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9일 화요일

실재의 귀환?

늦게 잡아도 2000년대 중반 언제쯤부터 인문학의 지형도에 실재가 돌아오기 시작한다. 이런 흐름은 유럽과 영미권에 산개한 젊은 철학자의 지적 네트워크가 주도했고 전통적인 아카데미라기보다 블로그를 통한 상호 간의 교감으로부터 시작된, 상대적으로 ‘젊고’ ‘혁신적인’ 시각으로 평가된다. 이들이 급진적으로 단절하고자 한 것은 근대 이후, 정확하겐 칸트가 구축한 어떤 종류의 거대한 철학적 체계 그 자체다. 칸트의 유명한 이성에 대한 ‘비판’이 신, 절대자, 물자체(thing itself)에 대한 실재론적 관심을 제한해 인식론으로 전환시켰다면, 일군의 젊은 철학자는 상관주의라는 용어로 그것의 한계를 포착해내기 시작했다. 인간이 있든 없든 간에, 인간이 인식하든 아니든간에, 저 산과 공룡의 화석은 실제로 ‘있으’며, 방사능 핵의 분해의 속도 상수와 열광 법칙의 결과로부터 지구의 나이를 도출해낼 수 있다. 젊은 철학자는 말한다. 일단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인간과 상관없이, 인식의 범위를 훌쩍 넘어버린 태초의 순간에 무언가 ‘있었다’라고 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상관관계에 기초한 필연성이라는 기반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리고선 우연성, 가능성 그 자체가 실재라는 결론, 그러니까 실재하지 않는 것이 곧 실재한다라고 하는 역설적인 결론에 공통으로 도달한다. 젊은 철학자는 주장한다. 그 가능성을 사변하는 것이 곧 철학의 본임이라고.

그리고 이 사변의 한 가지 방식이 예술이며, 어떤 종류의 패러다임적 전환도 감지된지 오래다. 실재론적 전환에서도 전위병 역할을 하고 있는 객체지향존재론(OOO)의 그래엄 하만(Graham Harman)은 《아트리뷰》가 선정한 미술계 파워 피플에서 언젠가, 몇 년동안 10위 안에 랭크 됐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전시장에는 한편에서 한갓 돌멩이 같은 사물이 예술가와 무언가 교감이 끝난 듯, 의미심장하게 배치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샤먼이라는 오래된 예술가 모델이 돌아온다. 또 다른 한편에서 과학과 기술과 상상력을 동원해 물질에 접근하는 다양한 실천이 예술에서 가능한 영역으로 포착되기 시작했다: 이 모델은 연금술사와 비슷하다. 옥창엽의 뮤온 입자를 가시화하는 작업 <흩어지는 것에 대하여>는 다분히 후자 쪽에 속한다. 뮤온 입자는 우주방사선이 지구 대기권과 충돌하면서 발생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일상적 감각에서 그것을 절대 볼 수 없지만, 이 전시장에서는 감지기를 통해 반응하는 전자 장치—깜빡이는 빛과 소리—를 통해 그것의 ‘존재’를 예외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관객이 움직일 때마다, 보이지 않는 뮤온입자가 움직이며 감지되는 순간, 아름다운 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 경험이 미술사에서 미니멀리즘부터 익히 연구된 현상학적 경험과 유사한 것으로,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이의는 하만에 의해 반박된다. 하만은 그의 예술론을 짧게 축약한 에세이 「관계 없는 예술(Art without Relations)」에서 마이클 프리드의 유명한 연극성 개념이 관계주의적으로 잘못 이해됐다고 주장하는데, 연극성은 관찰자가 인식론적 관점에서 무언가를 보고 패러프레이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들뢰즈 식의 존재론, 무언가로 되기(becoming)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다양한 요소는, 하만식으로 인간을 포함하는 다양한 부품은, 무대 위에서 상호 결합해 새로운 존재로 변모한다—마치 가면을 쓴 연기자가 무대에서 완전히 다른 인격으로 변신하듯이. 이렇게 보면 물질과 인간 사이에 펼쳐진 연극적 경험은 그 자체가 (인식론적 패러프레이징이 아니라) 존재론적 사건이 된다. 하만은 이런 사건 속에서 발생하는 여러 부품의 하이브리드가 진정한 예술작품의 존재라고 주장한다. 이 의미에서 옥창엽의 전시장은 관람성의 장소라기보다, 그 자체가 존재 탄생의 무대다. 여기까지가 이론의 이야기다.

고대 애니미즘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는 항상 현실에 없는 것에 매혹되고 그것을 사변해왔다. 페인트든 입자가속기든 뮤온 감지기든지 간에, 예술가에게 매체는 그런 것과 접속하는 가능성의 매개체였다. 그것은 결코 신실재론적 전환이 불러일으킨 특별한 일이 아니며, 다만 이론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다르게 예술을 이해했다는 사실만이 사실일 것이다. 따라서 <흩어지는 것에 대하여>는 실재론적 전회 속에서 ‘이론적’으로 새롭게 읽혀질 여지가 충분히 있음에도, 만약 ‘실재한다’ 그 자체에 그쳐버린다면, 그것은 특별하다기보다 그냥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해보자. 무엇이 특별한가? (2021.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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