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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salind E. Krauss, Under Blue Cup, (NY: The MIT Press, 2011) |
인간은 기억에 의해 지지된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도 좋았던 순간은 다 기억한다고 누군가 그랬듯이, 사람은 좋았던 기억을 가지고 평생을 버티며 살아간다고 한다. 크라우스가, 이 명망있는 미술사가이자 비평가가 동맥류에 걸려 기억상실증에 걸렸을 때, 자신의 기억이, 그 지식이 모두 사라진다고 했을 때 느꼈을 공포는 아마 상상초월일 것이다. 그래서 크라우스는 이 책 Under Blue Cup에서 내내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반드시 기억하라고 말한다. 자신은, 나 스스로는 기억할 수 없더라도, 나를 기억하고 있는 무언가에 지탱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계속해서, 끊임없이 물으라고, 질문하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녀의 책 Under Blue Cup은 그 자체가 이미 그녀의, 기억의 "기술적 지지체"일 것이다.) 이것은 40년대에 태어나서 평생동안 미술에 정신을 헌신한 사람이, 스스로를 망각한 오늘의 예술에게 건네는 절박한 전언이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다.
"UNDER BLUE CUP. 기억 치료법의 첫 번째 룰에 의해 의기양양하게 증명된, 내 첫 번째 플래시카드의 명각: 만약 당신이, (만약 혼수상태에 걸려 절대 확실하지 않은) 당신 스스로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것이라도 기억하기 위해 스스로를 가르치기 위해 연상적 비계(scaffold)가 필요하다: 그런 내러티브가 내 자신이라도 되는 듯이 대우하는 것은 흥미롭다. 그러나 나는 곧 현재의 예술에 전념하는 것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Under Blue Cup은 기억하기의 활동이다. 끊임 없는 “너는 누구인가": 기묘한 광신(Ubuesque fanaticism)과 함께 개념미술의 습격 너머로 다시 생각하기 위한 십자군(crusade); “자아(self)”의 해체주의적 거부에 어깨를 으쓱거리기. 그것은, 시각의 동맥류적 숙청에 저항하기 위해 용기를 낸 아주 소수의 예술가를 고려한다. 그 숙청은 예술 그 자신의 그라운드에 반해서 규범화된 비인간적 치욕(opprobrium of a mindless) 하에서 특정한 미디엄의 실천을 매장시킬 셈이다: 미적 오브제는 상품이기를 포기하고, 미적 특정성은 부적절하게 철학적인 것을 포기한다. Under Blue Cup은 이런 특정성의 수호자를 미디엄의 “기사”라고 부를 것이다."
"바르트는 언제나 중립적(Neutral) 용어의 구조적-언어적 개념 위에 놓인 다양성으로서의 영도를 설명했다. 중립적 제 3자의 자리가 어떻게 현상학적 바이너리(binary)를 붕괴시키는지에 대한 비고 브론달(Vigo Brondal)의 설명에서 처럼. 말하기는 구별된 소리를 필요로 한다: 바이너리 D/T를 지키기 위해 T의 파열적 소리에 의해 부정된 D의 내파적 형식. 그러나 이런 중요한 차이는 중립화될 수 있다. 독일어 단어에서 마지막 음절의 마지막 D는, (Hund [hunt] 그리고 Bund [bunt]처럼) T로 발음될 때. 혹은 영어에서, (still에서 sdill로 발음되는 것처럼) S 뒤에 T가 따라올 때. 말하기의 영도는, 바르트가 문학의 힘의 언어의 강권(coercion)이라고 부르는 것(그것은, 그것 [부르주아]의--명백하고 보편적인--가치가 보편적이라는 계급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을 중성화한다. 영(zero)의 중성화는 그러므로 비-망각(non-forgetting) 더하기 비-회상(non-remembrance)으로 도식화될 수 있다. 그것은 정확히 미디엄의 기술적 지지체의 발명의 상태(status)이다."인스톨레이션을 밀란 쿤데라를 따라 "참을 수 없는 키치의 가벼움"로 명명하고, 그것에 반해서 예술의 특정성을 지켜내려는 예술가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면서까지, 동시대 미술의 비판성을 지켜내려는 크라우스의 노력은 애틋하기까지 하다. 미술에 대한 무한 애정이랄까. 존경스럽다... 하지만 보자. 그녀가 큰 두덩이로 양분한 미디엄과 그 반대편에 배치한 인스톨레이션, 그리고 그 융합이 잘 됐을 때의 기술적 지지체, 안됐을 때 키치, 여기서 분명한 것은 소위 뉴미디어아트라고 불리는 전자적 미술은 거의 고려 혹은 언급 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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