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을 개조해 만든 부산 오픈스페이스 배의 조그만 방 여럿에 낡고 오래되어 보이는 핸드메이드 수족관 몇 세트가 설치되어 있다. 그것은 횟집의 영업용 수족관부터 분재나 가구와 결합된 커스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이룬다. 전체적으로 굉장히 오래된 느낌을 자아내는데, 아마도 사용된 재료를 모두 주워 온 탓일 테다. 또 이 수족관에는 여러 치어가 실제 배양되고 있어, 마치 어린 시절 익숙한 수족관의 기억, 그러니까 조그만 생명을 길러보고자 시도하고, 방치하고, 실수하고, 실패했던 그런 기억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생명이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조그맣고 취약한 것이다.
여러 곳에 붙어 있는 메모를 읽으면서 진행하면, 수족관이 자전적 메타포라는 사실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반영되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자아처럼 보이는데, 그 순간 수족관이란 장소적 메타포에는 의미가 여럿 중첩된다. 준비하는 장소로서 스튜디오, 그리고 전시하는 장소로서 갤러리.
그러니까 예술의 장소적 기억이라고 할까? 그렇게 아름답진 않다. 특히 작가의 작업실 침실로 제시된 3층 통로 옆 조그마한 방이 그런데, 배치된 야전침대와 수술용 트레이와 도구는 전쟁 중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군인이 대강의 조치를 취하고 어서 빨리 쉬어야만 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그런데 중요하게도 이 방에는 아무도 없다. 마치 키우던 금붕어가 죽고 나서 한동안 방치된 수족관처럼, 볼 수 있는 것은 온통 긴급성이 지나간 부재의 흔적뿐이다.
한편 문고리 대신 붙어 있는 마네킹 손을 잡고 밀고 들어가야 하는 다른 방에서는 빔프로젝터가 한 벽면에 쏘아져 있고, 벽에는 여러 오브제가 둥둥 떠다니듯이 붙어 있다. 여기서 VIP에게 자신의 작업을 소개하고 있을 작가의 모습을 떠오르며, 그래서 그런지, 볼 사람과 보여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은 채로 홀로 틀어진 영상과 장식된 오브제는 실로 기괴하게 느껴진다. 어떤 종류의 긴급성과 어긋남, 실패의 감각, 초현실주의자가 보면 낭만주의적 폐허라고 불렀을 감성 같은 것이 이 전시 곳곳에 서려 있다. 무언가 몹시 붕괴하였고, 하고 있거나, 할 것인데, 그건 작가 자신일 수도, 미술계일 수도 있다.
옥상 끝 방에 들어서면 좀 더 구체적인 삶이 보인다. 이 방에는 제주도 출신의 여러 미술 관련 간행물이 일렬로 진열이 되고, 탁자와 의자가 누군가 앉아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말하자면 응접실로, 작가 자신을 다른 이에 홍보하고자 하는 공간이라고 해야 할 텐데, 막상 느껴지는 것은 적막과 고독, 손이 한동안 닿지 않았던, 부식되거나 풍화되거나 퇴적된 감각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기어이 사라지고 말았을까?
전시는 소위 말하는 기획된 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작가는 작업과 전시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여한다. 소위 말하는 진정성을 이입하면서 작가와 작업 사이에 끈끈한 연결을 만들어 내며, 어떤 경우에 그것은 기획된 것이 경계 짓는 분할선을 가로질러 보편적 공감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 경우 그런 것처럼 보이며,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자전적 회고를 넘어, 어떠한 종류의 작가적 삶의 일반 모델을 고찰할 수 있게 해준다. 작가가 작업을 하고 전시를 하고 누군가를 만나서 보여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늘날 작가의 커리어를 생각해본다. 분명히 지배적인 흐름이 분명히 있고, 이를 둘러싼 권력도 작동한다. 그것은 불명확하면서도 현실적으로 확실한 어떤 분할 선을 긋는다. 알만한 주요 대학을 졸업해 주요 공간에서 전시하고 주요 큐레이터와 비평가와 얼마나 네트워크를 형성했느냐 등에 따라서 기회와 커리어의 격차가 발생한다. 이런 풍경을 멀찌감치 바라보는 지방 소도시의 작가는 어떤 기분일까? 대체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먹고 살면서? 누구와 어떤 미래의,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대다수 작가에게 아무도 오지 않는 스튜디오와 전시장은 치어가 담긴 방치된 수족관과 비슷하다. 그들 또한 언젠가 스튜디오와 전시장을 비울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떤 종류의 윤리일지도 모른다. 이들을 더욱 잘 알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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