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을 읽다가 1895년 도쿄에서 열린 내국공업전람회, 구로다 세이키의 <아침화장>을 둘러싼 일본인의 반응에 대하여,
"누드를 미술이란 제도에 의해 하나의 미적 대상으로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개념이었고, 따라서 전람회라는 새로운 서구적 제도가 도입되고 미술학교에서 누드를 교육과정으로 그리게 되면서 누드라는 미술의 형태가 점차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 기노시타 나오유키 (미술사학자, 1994)
김영나는 누드화는 누드란 미술제도가 사회적 합의를 이루었을 때 가능하다고 한다. 한편 어떤 급진적인 양상이 현행 미술의 제도, 틀에 포섭되지 않을 때, 미술평론가는 모순적인 위치에 선다.
과거 줄리 벽화 같은 사건을 보면 1) 미술은 가짜야 이런 거 가지고 호들갑 떨기는, 2) 저런 저급한 것도 미술이냐로 갈린다. 사실 이 두 가지 견해는 같은 이야기인데...
"1) 미술은 원래 그런거야 이런 거 가지고 호들갑 떨기는.." -> 줄리 벽화는 미술이다. 미술은 원래 풍자도 하고 패러디도 하고. 근데 그건 실제가 아니라 가짜일 뿐. <- 이 견해에서 줄리 벽화는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미술의 양상 그 자체다. 이 경우 급진성이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밝혀진 바, 여기에 관한 평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한다면 질적인 평가로 넘어간다.
"2) 저런 저급한 것도 미술이냐." -> 줄리 벽화가 미술이라면 매우 저급한 것이기에, 평을 할 가치가 없으며, 그렇기에 미술이 아닌 것과도 같다.
이 두 가지 연계된 논리에서 줄리 벽화는 미술의 전제로부터 시작해서 종국에는 미술로부터 배제된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1) 이것이 미술이 아니기 때문에 급진적일 수 있다. 2) 이것은 미술이 아니기 때문에 미술 제도의 질적 규범을 따르지도 않는다.
진보적 미술평론은 미술이 아닌 대상을 평해야 하며, 그것이 되도록이면 나중에라도 미술로 남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그 말은 미술평론이 미술계에서 인정받을 기회가 없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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