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 해서 완독. 그러고보니 오랫만에 비미술 책을 읽었다. 사사키 아타루 읽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아직 책을 사보진 못했다고 하니 김형관 작가가 빌려줬다. 이 책은 대중강연이나 대담, 짧은 비평을 모아 놓은 앤솔로지라 진면목을 파악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같은 주 저서에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지레짐작정도는 가능하다.
거칠게 분류하자면 그는 기본적으로 반헤겔주의자이자 니체주의자다. 곳곳에서 헤겔에 대한 존경심과 비아냥거림이 동시에 나오며, 반대로 니체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 또한 발견 가능하다. 그런한 전체나 총체로서의 진리보다는 개개인 안에서부터 출현하는 진리의 계기 같은 것에 더욱 관심을 둔다.
텍스트에 관한 절대적 긍정이랄까 그런 것도 발견된다. 그래서 데리다의 "텍스트 밖엔 아무 것도 없다"를 자신의 버전으로 더욱 밀고 나가서 '언어 바깥이야말로 우리가 언어 내부라고 생각해온 것이며, 바로 그 언어가 탄생하는 곳이다'고 말한다. 여기선 블량쇼 같은 사람이 참조되는데, 나는 철학도가 아닌 입장에서 블랑쇼나 데리다나 그 나물에 그 밥같아 보이며 그 말이 그 말 같아 보인다. 물론 그들만의 사정이 있겠지만 말이다.(1장 말이 태어난 곳)
311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사사키 아타루를 뜨게 해준 테마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만. 그의 일관된 태도는 311 '이후'에 관한 모든 것에 관한 불편함이다. 즉 헤겔의 역사 철학이 그렇듯이 종언을 전제로 한 어떤 목적론적인 사상에 그는 반대한다. 그와 반대로 그는 원전 이후, 그 이후 무엇이 바뀌었는지, 그리고 누가 그렇게 했는지에 관한 어떤 불명확함과 어떤 진실(곧 죽음)에 대한 무력감만이 남았으며, 그런 한 311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이후'라는 담론은 거짓이란 것이다. 또한 종말을 기정사실화하며 휴거를 바라거나, 혹은 완전히 원전 피해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관한 생각을 말소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생각을 지속하며 결국 우리는 뭔가를, 역사를 바꿔 나가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런 생각, 즉 '이후'란 담론에 관한 철학적 성찰은 대단히 빛난다는 생각했다. 세월호의 "잊지 않겠습니다"란 슬로건과도 일견 유사하단 생각도 했다. (6장 변혁을 향해, 이 치열한 무력을)
그의 미론이랄까, 그런 것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장은 아무래도 "<우리의 제정신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달라>를 요약한 기본 주기 21개"다. 이 글은 실러의 미적교육론에서 설명되는 예술의 혁명성이 오늘날 쓸모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글이며, 나아가 현실 사회에 실질적 영향력이 미미해 보이는 (어쩌면 서정적인) 예술의 존재를 그 자체로 혁명적으로 만들기 위한 글이다. 나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를 하자면 (쩝...) 그는 일단 먼저 17세기 보자르나 그리스의 테크네 개념을 언급하며 기존의 예술 개념을 무효로 돌린다. 이건 한편으로 근대 이후 쌓여온 비판을 포함한 현대적 예술개념의 전개과정을 무시하겠단 태도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아무튼 그리곤 실러의 미적교육론을 장황하게 설명하며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토대론을 비판한다. (아무래도 이런 프레임을 짜는 이유는 '미'의 정치성을 논하고 싶은데, 실질적 효과를 주장하는 만만한 호구가 필요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실러의 미적교육론이 만개한 버전이 신자유주의일 수 있음을 이어서 지적하며 실러의 지지가 이 쪽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을 것임을 명시한다. 그리곤 한편으로 그는 다시 계속해서 속류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며 토대와 상부의 '효과'를 창출하는 더욱 근본적인 무엇에 관해 이야기 한다. 그것은 (모든 근대성의 출발점으로 푸코가 지적한) "규율 권력" 개념이다. 그는 이것이 감성적인 것 안에 이성적인 것을 심는 방식이며 실러의 미적교육과 닮았음을 지적한다. 그리곤 그것의 역류(보텀업), 개인적 차원에서부터 국가적 차원의 규율을 형성하는 기술인 실러적 의미의 예술 개념의 혁명성을 다시 꺼낸다. 결국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푸코의 근대적 "규율권력"은 감성을 이성화하는 미적교육의 방식이며, 이것은 (실러적 의미로서) 급진적인 방식으로도 충분히 사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규율권력의 급진적 버전이 바로 예술을 만드는 것이며, 나아가 스스로 미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왜 글을 쓰는지 아직 이해를 하지 못했다. 이건 비판이 아니라 종종 이런 방식의 글쓰기와 마주치는데 진짜로 잘 모르겠다. 내가 마르크스나 알튀세, 쉴러, 푸코를 잘 몰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글 안에서만 보자면 속류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는 것 같다. 그리곤 거기에 대한 탈출구로 푸코와 알튀세가 물망에 오른다. 하지만 알튀세는 생략되고 푸코가 선택된다. 그리곤 푸코는 쉴러와의 비교를 통해 설명된다. 아니 쉴러를 옹호하는 것처럼 설명된다. 만약 내가 이런 테마로 글을 쓴다면 그냥 푸코 하나만 가지고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미적 인간이란게 '자기의 테크놀로지' 같은 것과 유사해 보이기도 하고 말이지. 혹은 알튀세만로도 토대론 비판부터 시작해서 어떻게든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굳이 이 글에선 짧막짧막하게 여러가지 비슷한 다른시간대의 사상가들이 거론된다. 왜 굳이?--라고 생각했는데 독일 관념론에 관한 강의였나보다. orz
한편 미술학도로서 내가 이런 방식에 매력을 못느끼는 이유는 예술, 혹은 미술의 역사 안에서 여러겹으로 시도됐던 다양한 실천이 괄호쳐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런 방식은 역사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미적-인간-되기는 진정으로 미술사에서 시도된적이 없는가? 특히 20세기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 프로젝트(광범위하게 포함시키자면 포스트모더니즘 미술까지도)는 온전히 그런 취지에서 상이하게 작동된 것 아닌가 싶다. 따라서 사사키 아타루 방식의 예술 존재론의 혁명성은 사실 너무나 일반론이어서 아무 것도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의 머리 속에는 물론 다른 버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내가 못 알아 들은 것일지도 모르고.) 그런한 미술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선 미학과 미술사의 어떠한 경계 지점을 명확히 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사키 아타루는 소설가이기도 한가 보다. ㅎ 한 번 읽어보고 싶다. 국적 불명의 고답적 문체를 구사한다는데, 책에서 어떤 평론가에 따르면 소설인듯 하면서 소설이 아니고 미문인듯 하면서 미문도 아니고 사람 열받게 하는데 그래서 재미있고...그렇단다. 힙합 가사를 쓰는 사람이 진중하면 이렇게 된달까, 그런 느낌이다. 내 주변에도 몇몇 있는 인간형이다. 뭔가 덕지덕지 붙어서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그 모습은 꽤나 처량하게 보이는, 그런 하이브리드.
이렇게 이야기하면 까 같은데 그런 건 아니다.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으며, 여러가지 의미에서 우리 세대의 지식인의 한 모델을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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