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17일 일요일

아이언 와이트, 키노뮤지엄 (2008)

이례적인 사실은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산다는 것이다. 그 세계 안에서는 가상적으로 어떤 것이라도 박물관에 전시될 수 있으며, 가상적으로 어떤 것이라도 박물관 기능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
- 도널드 프레오시와 클레어 파라고, "박물관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2004)

재생산 기술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은 아우라를 상쇄한다. 주체 창조하기의 픽션은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압수하고 인용하고 발췌하고 축적하고 반복하는 데 길을 내어 줬다. 독창성과 저자성, 현존 개념 같이 박물관의 지배적 담론에 필수적인 것은 약화된다.
- 더글라스 크림프, "박물관의 폐허에 관하여"(1980)

키노뮤지엄Kinomuseum은 이런 두 가지 스테이트먼트의 교차로에서 발생하는 프로젝트다. 그 자신을 재생산하는 것처럼 보이는 무한한 박물관의 능력과 독특한 오브제의 수호자로서의 박물관의 최우선적인 기능에 재생산이 가하는 위협 사이에서 말이다. 궁극적으로, 키노뮤지엄은 시네마의 특정한 종류를 독특한 박물관의 일종으로 생각하자는 제안이다: 이것은 "독창성과 저자성, 현존"이 재생산에 의해 약화되지 않는 장소인 반면, 재생산이 이런 질을 박물관을 위한 새로운 일군의 질문으로 바꾸는, 박물관을 물리적으로 방해하는, 혹은 도착적으로 그렇게 하는 장소이며, 잠재적으로 무한히 재생산 가능한 오브제로서의 필름과 비디오예술작업으로 고려되는 무빙이미지 안에서 이 같은 용어를 표명하게 만드는 장소이다. 그것은 차별화된 시네마, 비영구적이고 비매개적이며 템포적이며 일시적인 원리에 기반한 박물관, 박물관이 퍼뮤테이션하는 전시홀인 오디토리엄의 시공간 안에서 그것을 경험하는, 그리고 그것을 활동적으로 정의하는 행위자 관중의 마음에 현현하는 박물관으로 이끈다. [...]

프레오시와 파라고는 물체의 감각을 만들기 위해 물체를 재프레젠테이션하는 물체의 박물관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런 것--반복하기--이다. 물체를 하나의 장소로부터 제거하고 다른 장소에 재위치화하는 것. 이것은 박물관을 다양하게 문화적으로 독해하는 것을 통해 지속적인 스레드를 형성한다. 이것은 아도르노의 에세이 "발레리 프루스트 박물관"이 프랑스 시 두 개의 포지션을 비교했던 것을 전환시키며, 개인적 경험과 즐거움을 향해 제도적 책임성을 연결시킨다. 문화적 보수주의자 발레리는 루브르의 큐레이토리얼 프레임 안에서의 거의 폭력 행위를 경험한다: "쾌락주의적이거나 이성주의적인 문명화는 둘 다 어떠한 집house의 차이도 건축하지 못해왔다."[1] 다른 한편 아도르노는 프루스트를 인용하며: "저녁시간 동안 목격된 마스터피스는 더 이상 우리에게 들뜨는 행복을 생산하지 않는다. 그런 행복은 오직 박물관 안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2] [...]

일반적으로, 산업 모델에 의해 규정된 차별화되지 않은 시네마, 즉 연극적인 오디토리엄에 의해 상징화되는 동시에 거기에 의존하는 시네마는 미술관(다니엘 셔먼이 제안했듯이 아도르노는 미술관을 "권력의 전략으로서 가장 정교하게 구체화된 탈맥락화의 예로 간주했다)의 오브제 수집으로부터 놀랍게도 다른 방식으로 기능한다.[3] 무제한적으로 재생산 가능한 매체로서 필름에 의존하는, 분배의 원리는 같은 작업을 최대치의 사람에게 최대치로 보여주는 것이다. 시네마 관객은 자신이 조금씩의 돈을 지불하는 작업에 집단적인 오너쉽을 행사하며, 똑같은 작업은 다른 도시와 다른 나라에서 동시에 보여질 수 있다. 이것은 시장에 의해 포괄적이고 연속적인 재맥락화이며 우리는 이런 작업의 형식form--그리고 내용meaning--이 할당액contingent라고 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미술관은 독특한 오브제를 과다한 비용으로 수집하고 보존하며, 전시는 엄격하게 통제된다. 전시를 보고자 하는 모든이는 하나의 장소로 이동해야만 하며 거기서 그것은 디스플레이된다. 고정된 시작 시간과 고정된 오디토리엄의 좌석은 순회해야하는 갤러리 공간과 다르다. [...]

특정한 예를 차치하더라도 시네마와 박물관의 원리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 주변의 세계를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다. 미술관은 (산업적) 시네마를 디스플레이의 전략 안에 포함시키려 해왔다. 동시대 예술가, 대리아 마틴이나 닉 렐프, 올리버 페인 같은 예술가는 박물관 안에서의 작업을 시네마의 방식으로 보여준다: 어두운 방 안에서, 고정된 좌석과 함께, 때로는 고정된 시작 시간으로  보여지는 싱글 채널 작업. 그러나 이런 필름과 비디오는--독특한 오브제의 원리에 따라--박물관 수집품에 들어가기도 한다. 에디션의 미덕에 따라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배포되기보다는 통제된다. (크림프가 "박물관의 폐허에 관하여"에서 제공한 몽타주의 혁명적인 지위에 반하여) 라우센버그의 몽타주에서처럼 그들의 취득물은 박물관의 실제 붕괴를 일깨우지 않는다. 그것이 개념적인 붕괴를 제안할지라도 말이다. [...]

최근 독특한unique(혹은 거의 독특한) 예술 오브제로서의 작업의 지위에 관한 주장은 박물관과 예술가가 몇몇 필름과 비디오의 취득을 법제화하기 위해 포진하는 비준validation이다. 그것은 모델만이 아니다. 퐁피두 센터에서, 예를 들어, 산업 시네마(필름)와 예술가 필름--둘 다 잠재적으로 무한히 재생산 가능한 예전엔 분명히 에디션되지 않은 것--은 필름 컬렉션 안에 포함되며, 그것의 취득 과정은 박물관의 다른 부서와 동일하게 이뤄진다. 오늘날 프로그램되는만큼 큐레이팅되는--모던미술관의 일반적인 형상으로서의 시네마 오디토리엄 자체의 외양은 다른 대안성, 괜찮다면 설립 문제founding problem과 아무 관계가 없다: 1935년 뉴욕 모마에 의해 설립된 필름 도서관.

생각해보면, 필름 라이브러리의 제도를 분석하는 헤이디 왓슨Haidee Wasson의 책 <박물관 영화: 모마와 예술 시네마의 탄생>(2005)는 프로젝트로서의 키노뮤지엄의 시작점 중 하나이며, 부분적으로 왜 내 아카이브 리서치가 메이저 미국 박물관과 선각자, 그중에서도 필름 라이브러리가 제정된 문맥으로부터 시작됐는지에 대한 이유다. 왓슨은 어떻게 이런 독특한 컬렉션이  급진적으로 필름 산업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확장시켰는지 묘사한다. 헐리우드 제작 필름과 예술가 필름을 수집하는 카톨릭 소관을 통해 시네마가 설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박물관학적 실천을 저자성을 데이팅dating하고 어트리뷰팅attributing하는 시스템을 필름 산업에 처음으로 소개하면서, 레퍼토리 시네마의 새로운 경제를 설립하는 보존의 원리를 소개하면서 확장시켰는지 말이다. 필름이 나타난 다음에 가치를 상실한 것처럼 여겨진 예전 판화는 다시 한 번 보여지기 위해 되려 유지된다.

모마 필름 라이브러리와 박물관 시네마의 "전시"는 또한 중요한 사회적 영향을 준다. 관중은 모마의 오디토리움에서 다르게 행위한다고 기대되는 대중 상영 필름을 보았을 때 그들 자신의 말이나 신체로 표현하곤 했다. 필름 라이브러리의 지지자이자 첫 번째 큐레이터인 아이리스 베리는 "박물관 오디토리움에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영구적으로 설치하며, 이러한 슬라이드를 끼워놨던 것이다: '만약 오디토리움에서 방해를 중단하지 않으면, 이 필름은 계속해서 틀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와슨은 필름 라이브러리를 모마가 채택한 비판적 매개와 그 자체의 내포된 확장 전략중 하나로 위치시킨다.  필름 프로그램을 투어링하는 것은 이상적으로 지방 미국인을 "문명화"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즐겁게하고 정보를 준다. 박물관(컬렉션)의 조동사로서의 필름이라는 독특한 지위는 안전하게 배포될 수 있으며(예: 위치바뀔 수 있고 재생산 가능하다는) 그리고 제도적 권위로 불러들여진 교육적 도구로서, 시네마를 박물관의 사회적(그리고 정치적) 아젠다를 위한 중요한 부속건물로 변화시킨다. 프레오지와 파라고가 박물관을 이미 그 자신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묘사했듯이, 박물관을 재현하는 가운데, 필름 라이브러리--시네마--는 박물관이 된다becomes. [...]

1. [원전에서는 각주 7번]  Theodor W. Adorno, "Valery Proust Museum," Prism, trans, Samuel and Shierry Weber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1967) 176-7.
2. [각주8] 같은책 179쪽.
3. [각주 14] Daniel J. Sherman, "Quatremere/Benjamin/Marx: Art Museums, Aura and Commodity Fetishism", in Museum Culture: Histories, Discourses, Spectacle (London: Routede, 1994)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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