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일기를 쓰는 일도 지겹다. 정리도 잘 안 되고.
박찬경 선생님 강의록을 정리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사실 어떠한 서양 미술이론을 읽는 것보다 와닿는다 해야하나, 그런 느낌이 있다. 뭔가 우리, 내 이야길 하는 것 같은, 예컨대 옥토버 같은 글을 읽을 때 마주치게 되는 반투명한 막과는 확연히 다른, 보다 더 이해하기 편한, 그보다 마음이 편해진달까? 그런 컨텍스트가 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매력적이라거나 뛰어 들어서 하고 싶단 느낌은 별로...들지 않는다고 해야하나. 제국주의, 식민주의, 근대성, 동양, 서양, 탈식민.... 어감이 그리 유쾌한 단어가 아니다. 고리타분하게 느껴지고, 왠지 모르게 잘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알고 싶지도 않고.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게임으로 예를 들면 복잡한 던전에서 길을 헤매는 느낌이다. 배경은 어둡고 시나리오는 진행되지 않는다. 반복적이고 지겨운 것들의 연속이다. 계속 괴물만이 끊임없이 출몰하고 그것과 맞서 싸워야 한다. 히로인도 없다. 동료도 없다. 그런 느낌.
내가 작업을 접고 이론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생각해보면 단순한 이유에서다. 여자애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랄까? 대학 초년생, 전시를 보러 가면, 막상 그들이 전공자인 나에게 설명을 기대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답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꽤나 쇼크랄까. 속으로 이건 아니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나 스스로도 뭔지 모르는 일을 전공하고 있고 또 생산하고 있다고, 그래서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단순히 이유였던 것 같다. 쪽팔리지 않도록 알아야 한다.
애초에 작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는데, 지금 당장의 미술과 상황이 나에겐 아무래도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러니까 어느정도는 미술을 실천적으로 보는 면이 크다. 미술로 뭔가를 하고 싶은 것이다. 뭔가 지금보다는 나은 어떤 것을 위해서. 그걸 위해서 미술을 제대로 알고/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미궁이다. 보면 볼 수록, 읽으면 읽을 수록 왜 이걸 하는지 모르겠다. 물 건너서 미술 현장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은 좋든 싫든 모두 현실문제에 대한 비판 의식에서부터 비롯되는데, 또 그런 텍스트를 중요하다고 읽게 되는데, 이쪽에선 그걸 아카데믹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이론과 작업은 한국미술의 구림의 전거가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혀 연결이 잘 안 된다. 된다고 해도 느리다. 그러면 성실한 누군가가 나중에 정리를 할 것이다. 서양 미술사 방법론을 참고하여.
불편한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거다. 사실 거의 아무 상관이 없다. 미술사학이나 미술이론을 공부한 사람들이 현장에 나와서 겪는 멘붕은 대동소이할 거다. 그래서 종종 현장 작가들에게 무시당하기도 한다. 미술을 너무 모른다고. 하지만 그건 모두 마찬가지다. 또 웃긴 건 작가들이 그렇게 이상한 이론 가지고 갖다 붙여서 쓰는 글들 안팎으로 무시하면서도, 자기 작업에 대한 글은 종종 그럴싸하게 심도 깊은 것처럼 보이는 이론적 스타일을 요구한다. 돈이라도 주는 날엔 그렇게 안하면 제 값을 못받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자기 작업을 스스로 설명해낼 능력이 없는 거다. 최소한의 위치정도도 파악이 안된다. 혹은 전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하지만 이들은 꽤나 이중잣대를 가진 경우가 많다. 스스로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할 수 없지만 판단은 하고 싶다. 아닌 것의 아님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이 있다고 믿어버린달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미술사 맥락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싫든 좋든, 능력이 있든 없든 간에 이탈해 있는 작가가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당연히 현장의 역사는 미술사가 될 것이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결국 그렇게 된다. 시간은 그냥 세계를 그렇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 바로 그 현장이 역사와 연결되어 있느냐는 다른 문제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고 있느냐 아니냐 얼마나 의식하고 있고 할 수 있느냐는 다른 것이다. 항상 거기로부터 반성의 계기들이 나오기 때문에. 실천적 계기가 출현하기 때문에. 왜 한국에서 현대미술을 하고 있는지 묻는 덴, 왜 이렇게까지 우리가 잘 모르는지에 대해 묻는 데는 너무 추상적이고 현실과 다소 무관하지만, 근본을 흔드는 차원의 문제가 분명히 있다.
박찬경 선생님이 이제 쉰살 넘은 마당에 다소 식은듯한 느낌의 탈식민주의 카드를 다시 꺼낸 이유가 탈식민주의 이론을 이제서야 읽었다거나 감명을 받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본 결과, 한국 미술(사)의 실천적 차원에서 가져갈 수 있는 부분이 크게 많지 않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걸 여전히 아직도 민중미술 챙기냐--정도로 폄하하고 싶진 않다. 보기에 그렇게 편협한 사람 같진 않다. 여기서 물론 젊은 작가들의 고민이나 여하튼 세세한 각론을 살필 겨를은 없다. 그런 면에서 분명히 본인이 살고 계신 어떤 세계는 있다. 보통 원로 교수들이 원론 수업을 많이 하시는데, 박찬경 선생님도 조금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미술을 (자신의 입장에서) 실천적으로 고민하고 계신 것 같다. 나는 박찬경 선생님이 차라리 스칼라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럼 아카데미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지만 작가이기 때문에 이런 현실적인 고민이 시작됐겠지.
학교에선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다. 할 수 있는 만큼 공부할 대상을 정해서 익히면 될 일이다. 모르면 틀리면 된다. 틀렸다고 해서 죄는 되지 않는다. 지도를 받고 시간을 두고 더 하면 된다. 그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모르는 건 때때로 죄가 된다. 몰라서 한 일이 현실에서 어떤 일을 만들어내고 누군가를 자극시킬 수도 있다. 이건 문제가 된다. 그래서 다들 현장에선 예민하다.
아싸리 미술을 그냥 아카데믹한 체계로, 삶 속에서 분리해서 이해를 할 수 있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혹은 영화를 보듯이 라이트하게 즐길 수 있는 대상, 삶을 환기시킬 수 있는 창구로 이해한다면 조금 더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미술을 하기 싫어질 것 같다. 공부의 대상이 단지 공부의 대상으로 끝난다면 지겹다. 공부한 것을 어디든 써먹고 싶은 거고, 또 그럼으로써 뭔가를 변화시켜보고 싶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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