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리아답터파가 있고 골동품파가 있다면 나는 골동품파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것의 신선함보다 낡고 오래된 것의 신비로움에 더욱 끌리는 경향이 나에겐 있다.
물론 오래된 것에 모두 끌리는 것은 아니다. 오래되면 오래될 수록 가치를 발하는 것이 골동품의 매력이라면, 내가 끌리는 부분이 바로 이런 지점이다. 신제품의 상태에서는 절대로 생각될 수 없는 아우라가 골동품에는 있다. 쓸데 없이 흘러가는 현재와는 다르게,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골동품은 단단하게 동여매어놓고 그것을 여기서 환기시켜주는 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골동품과 신제품이 처음부터 그대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골동품은 신제품의 부분집합이다. 모든 신제품이 골동품이 되지는 않으나 그 중 몇몇은 분명히 골동품이 된다. 미래는 과거로 흐르고 그 중 몇몇의 순간은 가치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좀 더 진지한 얼리아답터파와 골동품파에겐 그런 시간적 차원이 통용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신제품에서 골동품의 가치를 보는 자가 있다. 미래의 과거의 가치. 그리고 골동품에서 신제품의 과거의 미래의 가치를 보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얼리아답터파와 골동품파는 변증법적으로 만난다. 얼리아답터파에 의해 미래의 과거가 쓰여지고 골동품파에 의해 과거의 미래가 다시 쓰여진다. 어쩌면 얼리아답터파와 골동품파는 원래 한 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골동품파로서 나는, 조금 더 얼리아답터스러울 필요가 있다. 이것은 언제나 신경향을 쫓는다는 의미라기보다, 새로움은, 미래는 언제나 발견된다는 견지에 가까울 것이다. 지금의 고답적 공부는 일단은 그런 의미에서 긍정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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