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러닝룸(Running Room)》은 완벽한 계획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달아나 보고자 하는 반계획이다. 이 큐레이토리얼의 방법론은 안대웅이 2016-7년 사이 리트머스에서 〈실험실〉이라는 프로젝트를 예닐곱 명의 예술가와 함께 진행하면서 처음 채용했다. 완성의 관념을 최대한 유예하는 한편, 그 전 단계에서 착상된 임의적인 아이디어를 보존하고 공유하고 토론하고 확대하고자 했다. 〈실험실〉에서 큐레이터와 예술가는 '목적 없는' 피드백을 다양한 방식으로 수차례 주고받았고, 그 과정-내-결과를 예술가는 원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임의적으로 프레젠테이션 했다. 《러닝룸》도 이 과정을 따랐다. 큐레이터와 예술가는 대림동이라는 특정한 장소로부터 튀어나온 다양한 아이디어에 관해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이 피드백은 차라리 자유연상이라고 불러야할 정도로 임의적이고 충동적으로 진행되었다. 대림동은 분명히 《러닝룸》의 기점 역할을 했지만 이 대화가 진행되면 될 수록 더욱 희미해져가기만 했다. 그 가운데 예술가로부터 나온 산발적인 키워드가 간병인, 거리입양, 구제역, 국경, 기시감, 다운사이징, 만주국, 오로첸, 전이, 카메라, 풍경, 흑룡강이다. 이 일련의 단어는 《러닝룸》의 부제로 사용되었다.
2. 안산 원곡동에 위치한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는 2007년 개관한 이래로 다문화적 정체성을 반영한 새로운 삶과 예술을 실천하고자 했던 대안공간으로, 류혜민은 2013-5년 사이 이곳에서 일하며 페스티벌, 전시, 언어 학습 동아리 등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가운데 한편의 고민은 이를테면 이런 질문들이었다. 이주민과 문화적 관계 맺기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타자로 인식되는 상대방과 협업의 미술은 가능한지, 이주민을 주제로만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현실과 유리된 미술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예술적 실천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등. 이렇게 말하면서도 동시에 얄궂게도 이주민이라는 상대는 여전히 불분명하고 다문화주의와 예술의 관계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 모호하기까지 하다. 이런 고민 속에서 정작 아시아 이주민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인 학습이 부족했다고 느꼈고 아시아 문화연구로 석사 과정을 밟았다. 서울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하면서 원곡동보다 가까이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이주민의 지역색이 강한 대림동으로 관심이 옮겨간 것은 돌이켜보니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이렇게 《러닝룸》의 주제는 원곡동으로부터 시작해 대림동을 경유한다.
3. 《러닝룸》의 큐레이토리얼은 오늘날 관례화된 미술 생산의 프로토콜에 대한 대안으로 구상되었다. 미술 지원 제도는 계획서 작성, 프레젠테이션, 교부신청, 작업, 결과보고, 정산이라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미술을 놓는다. 이 행정적 합리성은 작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기를 기대한다. 아마 오늘날 프로덕션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프레젠테이션 파일 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워드와 포토샵으로 콜라주된 완벽한 미래의 약속, 지원의 가부를 판단하는 가장 객관적인 자료가 이것이며, 이후의 과정은 그것이 제대로 실현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다. 말하자면, 미술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원 제도는 프레젠테이션을 시작과 끝으로 설정함으로써 미술의 가능성을 시작부터 제한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미술은 이런 작업 생산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는가? 이것이 《러닝룸》의 큐레이토리얼이 제기한 질문이다.
4.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대림동은 양꼬치로 일축된다. 공사장에서 일해 열심히 돈을 모아 양꼬치 식당을 여는 것이 중국 조선족 '중산층의 꿈'이었다면, 양꼬치 식당이 발원한 곳이 대림동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진짜'를 향유하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지금의 대림동 양꼬치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대림동은 양꼬치이며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하다는 등식을 본다. 다른 한편에서 대림동은 탈법과 범죄가 난무하는 장소로 종종 재현된다. 최근 대림동 여경 사건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인데, "여경무용론"이 들썩이는 가운데 대림동이란 지명과 술 취한 40대 조선족은 아주 짧게 등장하고 사라진다. 여기서 대림동은 "범죄도시"이며 치안의 대상이라는 등식을 본다.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양꼬치와 우리에게 불안을 주는 40대 조선족의 쾌락적 범죄는 통약불가능하며, 제어되어야 한다. 그래서 대림동을 둘러싼 감각은 불평등하게 배치된다. 이를 통해서만 대림동은 유의미한 것이 된다. 치안이 작동하고 양꼬치의 쾌락을 줄 수만 있다면... 하지만 실제로 가본 대림동에서 양꼬치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건두부나 중국고추, 호박을 닮은 연변 참외를 파는 상점 등 이들의 삶의 터전은 비단 양꼬치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런 또 다른 종류의 쾌락은 《러닝룸》의 참여자에게 중요한 주제다.
5. 영화 감독 오민욱이 탐색한 것은 이번 영화제에서 선보인 《해협》(2019)에서 어떤 이유에서건 영화의 일부로 선택되지 않아 방치된 나머지 필름이다. 오민욱과 주고 받은 편지에 따르면, "한 시간 남짓 주변을 걸었습니다. 걸으며 보았던 풍경들을 보면서 두 개의 장소가 떠올랐습니다. 중국의 하얼빈과 샤먼입니다. 기시감에 무언가를 떠올렸다기보다는, 피할 길 없이 머릿속에 때린다는 느낌이었습니다. 2017년부터 지속해온 영화 작업 때문에 가보았던 하얼빈과 샤먼의 풍경이 머릿속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대림동을 걸으며 하얼빈과 샤먼의 풍경을 떠올리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불가항력적으로 풍경이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있었습니다. [...] 다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왔습니다. 부산역에 내려 건너편 차이나타운의 풍경을 제 눈이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있었습니다. 전주에 한 번 더 방문한 뒤 영화 작업이 마무리가 되었고, 중국어로 추정되는 말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부산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습니다. 영화가 되지 못한 하얼빈과 샤먼의 풍경들을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9월의 마지막 일요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6. 팝아트 작가로 알려진 강영민은 전지 사이즈 괘도 위에서 자동기술을 펼쳤다. 다음은 강영민과의 대화: "[강영민] [오전 10:08] 동양평화사상=아시아주의 [강영민] [오전 10:09] 나도 일본이 군국주의 제국주의로 가기전 아시아주의의 원형과 그 사상을 공유했던 그룹을 추적하고 있슴 [강영민] [오전 10:09] 그 잔재들이 용소야 등으로 끊임없이 내려오고 있죠 [강영민] [오전 10:10] 그 시점이 빅뱅임 [d] [오전 10:10] 일본 판타지 만화에서도 자주 나와요 [d] [오전 10:10] 나는 참지만 네가 내 친구의 평화를 깨뜨리고자 한다면 숨겨진 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어 [d] [오전 10:11] 동료들의 힘을 받아 [강영민] [오전 10:11] 바로 그거에요 [d] [오전 10:11] 미나 세카이 마모루 [강영민] [오전 10:11] 그 원형이 아시아주의임 [강영민] [오전 10:11] 갑신정변을 아시아의 지식인들이 돕죠 [강영민] [오전 10:12] 민비를 시해하는데 아시아낭인들이 연합하고 [강영민] [오전 10:13] 아무르 강을 바라보던 대륙낭인들 [강영민] [오전 10:13] 그들의 원수가 이토오임 [강영민] [오전 10:13] 서구를 좇아 동양평화를 깨트렸죠 [d] [오전 10:13] 아무르 강이 [d] [오전 10:13] 동아시아 종의 근원 [강영민] [오전 10:14] 아무르강=흑룡강 [d] [오전 10:14] 우리나라 생물들의 근원을 찾아 가 보면 [강영민] [오전 10:14] 만주국의 아리안인이 그곳 출신임 [d] [오전 10:14] 아무르강에서 다 모인대요 [강영민] [오전 10:14] 그게 만주국사상이에요 [d] [오전 10:14] 홍천에서 본 생태학자가 [d] [오전 10:14] 그랬음 [강영민] [오전 10:14] 아시아의 원형이 거기 있다."
8. 조기현은 영화감독이자 건설노동자, 돌봄노동자라는 이종적 정체성을 가진 자로서 삶과 미학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며 다음 질문을 한다. 오늘날 약화된 진정성의 감각을 다큐멘터리에서 복귀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데 저는 [...] ‘진정성의 형식’과 ‘제도 안에서 인준 받을 수 있는 형식’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창작자로서 영리한 전략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걸 삶과 예술 제도의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공드리의 <마음의 가시>는 그런 예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고모의 생애사 작업을 공드리의 가족과 영화 스탭들이 함께 도우면서 진행됩니다. 고모의 옛 지인들을 만나며 지난날을 환기하고 기록하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일상적인 요소들로 가득합니다. 영화가 70-80% 촬영되었을 때 그것은 편집되고 가족들에게 보여집니다. 그 필름 안에는 커밍아웃한 고모의 아들과 고모의 심경이 각각 담겨있습니다. 그 내용을 모르다가 영화를 통해 알게 된 모자는 몇 십년만에 화해의 제스처에 도달하게 됩니다. 아주 극적이지는 않지만 커밍아웃한 사건을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저는 이게 영화적인 순간을 맞이하며 미학을 얻은 것과 일상-삶-공동체의 진정성이 하나가 된 좋은 예라고 생각했습니다."
9. 러닝룸은 할 포스터가 제안한 비평 용어이지만, 사실은 칼 크라우스의 spielraum의 포스터 식 번역으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유예 공간, 문자 그대로, 달아나는 방이라는 뜻이다. 이런 방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는 자명한데, 지금을 '지원의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그 이면에 블랙리스트가 존재했고, 찰나의 프레젠테이션의 시간에는 선택과 배제의 프로그램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힘이 지금의 한국 미술계를 만들었다면 어떨까? 하나의 담론이 어디로부턴가 솟아나면 정크푸드처럼 게걸스럽게 소비되고 마는데, 웃기게도 제도는 그것이 새롭다고 지원한다. 어디에서나 어디서 본 듯한 말과 사물이 있다. 크게 중요하지도 않고 안 중요해보이지도 않은, 내일이면 이 전시장에는 친숙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그런 것이 전시될 것이다. 미술은 지원 제도의 장식일까? 미술은 어쩌면 이페메라(ephemera)와, 심지어 미술계는 정크스페이스와 크게 다를까?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예술이 이런 것과 달라야 한다면, 포스터가 제시한 이 준자율적인(semi-autonomious) 작은 방은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원금을 연료 삼아 무한 복귀하는 예술 비스무레한 것, 예술 비스무레한 것을 연료삼아 무한히 공회전하는 지원 제도로부터 잠깐 숨을 돌려, 《러닝룸》의 큐레이토리얼은 예술의 준자율적 감각을 다시 떠올리고자 했다.
안대웅, 류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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