kr/archive/133KimJongchul_pt.htm


2013년 10월 19일 토요일

조각의 순간들: 정서영,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마치 물리 공식을 참조한 것처럼 보이는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란 알쏭달쏭한 전시 제목이었다.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은 모두 사물의 부피, 그러니까 공간적인 것을 지시하는 반면, 속도는 변화, 곧 시간적인 것을 의미한다. 제목을 조금, 물리학적인 느낌(?)으로 다시 쓰면 '사물의 운동'이 되며, '공간적인 것의 시간'으로 말 바꾸면 철학적인 느낌(?)이 되겠다. 그러니까 전시 제목은 어쩌면 ‘시-공간’이라는 순수학문의 본질적인 문제를 시적으로 나열한 셈이다. 왜?

먼저 작품을 살펴보자. 출품작 중 하나인 <흙탑>(2013)은 의자에 앉은 사람의 무릎 위에 즉흥적으로 만든 탑을 올려 놓고, 쓰러지지 않게 균형을 잡는 장면을 포착한 사진 시리즈다. 엉성하게 만든 탑을 무릎 위에 올려 놨으니 쓰러지는 것은 당연지사. 흥미로운 점은 중력이라는 물리법칙과 신체 감각의 불항상성 사이에서 ‘어영부영’ 절묘하게 균형을 맞추려는 그 ‘조각적 상황’이다. (여기서 나는 조각적이라는 형용사적 용법을 썼는데, <흙탑>은 역사적 관습으로서의 ‘조각’이라기 보다 퍼포머와 조각이 갖는 관계, 조각의 가능태에 가깝기 때문이다.) 짧게 하나 더 살펴본다면 <운동>(2013)이다.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곧 무너질 것 같이 위태롭게 서로 기대어진 나무 책장과 각목은 중력과 인력 그리고 척력 사이의 긴장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드러나는 것은 이들이 관계 맺는 '찰나'적 방식이다. 전통적 조각이 가지는 초시간성을 염두에 둔다면, 인식론적 전환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까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는 조각을 넘어 조각을 지배하는, 이른바 메타-조각적 현실 원칙을 은유하기 위해 고안된 말인 듯하다. 미술관 벽을 상징하는 듯 해보이는 작은 하얀 판을 가로로 눕힌 후 바퀴를 단 <직전과 직후>에서는 미술계(제도) 같은 사회 문화적 문맥과 관련이 있는 듯 하고, 실제 그것과 상관 없이 본 것을 그대로 조각으로 만들어버린 듯해 보이는 <멀리서 본 것>은 어떤 인식론적 경험성을 더욱 부각시켜 객관적 실재의 부재를 시각화 한 것으로 보인다. 공간예술이라는 조각의 제 전통을 초과하는 듯 해 보이는 이 조각들은 '조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조각의 내적 진리에 대한 순진한 믿음보다, '조각은 언제 조각이 되는가'라는 시간적이고 경험적인 우회로를 택한다.

한편 정서영은 조각적 진리의 확신을 유보한 채, 모든 상황을 통해 의심하길 원한다. 이런 점에서 어쩌면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떠올리게 하는, 조각에 대한 궁극적 질문의 한 뭉치다. 또 그런 의미에서 의자의 사전적 정의, 실제 의자 그리고 의자 사진을 병치해 분석철학적으로 예술 개념을 도해했던 조세프 코수스의 개념주의 작업과 어느 정도 맥이 상통해 있다. 하지만 이 조각이 동어반복적 예술 명제로 순환하는 것에서 끝나지는 않는 듯 하다. 속도, 즉 공간으로부터 시간으로 관심의 돛을 돌린 바, 반복해서 말하지만 경험성,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경험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관객'이 조각에 실재성을 부여하며 그 틈을 벌린다. 특히 벽으로부터 나뭇가지 모양으로 뻗어 나온 철제 펜스와 지시문이 적힌 나무 판넬의 연결로 구성된 작품, <무릎>(2013)이 그러한데, “벽과 가장 가까운 바닥에 자리를 잡고 멀리서 다가오는 그것이 둘로 나뉘는 것을 응시하라” 같은 알쏭달쏭한 지시문은 의미를 차치하고서라도, 관객이 조각을 지각하고 반응하길 요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퐁티적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작가의 조각적 회의는 조각 내부에 새겨진 진리의 탐구라기보다, 역설적으로 그것의 부재의 혐의를 도출해 낸다. 내부의 관념성에서 현실로 빠져나온 조각은 경험적 탐색의 장이 되며, 여기서 관객은 탐험가로서 '실재와의 접촉'이라는 조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어내는 핵심적 위치에 지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관념에서 현실로, 내부에서 외부로, 결과에서 과정으로, 작품에서 관객으로 향하는 서구 현대 조각의 지난 한 경향을 정서영의 조각을 통해 충실히 보게 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사실, 관객이 어떤 구체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지에 이 조각은 여전히 관심 없어 보인다. 불충분한 레퍼런스의 제시, 고강도의 암호 같은 제목, 그럼에도 불구한 지속적인 자기 참조의 제스쳐에서 분명 모더니스트의 한 면모가 강력하게 드러난다. 나는 앞서, 요소로서의 관객의 역할을 언급하며, 작가의 예술적 기획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했다. 굳이 '기능'이라는 다소 기계적인 뉘앙스의 단어를 고른 이유는, 어디까지나 계산된 기획에 따라 부여된, 관객 역할의 형식적 한계 때문이었다. 관객 경험성은 분명히 동어반복을 넘어서기 위한 키워드지만 딜레마적 상황에 빠진다. 경험하는 순간 형식적 경험으로 전락하고, 생각하는 순간 동어반복에 빠지는, 매우 고약한 상황이다.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그래, 현대 조각이란 바로 이런 거야!"

* 퍼블릭아트 게재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