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 들어서면 커다란 폐선이 불안정하게 놓여 시선을 붙잡는다. 조금 눈을 돌려보면 해양 쓰레기처럼 보이는 사물이 전시장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데 그 위에는 각각 적당한 크기의 고깔이 천장으로부터 매달려 있어, 거기서 모래가 떨어지며 사물의 형태를 서서히 덮고 있다—이것은 폐선도 마찬가지다. 곧 모래는 모두 떨어지고 사물은 이 속에 잠기리라. 어느 방치된 바닷가는 전시된 이 광경과 닮았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한때 새롭고 멋져 보였을, 바다를 몇 번이고 가로질렀을 배는 제 기능을 잃어버리고 관조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지배하는 것은 덧없음이라는 감각이다.
어떤 종류의 압박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휴먼스케일을 훨씬 상회하는 배가 억지로 인부 여럿과 기계의 힘을 빌려 전시장에 들어가는 상상은 전시를 보는 것과 동시에 거의 자동으로 이뤄진다. 안 보이게 치워놨다곤 하지만 조금만 돌아다니면 발견할 수 있는 전시장 구석에 수납된 모래 포대 역시 어떤 종류의 처리 곤란함을 잘 보여준다. 애초에 화이트큐브로서 매우 간결하고 비특정적으로 만들어진 장소에 힘겹게 구축된 인공자연은—비록 그것이 자연과 닮는 것에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심지어 성공했다면 더더욱—그 자체로 강밀한 에너지가 투여된 결과다. 서서히 떨어지는 모래가 온몸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사라짐에 관한 시학’은 그런 면에서 보면 그 자체가 압박이다. 화이트큐브라는 무균질 공간에 자연적 특성을 구축하고 다시 그것을 서서히 무로 되돌린다는 식의, 그리고 종국에 전시가 끝나면 반드시 같은 과정을 역순으로 해야만 하는 운명의, 만약 허락한다면, 그 압박의 실체를 낭비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시적인 작업이 낭비를 통해 이뤄진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할 뿐만 아니라,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 자체로 뭔가를 알려준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마르크스가 일찍이 지적했던 상품이 가진 독특한 특징으로, 이것은 자신의 기원을 감춘 채로 처음부터 그것이었던 것처럼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김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른 채 마트에서 잘 포장된 브랜드를 안심하고 구매한다. 나아가, 역시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일이 이렇게 진행되고 나면 인과 관계의 전도가 일어나는데, 노동이 있기 때문에 상품이 있다는 자명한 사실은 여기서 외려 상품이 노동을 결정한다는 명제로 교체된다. 뜬금없이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전시장과 작품이 전제하는 자연성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 미술 전시에서, 그것이 오브제든 설치든 환경이든 뭐든 간에, 작품은 화이트큐브와 함께 브라케팅(bracketing)될 운명에 처해있고, 이 사실은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전제되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화이트큐브 안과 밖은 여기서 통약불가능한 선으로 나뉜다. 거대한 폐선과 쓰레기와 모래가 여기 놓여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에 관해서 궁금해하는 것은 뭔가 작업의 본질과 무관하게 느껴지며, 대신 강요받는 것은 모래가 떨어지는 소리와 사물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시간적 감각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미니멀리즘을 지나 장소특정성(site-specificity)이란 이름으로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리얼리티에 대한 탐사가 여기서 왜 희박해지는지가 궁금했다.
생각해볼 수 있는 한 가지는 리얼리티가 미적 가상이 되어버렸다는 불길한 가설이다: 즉 홍티아트센터 옆 포구에 버려져 있던 폐선은 그 자체로 아무 의미가 없으며, 반드시 미적 브라케팅이 이뤄지고나서야 어떤 종류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 이는 단 한 장의 멋진 사진을 건지기 위해 낭떨어지에 매달린다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이야기가 ‘그럴 수도 있는 일’이 되어버린 지금의 패러다임에서, 인스타그램을 가득 메우는 팬시한 사진이 그 한 장이 나오기까지 수 많은 B컷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는 것을 우리가 모두 알지만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럴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장소에서 비장소로의 이동, 폐선이 홍티 포구에서 갤러리로 이동한 사건은 퇴행적이라기보다 동시대적이라고 봐야한다. (2021. 10. 19.)
홍티아트센터 작가 비평으로 쓰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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