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 만나서 이야기해 본 바로, 내가 본 노순택을 적자면, 그는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혐오하는 것 같다. 그는 기본적으로 대추리, 용산 참사, 광화문 시위, 세월호 등 곳곳에서 일어나는 국가폭력의 현장을 가서 그것을 사진으로 담는 다큐멘터리 작가다.
못볼 것을 많이 본 사람이다. 그런 광경을 보는 것을 누가 좋아할까? 노순택은 그런 광경을 혐오한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 가서 그것을 찍는다. 그 누구보다도 거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다. 사진의 무용함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을 넘어, 자신이 생산한 포르노적인 이미지를 그는 혐오한다. 그 이미지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그 사건에 대해 똑같이 혐오한다. 그 사건에서 폭력을 가하는 주체도 혐오하지만 피가해자도 혐오한다. 그러니까 피가해자가 존재한다는 그 사실 자체를 혐오하는 것이다. 아마 페이스북에 글을 쓰는 자신도 혐오할 것이다.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노순택의 사진은 그래서 혐오를 혐오하는 사진이랄까? 하지만 그를 움직이는 건 무엇일까?
여튼. 그가 피해자를 지지하고 뭔가 글을 쓰고 뭔가를 행동하는 건 플러스의 기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 정의를 외치는 것관 반대로, 놀랍게도 그는 모든 것에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것 같다. 좋은 말을 하는 그 속에 뿌리 깊은 마이너스의 기운, 회의주의가 있다.
아닌 줄 알면서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상황에 따라 다양한 맥락이 있겠지만. 아닌줄 알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다는 것. 아마 좀 더 고차원적 정신 역량을 가져야만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뿌리 깊은 회의주의가 역전되는 계기를 만드는 힘.
노순택은 형식을 통해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것 같다. 자기는 싫지만 그래도 해야만 한다고 하는 뭐 그런 일종의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채널과 회로를 찾는 것이다. 노순택이 최초로 가장 공을 들여서 설정하는 것은 그 회로다. 그 회로가 설정 되어야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말이 되어야 한다. 계속 말이 되는 말을 만듦으로써 회의주의를 움직이는 것 같다. 마치 알렉산드르 코제브가 말한 역사의 종말 이후 살아남은 최후의 인간이 노순택이 아닌가 한다. 나중에 다시 정리하겠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