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8일 목요일

서동진과 권명아

간밤에 서동진 선생이 글을 올렸다. "미투 운동은 견제되어야 한다." 상당히 마르크시즘적 원론이었고 어느정도 통쾌함이 있었다. 내 생각의 60퍼센트 이상은 아마 서동진의 글을 지지할 것이다.

하지만 그 글을 퍼나르는, 내가 평소에 혐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미술계 남근을 보고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구토가 나올 지경이다. 글의 의도와는 다른 효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 글쓴이의 잘못일까? 아니면 퍼나르는 인간들의 잘못일까? 둘 다의 잘못일까? 어쨌거나 이런 상황과 문맥은 뭐가 뒤틀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권명아 선생의 페북 포스팅을 봤다. 서동진을 지목하진 않았지만 문맥상 대상이 서동진임은 분명해 보였다.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길, 말을 아끼시기를." 이 말은 서동진의 언급이 반동적으로 이용당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서동진에게 미투 운동이 인권을 무너뜨리는 반동일 수 있듯이 권명아에게 서동진의 마르크시즘은 현재의 운동성을 반감시키는 반동일 수 있다. 바꿔말하면 이런 것이다. 권명아에게 미투는 인간이기 위해서 발언하는 것이라면 서동진에게 미투는 인간임을 무시/포기하는 것이다. 인간임을 지키려는 남성과 인간임을 주장하는 비인간 여성.

이것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다. 하지만 그 복잡성에 비해서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이 둘은 모두 당사자 자신이 아닌 이데올로기의 후원자이며 무언가를 생산하는 위치에서 사실은 멀다. 그들은 언제나 변화보다 느리게 반응할 것이며 그때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이에 그 사태는 이미 사라져 없을 것이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나는 미투 운동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생성하는 미투로서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그것은 권명아나 서동진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나는 그걸 어찌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이것을 이끌어 가는 사람을 존경한다. 단, 파시즘으로 향할 가능성이 있는 미투를 좀 더 생산적으로 생성하기 위해서 서동진의 우려는 (부정이 아닌) 긍정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혁명은 그럴 때 마르크시즘으로부터 시작해 페미니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으로부터 시작해 마르크시즘으로 가는 길을 택할지도 모르겠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