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critic-al.org/2018/09/11/redemption/
아서 단토를 읽은 것 같긴 한데 똥구멍으로 읽었나.
여튼 이양헌의 생각하는 습관과 그것이 표출되는 매너, 그리고 그것이 젊은 예술가에게 호응을 얻는다는 점은 꽤나 흥미롭다.
먼저 이양헌은 담론의 통시적인 조망을 즐긴다. 정확하겐 긴 시간의 흐름 속 지금까지 예술의 탄생과 소멸을 압축적으로 요약하고 마지막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데 열중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볼 수 있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문체 속에서, 근거는 없지만 꽤나 단정적으로 그렇게 한다.
이양헌이 보는 역사적 틀이 어떤지는 따져봐야하고, 그냥 보기에도 엉성해 보이지만, 어쨌거나, 그런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고 보자면, 작가에 대한 글쓰기에서 이런 문체는 이 작가에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런 시도, 역사의 인식틀을 제시하는 것은 필요하고 때로는 혁명적인 일이기도 하다. 때문에 나는 이양헌이 이 젊은 작가를 그런 혁명의 대표주자로서 기꺼이 인정하고 또 거기에 가담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가 궁금하다. 내가 보기엔, 작가를 경유해 혁명적인 역사 다시 쓰기를 시도한다기 보다는, 혁명적인(?) 역사를 경유해 작가에게 신화를 덧붙이는 결과다.
한편 이런 글을 선호하는 작가의 멘털리티도 몹시 궁금하다. 자신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도 없지만, 사변적으로 전개되는 문체의 느낌, 그것의 결과로서의 역사적 정당성으로 오케이인 것 같다. 그러니까 각론의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증명은 별로 필요가 없으며 이해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이런 글의 선호는 힙스터의 소비행태를 안 떠올릴 수가 없다. 힙스터에게 중요한 것은 상품의 생산 과정이 아니라 생산의 끝에서 도출되는 상품-이미지이며, 그 이미지가 자신과 어울리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다. 물론 이때 상품-이미지는 뭔가 진정성의 외양을 띄고 있어야 하며, 그것이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자신을 포함(혹은 타자화된 자신을 포함), 다른 준거집단이 판단해줄 때 역으로 신빙성을 얻는다. 이런 결과론적인 정당성, 타자에 의해 만족되어진 자기-이미지는 이양헌의 글에서 미리 서술된 역사적 정당성과 공명한다.
미술사를 페티시로 만드는 담론 생산자와 그 페티시를 소비함으로써 미술사를 만들어 가는 소비자. 그리고 미술사와 상관 없이 '청년'을 지원하면 그걸로 만족하는 공공기금 사이의 공모. 이를 통해, 과도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청년 미술사-소비-시장이 열릴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이 아직까진 미술사의 깊이(?)를 뚫고 들어가지는 못하겠지만, 어쨌거나 '표면'에서 이들 관계는 성립해 있으며, 그럭저럭 가시성을 획득해 나는 과정에서 이는 요긴하다.
만약 여기에 본격적으로 미술사-제도가 가담한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미술사-제도라고 말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미 부분적으로 역사화된 유수 대안공간이며, 뮤지엄일 것이고, 공인된 미술상이고, 마지막은 아카데미다. 만약 이런 본격적인 제도가 가담한다면, 표면은 깊이까지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소지는 다분한데, 제도는, 마치 자본주의가 그렇듯, 항상 새롭게 보이는 것을 요구하며, 새로움을 주창하는 거의 모든 것들은 제도를 열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미술사-제도가 모두 엉성한 식민주의로 점철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이 광범위한 공모는 모든 진보에게 해로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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