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의 전시>는 상실해 가는 장소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환기한다. 공동체의 경험이 전승되며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 장소라면, 텔레커뮤니케이션과 이동수단의 발달은 정주를 바탕으로 하는 전통적인 장소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정체성이란 더 이상 내 안에 있지 않다. ‘나’를 추구하는 현대인은 이제 끊임없이 밖을 헤맨다. 상황주의자의 전설적인 표류는 서핑과 쇼핑이란 다른 이름으로 속화됐다. 하지만 그 같은 공간에서 발견하는 것은 몰개성이라는 역설이다. 이렇게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도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을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는 비장소라고 불렀다. “오늘날 비장소는 모든 가능한 장소의 맥락이 되었다.”
장소성의 상실은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를 동반하고 있다. 사회적 병리로서의 히키코모리부터, 도시 속 젠트리피케이션, 전지구적으로는 유럽 난민 사태까지, 그리고 그 반동으로 나타난 신고립주의까지, 오늘날엔 이런 현상을 몹시 간단히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비하면 미술이 지금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마는, 미술 실천이야말로 사회에 개입해 공동체의 역능을 강화하는 데 주요한 촉매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일군의 예술가가 있다. 이런 예술가는 여전히 장소의 문맥을 탐사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 안에서 인간과 사물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때의 예술 실천이란 예술가의 의도보다 효과에 더욱 주목하며, 세계를 해석하기보다 그것을 변화시킨다. 그런한, 예술은, 여전히, 참을 수 없이 혁명적일 수도 있다.
<장소의 전시>는 기본적으로 문맥의 전시다. 초대된 작업은 안산이나 다른 장소의 지리-정치학을 반영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작업의 문맥이 겹치고 섞이면서 전시는 성기면서도 광범위한 문맥을 가지게 됐다. 여기에 실제 전시된 장소라는 문맥이 겹치면서 예측 불가능한 생동감의 조건이 갖춰졌다. 따라서 전시는 작업의 내재적 의미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성—작업과 작업과의 관계, 작업과 사물, 작업과 장소, 작업과 관람자, 관람자와 관람자 등—안에서 행위자의 어떤 생산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개괄하자면, <장소의 전시>에서 작가 몇은 장소에 묻어 있는 근대적 흔적을 탐침해 들어간다. 먼저 강영민의 <선감학원과 팝아트 투어>는 “박정희의 신도시” 안산에 남겨진 근대의 어두운 유산—박정희 시절 소년 삼청교육대와 같은 역할을 했던 선감학원과 4/16 사태로 상징되는 단원고등학교—을 보고싶은 투어리스트를 모집해 함께 방문한다. 이런 다크한 장소를 ‘투어’하는 것은 어쩌면 매운맛을 더욱 즐기게 된다는 식의 변태적 영역에 달한 악취미로 전도될지도 모르지만, 강영민의 경우는 이런 하드코어 투어리즘을 통해 일반적 투어리즘이 감추던 비밀을 샅샅히 폭로하는 데 내기를 거는 쪽이다. 한편 홍진훤이 촬영의 출발점으로 삼은 곳은 원곡동의 현충탑이다. 이 유토피아적 전망대에 서서, 사진의 소실점은 낡아버린 유토피아적 풍경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촬영된 이미지가 그것만을 포착하는 건 아니다. 모자이크처럼 콜라주된 이종적 장소가 동시에 내부로부터 달겨 들며, 여기에는 또 다른 낯섦과의 조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조형섭은 리트머스 갤러리 1층 큐브 공간을 근대화수퍼의 낡은 간판이 관람자와 함께 무한하게 자기 반영되는, 하지만 완벽하게 캡슐화되지는 않은 공간을 제시한다. 이 독특한 폐쇄회로를 통해 조형섭이 쏟는 관심은 타락한 근대적 상징을 추억과 희망의 메시지로 전치시키는 것이다.
한편 몇몇 작업은 인간 관계의 촉매를 자처하면서 참여자의 자율성을 보장하려고 하는데, 이때 투여되는 기술적 문제 전반이 이들의 진정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고재욱과 Qrator (feat. 이웃상회)가 조선족 사이에서 흥행하고 있는 스포츠인 제기족구를 토너먼트 대회로 공식화하려고 할 때, 경기자를 모으고 현수막을 제작하고 광고 동영상을 만들고 기념주화를 제작하는 등의 과정 전체가 이들의 매체다. 이런 방법은 박찬국이 원곡동 거리를 거닐며 일상적 행인과 음식을 함께 만들어 나눠먹는다거나, 최세진처럼 반월공단 파견노동자의 휴일을 맞아 수족관 나들이를 나갈 때, 김태균과 장근희가 파지 줍는 노인을 위해 고안한 파지키트 워크샵을 진행하며 익명의 토착적 기술을 공공화 할 때, 전수현이 원곡동을 떠돌아다니고 인터뷰하면서 수집한 사진과 텍스트를 기반으로 감성-미니-지리지를 만들 때 거의 동일하게 발견된다. 이런 예술가는 참여자와 몹시 세심한 방식의 정서적 핑퐁 게임을 하는 가운데, 어쩌면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한다기보다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한다. 이때 후자의 무언가는 참여자 스스로가 자율성을 생성할 수 있는 문맥의 제공이다.
또 다른 작가 집단은 정체성의 구축과 재현을 문제화 하고 있다. 시도들(구수현과 황지희)은 안산 다문화지원본부 앞 국기 게양대에 걸린 국기를 전부 흰색 깃발으로 교체하여 안산의 ‘구성된 다양성’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소의와 이주원의 비디오 또한 정체성 재현의 문제에 관한 재미난 형식 실험을 포함한다. 둘의 작업에서 자막은 관습과 다른 방식으로 쓰이는데, 이소의의 비디오가 (타자가 아니라) 외려 관람자의 위치를 찌르듯 환기하는 데 자막을 활용한다면, 이주원의 경우 자막의 번역의 기능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다른 정보를 기입해 넣음으로써 서로 다른 문화권이 얼마만큼 서로를 이해하는 데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정체성의 문제는 최찬숙에게도 중요한데, 할머니의 이주의 흔적을 따라 타지로 떠나며 알게 된 것은, 공란의 정체성에 다름 아니다. 어디서와서 어디로 가는가의 질문은 이완의 작업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끼 식사가 어디서부터 만들어지는가를 추적하며 메이드인 시리즈를 만들게 된 이완은 이번에 인도네시아에서 테이블을 만들어 가져왔다. 재밌게도 <장소의 전시>에서 이 테이블은 인도네시아 식당 세더하나에 설치되어 실제로 사용되는데, 이런 상황은 소외된 노동에 본래의 모습을 찾아주는 일종의 상징적 제의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완의 경우와 같이 사물의 이동은 서해영의 조각에서도 고찰된다. 하지만 이완이 역사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사물을 파악한다면, 서해영은 조각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행위성에 더욱 관심이 있다. 서해영은 어떻게도 쓰일 수 있지만 어디에도 쓸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정한 조각을 만들어 원곡동의 일상적 장소에 하루씩 떠돌게 한다. 이때 사물은 마치 날마다 제 기능을 변화시키는 변덕을 부리게 된다. 한편 최두수는 유럽의 유사 의료시술소부터 퇴폐 이발소까지, 다양하게 의미가 변천해온 이발소 회전간판을 전유해 미적 오브제로 만든 레디메이드를 원곡동의 시저스 헤어샵 안에 걸어 둔다. 이때 회전간판은 똑바로 선 뒤샹의 <샘>처럼 원래 기성품의 의미를 다시 회복한다. (이것은 이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물에 대한 이해는, 장소를 단순히 인간이 사는 터로서만 파악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의 장소는 인간과 비인간의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장소의 전시>에서 평면은 얌전히 감상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이제가 이미지에서 이야기를 보다 더 제거하면서 참여자가 들어갈 추상적인 공간을 제공한다면 이야기를 부각시키는 배윤환의 이미지는 칼로 파낸 목판 표면과 함께 참여자와 실제 공간과 좀 더 구체적이고 촉각적인 관계를 맺길 원한다. 이때 두 이미지는 각기 차이는 있지만서도, 현실과 동떨어진 무엇을 보여주는 창이 아니라 현실과 적극적으로 관계 맺기 위한 관문이란 점에서는 모두 동일하다. 하지만 이미지가 꼭 평면의 전유물인 것은 아니다. 여인모는 산업사회의 이미지를 투사한 이미지-조각을 만든다. 작업은 어떤 이미지를 시뮬레이션한다는 점에서 보다 이미지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덜 조각적인 것은 아니다. 시뮬레이션의 성지인 놀러와 오락실에 설치될 예정이다.
초대 작품은 리트머스 갤러리와 원곡동과 고잔동 소재의 일상 상업 공간에서 전시되며 관람자는 리트머스 갤러리에서 배포되는 지도를 들고 장소를 찾아가며 관람한다. 이렇게 <장소의 전시>는 개별 작품들과 전시 장소가 관람자와 함께 짜여들어가길 의도하고 있다. 여기서 장소가 여전히 생태계의 중요한 행위자 중 하나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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