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21일 수요일

무해의 시대: 21세기 안전 패러다임의 계보와 전망 / 김홍중

작년 언젠가, 지인과 담소를 나누던 중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요사이 젊은이들은 ‘무해’에 상당한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며 되도록 타인에게 ‘무해한’ 사람이 되고자 애쓴다는 것이다. 최은영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떠올랐다. 주로 여성이거나 노인, 혹은 외국인인 이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타인의 삶에 깊이 개입하지 않으려는 ‘무해한’ 사람들이다. 가령, 「고백」이라는 단편에서 최은영은, 내성적이고 선량한 친구인 진희에게 애틋한 우정을 느끼는 미주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한다. “진희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볼펜을 이리저리 돌릴 때 미주는 자신이 진희를 안다고 생각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때가 미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196쪽

무해의 시대
무해한 사람! 직관적으로 그 존재를 어렴풋이 느껴 오기는 했지만, 명확히 표현할 수 없던 어떤 심리풍경을, 이 평범한 단어는 조명탄처럼 비추어 준다. 사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끈끈하게 엉겨붙는 사람들을 견디지 못한다. 점착성을 띠는 눈빛, 달라붙는 태도, 사적 영역 안으로 기어 들어오는 것들의 ‘가해(加害)’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무례를 친절로 착각하며 경계선을 침범하는 자들에게 불쾌를 넘어 혐오를 느끼기도 한다. 권력이 동반된 유해는 도덕적 문제인 동시에 법적 문제이기도 하다. 미투 운동 속에서, 구조화된 유해성을 행사하는 강자들에 대한 고발과 ‘탄핵’이 가차없이 수행되어 온 것은 그 때문이다. 사회적 삶은 ‘이웃에게 무해하라’라는 새로운 인륜적 명령으로 재구성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피해에 대한 공감, 가해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해에 대한 의지가 일상적 삶을 지배하고 있다.

무해의 의미론은 사회적인 것의 영역을 넘어 자연이나 환경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우리 시대의 자연은 사회와 분리된 채 자족적으로 존재하는 무구한 장소가 아니다. 자연과 인간은 이제 서로에게 유해한 존재로 뒤엉킨 채, 각자의 내부에 스며들어 있다. 인간이 폐기한 유해 물질은 복잡한 순환 과정을 거쳐, 모공과 호흡기를 통해 혈관에 흐르다 장기에 축적된다. 스테이시 앨러이모(Stacy Alaimo)가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이라 부르는 이 얽힘은 우리가 아이를 키우면서 고민하고 두려워하는 질병들, 혹은 늙어 가면서 언젠가 한 번은 대면하게 되는 문제들(암, 아토피, 면역계 질환, 화학물질복합과민증, 새집증후군 등)을 통해 체감하는, 공통의 리얼리티이다.

* ‘생태 친화적인 삶(eco-friendly)’이나 쓰레기를 최소화하는 ‘제로-웨이스트(zero-waste)’한 생활이 ‘무해하다’는 형용사로 대체되기도 한다. 2020년에 출판된 두 권의 책의 제목이 그런 의미를 띠고 있다. 허유정 지음, 『세상에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어』, 뜻밖, 2000. 그리고 신지혜 지음, 『무해한 하루를 시작하는 너에게』, 보틀프레스, 2000.

** 스테이시 앨러이모 지음, 윤준·김종갑 옮김, 『말, 살, 흙Bodily Natures』, 그린비, 2018.
출처: 게티이미지


21세기 정치가 근본적으로 생명정치(biopolitics)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명정치는 인간과 환경이 서로 만나는 다중 인터페이스에 대한 통치 능력에 집중된다. 생명을 보호한다는 것은 신체에 가해지는 환경의 유해성을 통치하는 것이며, 이는 (환경이 인간에 가하는 유해성의 원인인) 인간이 환경에 가하는 유해성을 통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는 주권자들의 신체 주위에 법적·의료적·사회적 면역계, 즉 전방위적 안전망을 구축·운영해야 한다. 생명 보장에 실패한 권력은, 우리가 대통령 탄핵 촛불에서 목도한 것처럼, 주권의 운동에 의해 축출된다.

이런 상황을 극적으로 가시화하고 증폭한 것이 코로나19이다. 팬데믹 속에서 타인은 이웃이나 시민이기 이전에 잠재적 감염원이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요구하는 것은 서로 만나 소통하고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적 사회관을 근저에서 뒤흔든다. 전통적으로 사회는 구성원들의 면대면 상호작용(대화, 투쟁, 교섭, 유희, 축제, 시위, 예배) 속에서 창발하는 상징적 질서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2020년 새로운 사회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행위자들이 지나치게 사회적이지 않을 때, 서로에게 무해해지는 지점까지 물러나야 할 때 비로소 성립 가능한 무언가가 되었다. 비말(飛沫)을 교환하지 않을 때, 악수하지 않을 때, ‘무해하라’는 명령을 모두가 수행할 때, 거리와 경기장과 학교와 교회와 술집이 텅 비었을 때 사회가 작동할 수 있다. 방역 국가는 신체와 신체 사이에 무해 공간을 확장하는 생명권력으로 기능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구축해 간다.


욕망의 소용돌이
무해를 중심으로 펼쳐져 가는 이 담론/실천의 복잡한 얽힘은 특히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대한 정치적 파괴력을 갖는 욕망의 소용돌이로 작용해 왔다.* 무해를 향한 욕망은 사회를 휘몰아 가며 예상치 못한 현실을 창출했다. 낡은 질서를 허물고, 적대의 경계선을 재구성했고, 유해한 자(것)들을 공격하는 새로운 전투적 주체들을 탄생시켰다.

* 한국 사회를 움직여 간 또 다른 욕망의 키워드가 ‘공정’이다. 안전의 욕망과 공정의 욕망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며, 차이를 드러내며 전개되는지에 대한 논의는 지면 관계상 이 글에서는 다루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차후의 기회를 기약해 본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에 의하면, 욕망은 결핍을 향해 끝없이 미끄러져 가는 기호학적 운동(자크 라캉)이 아니다.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부정성의 구멍과도 무관하다. 욕망은 생명력이다. 실재를 만들고 파괴하고 변형시키는 힘의 흐름, 생동하는 활력이다. 그것은 기계처럼 작동하며 요소들을 연결하여 영토를 만든다. ‘전염병, 유행, 바람’과 비슷하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욕망은 인식론적 판단에 선행하는 존재론적 운동이다. 욕망은 비판되지도 교정되지도 계몽되지도 않는다. 가령, 무해를 향한 욕망이 규범적으로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 진실인가 거짓인가라는 질문은 초점이 어긋나 있다. 중요한 것은 욕망이 발휘하는 미시정치적 생산력이다. 강도 높은 욕망은 진실, 도덕, 미학의 규범 그 자체를 찢고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체험하고 있듯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 인식론적 도구, 개념적 장치들이 크게 변화했다. 문학이나 예술작품에 대한 미적 평가도 질적 변화를 겪고 있다. 주체성도 마찬가지다. 매체와 관계망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심리-사회적 에너지가 휘몰아 간 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인간들이 웅성거리며 생성되는 것을 본다. 과거와 다른 (노동자, 청년, 학생, 여성, 엄마, 노인의) 목소리와 얼굴, 과거와 다른 내용의 요구, 청원, 비난, 질타, 열광 그리고 과거와 다른 스타일의 노래, 소설, 춤, 언어가 나타난다. 이들이 운동을 이끌고 소비를 주도하고 여론을 형성하며, 삶의 감각을 (재)창조해 나간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촛불 집회, 2011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 2014년 세월호 참사, 각종 의료 사고들(‘신해철 사고’), 군대 내 사고(‘윤일병 사건’),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구의역 스크린 도어 정비업체 직원 사망사고, 2017년 이후의 미투 운동, 2018년 버닝썬 사건, 2018년 태안 화력 발전소 사건(‘김용균 사건’), 2019년 n번방 사건, 리벤지포르노 유출 사건, 스쿨 존 교통사고(‘민식이 사건’), 2020년 입양아 학대 사건(‘정인이 사건’), 그리고 어린이집 영아 폭행, 사망 사건들…….

이 일련의 이슈들을 통해 형성된 안전을 향한 욕망은 일상에 흩어진 잠재적 위해들이 효과적으로 통제된 ‘무해한 사회’를 지향하고 있었다. 쇠고기에 함유되어 있을지 모르는 프리온, 아이들 방에 뿜어지는 독성 물질, 학생들을 태운 여객선의 위험, 여성의 일상을 위협하는 폭력, 비정규직이 겪는 산업재해,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 이 위해의 시스템이 차단, 관리, 조절된 안전한 사회에 대한 꿈이다. 흔히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이래 사회철학에서 안전은 개체의 자기 보존에 대한 자유주의적 가치의 하나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를 이끈 저 욕망의 소용돌이는 ‘나’의 안전이 아니라 ‘우리’의 안전을 주장해 왔다. 이때 ‘우리’는 대개 강렬한 당사자주의를 동반하고 있었으며(‘우리’의 처지에 있지 않은 자들, ‘우리’의 고통을 모르는 자들이 ‘우리’를 표상할 수 없다는 것), 선명한 적대의 선(線)을 끌고 나타나, ‘우리’ 아닌 것과의 경계를 명확히 노출시켰다. ‘우리’는 남성과 대립하는 여성으로, 386세대와 대립하는 밀레니얼세대로, 정규직과 대립하는 비정규직으로, 정상과 대립하는 퀴어(queer)로 나타났다. ‘우리’ 중 누군가의 죽음은 광범위한 애도를 낳았고, 죽음을 야기한 유해의 구조에 책임을 묻는 분노 어린 집합 행위가 발생하였다. 이것은 반복적 파동으로 물결치며,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사회 공간에 풀어 놓았다.

왜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왜 가난한 청년들이 부유한 부모를 만난 자들보다 더 많은 사고를 겪어야 하는가? 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쉽게 살해되어야 하는가? 왜 택배 노동자의, 콜센터 직원들의, 요양원 수용자의 호흡기는 바이러스에 더 쉽게 노출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사회적 평등을 ‘안전의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신체가 몰래 촬영되어 불법 사이트에 공개될 것을 걱정하지 않을 자유,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지 않고 연애를 할 수 있는 자유, 혹은 라돈에 의한 저선량 피폭을 걱정하지 않고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자유가 아닌가? 왜 안전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은 동시에 자유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안전으로서의 자유’ 혹은 ‘자유로서의 안전’이라는 매우 독특한 관념에 도달했다.) 우리가 누군가와 연대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위험, 불안, 공포를 함께 겪는 자들의 연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안전이 결핍된 존재자들의 새로운 연대, ‘무해의 연대’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울리히 벡
근대성의 중심 가치를 재조립하는 괴력을 발휘하는 것이 이처럼 (해방이 아니라) 안전에 대한 욕망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읽어낸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울리히 벡(Ulrich Beck)이다. 2008년 봄 미국산 쇠고기 촛불 집회가 시작되기 직전에 그는 한국을 방문하는데, 약 20년 전인 1986년에 처음 개진된 그의 ‘위험사회’ 개념은 이 시기에 이르러 일국을 넘어서는 ‘글로벌 위험사회’ 개념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벡은 산업사회에서 위험사회로의 전환을 단순한 사회변동이나 문화변동이 아닌 문명의 근본적 ‘탈바꿈(metamorphosis)’으로 규정한다. 애벌레가 나비로 변태하듯 그 동일성을 인지할 수 없을 정도의 격변이 21세기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정적 계기를 이루는 사건이 예컨대 체르노빌 참사였다. 문제는 재화goods가 아니라 위험(bads)이다. 방사능 물질처럼 위험은 지각되지 않고, 인간적 경계를 초월하여 흐르며, 복잡한 인과관계를 통해 작용한다. 벡이 말하는 ‘리스크’는 이처럼 전대미문의 파국이 야기한 ‘인간학적 충격’과 공명하며 근대성에 대한 서구의 자기반성을 주도하는 개념으로 작용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위험사회는 체르노빌과 같은 재난이 언제든 다시 도래할 수 있다는 집합적 불안을 동력으로 재구성되는 일종의 포스트-재난 사회라 말할 수 있다. 3월 31일 서울대에서 행한 강연에서, 그는 20세기를 지도해 온 유럽발 비판이론 전통이 이 새로운 문명의 논리를 해명하는 데 적합성을 상실했다는, 다소 충격적인 진단을 내린다.

“세계시민사회의 거주자들에게 인류학적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더이상 베케트의 형이상학적인 집 없는 상태, 자리를 비운 고도(Godot)도 아니고, 푸코의 악몽적 전망도 아니며, 막스 베버를 겁에 질리게 한 합리성의 소리 없는 독재도 아니다. (…) 오늘날 사람들의 우려는 근대성에 대한 인류학적 확신이, 흐르는 모래 위에 지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예감으로부터 온다. 사스와 BSE(광우병)는 단지 시작일 뿐이고 기후 파국은 곧 현실화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적 의존과 도덕적 책임의 구조가 부서지고, 세계위험사회의 민감한 기능체계가 붕괴될 수 있다는 공황에 빠진 공포가 될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모든 것은 물구나무선다. 베버, 아도르노, 푸코에게 섬뜩한 전망이었던 것(관리되는 세계의 완벽한 감시의 합리성)이 현재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약속이 된다.”*

* 울리히 벡·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지음, 한상진·심영희 엮음, 『위험에 처한 세계와 가족의 미래』, 새물결, 2010, 46쪽.

벡에 의하면, 위험사회의 시민들은 막스 베버(Max Weber)가 예견한 자본주의적 ‘철창(iron cage)’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가 비판한 ‘도구적 합리성’을 폄하하지 않는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분석한 ‘파놉티콘’과 규율 권력에 공포심을 갖지도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관리되는 세계의 완벽한 합리성”을 기대한다. 유럽의 대표적 비판 지성들이 디스토피아로 형상화해 온 (안전을 지켜주는) 통제된 감시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 민중이 꿈꾸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벡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위험사회의 리얼리티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지성의 목록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문화비평이나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정치철학도 포함시킬 수 있다.

예컨대 위험사회의 시민들은, 지젝이 냉소적으로 언급하듯이, 타자와의 건강한 관계를 맺을 능력을 상실한 ‘후기 자본주의의 나르시시즘적 주체’들이 아니다. 안전을 향한 욕망은 (신경증이나 환상이 아니라) 위험에 대한 과학 지식에 기초하며, 다수의 재난을 겪어 내면서 대중들이 고통스럽게 생산해 낸 사회적 공통 감각이다. 욕망의 진실이 오직 전문가에 의해서만 포착될 수 있다는 정신분석학적 믿음을 고수하는 한, 지젝이 대표하는 문화비평은 위험사회의 동학을 해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근대 생명정치의 기원을 절멸 수용소에서 발견하면서 그 불길한 이면(생명정치는 기본적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타자의 제거를 정당화하는 죽음의 정치라는 것)을 날카롭게 폭로하는 아감벤의 정치철학 역시, 우리 시대 안전을 향한 욕망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얼마나 탄력적인 차이와 변이를 드러내며 전개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가령, 생명정치가 작동하는 모든 곳이 곧바로 절멸 수용소가 되는 것이 아니며, 생명정치에 포섭된 대상들이 모두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으로 전락하는 것도 아니다. 글로벌 위험사회의 시민들은 (생명) 권력과 (안전) 욕망 사이에, 민주적 요구와 감시 장치의 필요성 사이에 넓은 교섭 공간을 확보하고 복잡한 협상을 수행한다. 예컨대, 더 많은 CCTV를 설치하여 일상의 범죄를 예방해 주기를 청원하되, 데이터를 불법으로 사용하거나 전유하려는 국가나 자본에 저항한다. 모세혈관처럼 뻗어 있는 현실 속에서 민주적 생명정치의 다양한 가능성이 실험되고 있다. 이를 일의적으로 수용소 파시즘 모델이라 비판하는 것은 큰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벡은 암시한다. 비판되어야 하는 것은 대중의 안전 욕망이 아니라, 특권적 발화 위치와 초월적 시각에서 이 욕망을 허위의식으로 꾸짖는 계몽적 비판 이성의 한계일 수도 있다.출처: 게티이미지
전망
2010년대 한국 사회의 안전 패러다임은 봉쇄된 자아의 순수성에 대한 환상, 완벽한 면역 체계에 대한 비현실적 열망, 비자기(非自己)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과도한 ‘안전주의’로 폄하되기 힘들다. 무해를 향한 욕망은 민民이 겪은 여러 재난 체험에 기초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와 미투 운동은 그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그 핵심에 존재하는 것은 삶을 근본적으로 취약한 것precarious으로 느끼게 하는 여러 형태의 위험들에 대한 인식, 그리고 유사한 위험을 공유하는 타자들과의 연대감이다.

무해를 향한 욕망은 헐벗음과 헐벗음을 연결하며 흘러간다.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범주를 범람하며 장애와 연결된다. 장애에 대한 이해와 권리투쟁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힘은, 동물이 처해 있는 비참에서 유사한 고통을 보게 한다. 이는 자연을 소유와 개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정당화했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친화성을 갖는다. 비인간 생명체, 그리고 사이보그로 대표되는 인간-너머(more-than-human)의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이런 방식으로 깨어나 활성화된다. 여러 형태의 고통, 위해, 문제 사이에 횡단적 연결망들이 형성되어, 새로운 지식과 실천이 구성되고 있다.* 여기 한국 사회의 안전 패러다임이 진화해 갈 한 방향이 예고되어 있다.

* 참고로 다음과 같은 책들을 읽어보면 좋겠다. 한승태 지음, 『고기로 태어나서』, 시대의 창, 2018; 수나우라 테일러 지음, 이마즈 유리 옮김, 『짐을 끄는 짐승들』, 오월의 봄, 2020; 김초엽·김원영 지음,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말하자면, 2010년대의 안전 욕망이 ‘내(우리)가 겪는 유해’의 고발과 항의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앞으로 그것은 ‘내(우리)가 가하는 유해’에 대한 윤리적 성찰, 일종의 ‘생태적 전환’의 형태로 그 반경을 넓혀 가지 않을까? 우리는 코로나19를 통해 지구적 수준의 생태 위기의 심각성을 절실하게 인지하게 되었고, 인간 활동이 비인간 생명에 가하는 가해를 더 예리하게 지각하게 되었다. 피해 호소의 언어적 능력을 갖지 못한 생명체들이 피해자의 얼굴로 나타나고 있다. 무해를 향한 욕망이 강해질수록, 인간이 환경에 가하는 유해에 대한 윤리적 인식은 그만큼 더 선명해져 간다. 무해의 감각에 눈뜬 자는 자신의 생명이 유지되기 위해 다른 존재의 삶이 삭감되어야 한다는 이 사태를 윤리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비거니즘(veganism)은 살기 위해 먹어야 했던 동물의 ‘살’의 의미를 고민한 자들의 결단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에 의하면, 내가 ‘있다는 것’은 언제나 타자의 ‘있음’에 대한 제한을 함축한다. 내가 있는 자리는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었던 자리의 점유이다. 심지어, 가장 원초적인 수준에서 말하자면, 내 현존을 위해서 나는 다른 생명의 살을 먹어야 한다. 그는 이렇게 쓴다. “양심의 최초의 빛은 인간이 자신의 이웃으로 가는 길 위에서 번쩍인다. 고독한 개인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양분, 공기, 햇빛을 빼앗아 그 생명을 짓누르고 부수는 모든 것에 대해 아랑곳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본성과 존재가 원래 그러한 것이라고 정당화하는 어떤 나무, 성장하는 나무와 같은 것이 아닌가? 빼앗는 자, 그것이 개인이다. 양심이라는 것은 (정신의 최초의 불꽃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신의 옆에 쌓여 가는 시체들을 발견하는 것, 내가 무언가를 죽이면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경악에서 오는 것이다.”* 윤리는 존재론의 악몽이다. 계속 생존하려는 자연적 욕망, 즉 코나투스(conatus)에 폭력적 정지(停止)를 가하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이것이 윤리의 최종 질문이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지음, 『곤란의 자유Difficile liberté』(국내 미출간), Paris, Albin Michel, 1976, p. 144-145.

홀로코스트에서 가족과 형제를 잃고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 그 자체의 정당성을 평생 괴롭게 물어온 레비나스의 저 삼엄한 윤리학은 20세기의 유럽 사유가 스스로에게 던진 가장 어두운 질문 중의 하나이다. 질문을 야기한 상황이 어둡고, 질문 앞에서 우리의 대답이 궁색하다는 사실이 어둡다. 그러나 그런 어두운 질문의 담금질을 통해서 비로소 환대와 공존, 혹은 용서의 철학이 나타날 수 있었다. 레비나스의 윤리는 인간의 세계만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21세기에 그가 말하는 이웃은 인간 너머로 확장되고 있다. 누군가의 얼굴을 보며 그를 죽일 수 없다면, 우리는 이제 그 얼굴의 목록에 철창에 갇힌 개들, 미치거나 장애를 갖고 도살을 기다리는 돼지들, 살처분되기 위해 구덩이에 던져진 닭들도 포함시켜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비인간의 얼굴들, 도처에서 ‘우리도 살고 싶다, 죽이지 말라’고 외치는 이 얼굴들도 이제 외면할 수 없다. 고통의 자리는 역동적으로 분열되어 간다. 거기에는 절대적 경계도 없고, 특권적 위치도 없다. 더 괴로워하는 존재는 언제나 어딘가에 있으며, 반드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무해의 시대는 고통이 회피되는 시대가 아니라, 이제껏 인정되지 못했던 새로운 고통을 기왕의 것들과 연결하는, 강인하고 질긴 망(網)이 엮어지는 그런 시대다.



함께 읽기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문학동네, 2018.
'무해’라는 단어를 한 시대를 읽는 키워드로 생각하게 만들어 준 단편집이다. 소설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깊은 울림이 있다.

<위험사회>
울리히 벡 지음, 홍성태 옮김, 새물결, 2006.
울리히 벡을 세계적인 사회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문제작. 20세기 후반 이후 서구 문명의 전환을 ‘위험risk’이라는 독창적 개념으로 진단하였다.

김홍중

본지 편집위원. 사회학자. 사회이론과 문화사회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가르친다. 최근 관심은 물성(物性), 인성(人性), 생명, 영성(靈性)의 얽힘과 배치이다. 지은 책으로 『은둔기계』, 『마음의 사회학』과 『사회학적 파상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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