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7일 금요일

종합시험 대비. 리오타르

하버마스와의 논쟁.

하버마스 - 조화: 하버마스는 계몽주의 이후 분야별로 전문화됨에따라 일상과 전문가의 세계가 분리된다고 봄: 서로 다른 언어 게임. 그래서 이런 사회적 삶의 균열을 조화롭게 만드는 방법, 즉 커뮤니케이션 행위로서 예술이 주효하다고 주장. 예술 체험으로서 삶의 총체성을 획득한다는. 여기서 커뮤니케이션보다는 그것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리오타르를 하버마스는 신보수주의자로 부름.

리오타르 - 총체성과의 전쟁: 리오타르는 경험의 통일성이란 불가능하다고 봄. 세계는 불연속적이며 어떤 합리적 체계로도 설명할 수 없음. 합리적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하버마스의 개념은 초월론적 환영에 불과. 예술은 "언어게임 사이의 조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음. 오히려 예술은 체계에서 나타나는 실패를 두드러지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 <질문에 답함>에 따르면 예술의 표현 유형은 세 가지가 있는데: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이 세가지는 특정시기라기보다는 양식style에 대한 규정이고, 통시적이지 않고 공시적임. 여기에 따르면: "먼저 포스트모던적이어야만 모던적일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끝나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새겨나고 있는 상태이며, 이 상태는 되풀이된다." 즉, 모더니티의 진보를 저지시키며 그 안에 있는 다양한 행동방식을 출현시킴.


예술 스타일(양식)의 구분.

- 리얼리즘: 누구나 딱 보면 이해하는 그런 예술. 한 문화의 믿음과 인식을 반영. 가장 주류를 이룸.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리오타르에게 리얼리즘은 현실을 단순히 핍진하게 반영하는 게 아니라, 세계를 보이도록 '만든다.'

-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둘 다 "이미지와 서사를 지배하는 규칙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리얼리즘을 붕괴시킴. 칸트의 숭고 개념으로부터 도출된 "현시 불가능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현시한다는 생각." 하지만 모더니즘은 숭고의 불쾌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숭고의 쾌와 관계가 있음. 다시 말해 모더니즘적 노스텔지어와 포스트모더니즘적 쥬빌라시옹(환희).

- 모더니즘: 상징 체계 상실의 감정과 결부. 그래서 체계로 돌아가고 싶은 바람(노스텔지어)이 듦. 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내용은 부재하나 형식은 인식 가능한 일관성을 지님.(e.g.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포스터모더니즘: 체계가 상실(언어게임의 정지)됐다는 큰 기쁨과 결부. 그래서 옛 규칙의 종언 및 새로운 규칙의 발견을 선언하는 것에 대한 쥬빌라시옹. 문체 등 형식 자체가 파괴됨(e.g. 조이스의 <율리시스>)


비인간.

리얼리즘: "소통될 수 있도록 하라. 그것이 규정이다. 아방가르드는 케케묵은 것이다. 인간적인 방식을 인간을 이야기하라. 자신을 인간들에게 보내라. 그들이 당신을 받아들여 즐거울 수 있다면, 그들은 당신을 받아들일 것이다."

인간적인 것: 종류를 막론한 담론 양식 가운데 어떤 것이 공교롭게도 해당 사회 집단을 조직화하는 원리가 되어 널리 용인되는 방식.

자본주의적 비인간화: 자본주의로 인해 인간이 유전자의 총계, 훈육의 결과물, 노동의 산물 등 기술적 생산물로 축소됨.  인간은 놀라워하거나 낯설어 하는 능력을 잃고 자본주의 기계에서 평범한 톱니바퀴가 됨. cf. 마르크스주의 비판: 소녀 마르크스와 노인 마르크스. 노인 마르크스는 모든 걸 자기 논리에 맞춰서 거대서사로 밀어 넣는 꼰대. 소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와의 관계에서 마조히스트로서의 노동자-> 향락으로 비인간화. 발전으로의 거대서사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와 공모 상태.

예술적 비인간화: 포스트모던의 형상. 숭고, 분쟁, 기호 같은 것. 아동 같은 것. 프로그램화되지 않은 상태. 저항적 잠재적 장소.  e.g.  뒤샹 <TRANS/formers>


사건.

"하나의 사건은 하나의 발생이다. ... 말하자면, 그러한 것으로서 사건은 무언가 일어난다는, 그리고 이후에 같은 것이 다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또는 상태다. 사건은 자신을 재현하고 이해할 기존의 어떤 준거 체계라도 붕괴시킨다. 사건의 사건성the eventhood은 일어남에 대한 본질적인 단독성singularity, 곧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는 뜻과 구별되는 "일어난다"를 말한다."(레딩스)

e.g. 바넷 뉴먼의 <지금>: 아무 것도 지식적으로 주어지지 않았지만(의식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 일어난다야 말로 사건의 시간. 단순하게 말하면 '갑툭튀'해서 '앗차' 뭔지 알아볼 겨를도 없는데 벌써 일어난다라는 것. 때문에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뭔가가 있다는 감각, 하지만 놓쳤다는 감각만이 전해지는 것.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하라>를 보고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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