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3일 월요일

노키즈존에 관해

앞으로 내가 아이를 가지게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노키즈존이 더 이상 남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점점 느끼고 있다.

정지우가 페이스북에 쓴 노키즈존에 대한 글이 화제다. 정지우는 노키즈존이 차별인 이유는 업주가 조폭이나 시끄러운 중년남녀는 제지하지 못하지만, 아이정도는 제지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권한을 행사한 것에서 온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선택적인 권력 행사는 그 자체로 차별이 이미 이데올로기적 구조로 주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여기서 정지우는 정신 장애아나 치매 환자의 보호자는 그들이 공공장소로 나갔을 때 죄인으로 인식하지만 아이의 엄마는 그 정도로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공공장소로 나가긴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둘은 동급이다. 정지우가 보기에. 그리고 이들을 죄인으로 취급하는 사회는 정상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나는 이 글이 뭔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노키즈존으로 가게를 운영하는 업주 개인에 대한 비판인지, 아니면 노키즈존이라는 담론에 대한 비판인지. 이 둘은 물론 포개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업주 개인에 대한 특수한 상황으로부터 글을 시작해서 사회 비판으로 끝 맺는 것이 아예 말이 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종류의 글은 개인에서 사회로 옮아가는 과정을 아무 설명없이 뭉갠다. 개인에 대한 비판이 곧 바로 사회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그것을 스리슬쩍 가능하도록 만드는 논리가 전체주의다. 전체주의는 특수를 위해 보편을 이용한다. 그러기 위해서 특수는 마치 보편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 경우 특수는 마치 보편인 것처럼 다루어진다. 비판을 위해.

이런 논리적 비약이 이 사회 어디서나 발견된다. 특히 페미니즘 담론에서 특정한 개인의 잘못이 남성 전체의 잘못으로 비약하거나, 담론 비판이 특정한 개인에게 내다 꽂힌다. 후자의 경우 특히 위험한데, 조민기나 성재기 등이 자살하더라도 이데올로기적 마취 상태에 빠져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한 사람을 자살로 내모는 데 일조한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데올로기를 등에 업는다고 면죄부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언젠가 죗값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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