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에 임하는 작가가 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내 작업이 돋보여야 한다
2) 내 작업이 돋보이지 않는 상황은 제거되어야 한다
1)에 큐레이터의 도움, 제작 지원, 전시의 흥행 등이 있다.
2)에 큐레이터의 쓸데없는 간섭, 불충분한 제작비 지원, 전시의 불협화음 등이 있다.
일에 협조적인? 작가는 1)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즐긴다. 하지만 좀 더 오쎈틱한 작가라고 해야하나 그런 사람들은 2)에 더 민감하다. 1)과 2)는 동전의 양면이다. 도식적으로 구별하자면, 1)에서는 작가가 을, 2)에서는 작가가 갑이라고 상정된다.
1)의 경우는 별로 문제가 될 게 없다. 작가가 스스로를 을로 받아들이고 변화된 창작의 모드 안에서 활로를 찾기 때문이다. 이 경우 큐레이터나 다른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협력할 수록 이익이다. 하지만 2)의 경우, 스스로를 여전히 갑이라고 여기는 경우, 큐레이터와 부딪친다. 내 창작의 권한이 오로지 나에게 귀속된다고 믿을 것이며, 그것을 침해받는 여러 상황이 잘못된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작가-을이 어떤 종류의 협력과 지원이라고 느끼는 것들을 작가-갑은 당연하다고 여길 것이다. 이런 작가는 큐레이터가 그리는 전체상에 훼방을 놓게 될 것이며 서로간 갈등이 시작될 것이다. 큐레이터는 생각한다. 이 작가는 어쩌면 이 전시에 없어도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가 큐레이터의 권한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큰 오산이다. 다른 작가-을과의 협력 체계가 몇몇 작가-갑으로 인해 무너진다면, 큐레이터로서 입장이 무척 난처해질 것이다. 큐레이터는 선택해야 한다. 작가-을과 작가-갑 사이에서.
동시대미술 행사를 좋으나 싫으나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작업과 전시와 작가나 큐레이터나 비평가 등등 각자가 상정하는 전통적인 직능이 더 이상 효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든 제작이 능력의 연결망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미술계의 작가는 여전히 불굴의 예술혼을 가진 작가이며, 자신이 미술의 현장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시대는 많이 바뀌었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사실 원래 없었다. 나는 불굴의 예술혼보다 차라리 업자 같은 마인드를 가진 속물 작가가 좋다. 예술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사람 사는 게 그렇게 별 게 없다. 미안하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권력 관계는 형성되기 마련이고 예술가는 조금 특이한 기술자 나부랭이였고 먹고 살아야 하는 생활인이었다. 여기서 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내가 큐레이터로서 작가-갑과 주도권 경쟁을 해야 한다면 그건 일이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일이 잘 되어야 하는 이유는 나 자신의 신념 따위가 아니다. 다른 작가-을에 대한 책임과 연대의식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주도권을 가져간다는 사실 또한 사실이고, 여기에 피치 못하게 억압적인 상황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일이 되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을 못본척 못느끼는척 할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상황을 만들기도 싫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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