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올리려다가 차마 못 올리고 여기에다 기록한다. 어짜피 무쓸모란 생각 때문에... 여튼.
정봉주라는 인간 때문에 며칠간 오락가락했다. 그것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하고 시간을 허비했다. 아마 폭로자의 말은 진실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난다. 진실을 한갓 게임으로 몰고 간 언론에게 말이다.
요즘 뉴스를 보면 이런 자조 섞인 생각이 든다. 예술이 해야 할 일을 뉴스가 대신 하고 있구나. (한편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 얼마나 마비되어 있으면 뉴스가 이러고 있을까?) 개인적으론 예술적 지식이 뉴스의 그것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만, 공정하게 말하자면 적어도 예술과 뉴스는 동등한 가치의, 서로 다른 체계를 가진 지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뉴스 자체가 예술이 될 필요는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일방향적인 지식 체계가 사회를 압도하는 건 끔찍하다.
미투혁명이 문화혁명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 또한 폭로자가 직접 쓴 글과 직접 나온 인터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확신하게 됐다. 내가 문학은 잘 모르지만서도, 그리고 그걸 꼭 "문학"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서도, 그들의 글과 말은 고은 같은 사람의 시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문학처럼 느껴졌다. 이런 문학적 성질이 전달하는 것은 단순한 팩트가 아니다. 팩트와 별개로 어떤 진실이 그 자체로 나타난다. 그건 김지은씨의 말 "내 몸이 기억한다" 같은 종류의 존재론적 증명 같은 것이다.
하지만 뉴스가 사이비 문학화하고 있다는 건 다른 문제다. 그들은 당사자가 아닌, 말하자면 자처한 대리인이다. 미술 용어로 번역하자면 재현의 자리, 실재의 이미지, 불충분한 그림자다. 포스트모더니스트는 그것의 성격을 역이용해서 "-1" 하길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이 불러온 결과는 오늘날의 탈진실적 혼란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패러다임적 관심사는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사회적 기구가, 혹은 언론이 제대로 그 진실을 대변했다면, 왜 미투가 피해자 스스로의 입에서부터 나왔겠나? 왜 "내 몸"을 들먹이면서까지 피해자 스스로가 나서야 했을까? 당사자라는 말은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당사자를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가 기초할만한 진실 따위가 있기나 할까? 같은 윤리적 합의가 있는 것이다. 언론은 때때로 그것을 망각하고 마치 그들 자신이 당사자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다 아닌 것 같으면 당사자와 자신을 분리시킨다. 프레시안의 보도가 딱 그랬다. 나의 당사자성에 대해 말하자면 며칠동안 이 보도 때문에 빡쳤다가 아닌가 하고 당황했다가 다시 더 빡치고... 그 과정을 반복했다. 그리곤 모든 것이 허망해졌다. 나는 어디다 대고 분노했던 것일까? 아마 언론이 투사한 이미지일 것이다. 이런 몇 겹의 이미지가 중첩되면 그것을 뚫고 존재 자체로 들어가기가 참으로 묘연해진다. 과연 당사자성은 그런 것인가? 혹은 반대로 언론이 당사자성을 지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조금 보수적인 차원에서 네거티브 피드백이란 관점을 미투에 적용하자면, 우리, 중간자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묵살되지 않고 사법 절차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는 데 만전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서 피해자에게 동일시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2차 가해는 중간자들이 행하는 것이고, 그 대상은 피해자 가해자 둘 다에게 향한다. 조금만 덜하고 더해도 더 없어도 될 피해 사실이 생성된다. 만약 그 균형을 기가막히게 잘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동조하라.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완벽하게 지울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 없다. 차라리 경찰과 여가부와 정부와 국회에게 더욱 치열한 압박을 가하고 그걸 통해 원래 당연히 그래야됐을 절차적인 문제를 이제라도 제대로 작동시키는 것이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이다. 그리고 자신의 당사자성 및 관심interests과 더욱 가까운 일이기도 하다.
한편 조금 더 급진적인 차원, 그러니까 포지티브 피드백이란 관점에서 물론 뉴스라는 미디어는 선전선동에 효과적이다. 그것을 이용할 필요도 있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응징 대상은 좀 가렸으면 좋겠다. 왜냐면 지금의 미투는 너무나 날카로운 날을 가진 반면 한편 약하기 때문에 남용하다간 순식간에 무뎌질 것이다. 특수한 사례를 본보기 삼아 마치 보편인 것처럼 날리면 사이다는 될지 모르겠지만 진짜 보편은 이를 통해 이득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편적인 것을 한꺼번에 날릴 수도 없다. 현실적인 이유에서. 그렇기 때문에 좀 더 보편성을 담지한 특수성을 날리기 위해서 신중히 노력해야 한다. 그 보편적 특수성이 이건희에 해당할까 정봉주에 해당할까? 만약 이건희도 정봉주도 나쁘다. 그게 성폭력 사건에서 뭐가 중요한가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지나치게 순진하다. 미투는 철저하게 효과의 운동이고 그렇다면 더욱 효과적인 차원을 찾아가는 것도 당연하다. 정봉주를 날리는 것은 내가 보기에 포켓레볼루션에 만족하는 것에 불과하다. 정봉주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에겐 이렇게 대답하겠다. 그 과도한 처벌 때문에, 그것의 진보적인 효과보다 더 강력한 반동적 효과가 미투를 그렇게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고. 정봉주로서 미투는 끝장나게 될 거라고.
나는 미투의 본질 따위를 운운하고 싶지는 않다는 점에서 사실 후자에 가깝다. 미투는 분명히 오염될 위기에 있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것이 꼭 부정적인 의미에서만은 아니다. 설사 부정적인 계기라고 하더라도 새로운 긍정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고종석 선생이 말한 "영구혁명"을 지속해 나가야 사회가 조금이라도 바뀔 것이다. 그렇다는 건 프레시안의 사례에서 미투는 뭔가 배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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