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펌인데 나만 볼꺼니까.
찡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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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수
선친께서는 살아생전 내내 광부셨다. 거의 평생. 광부 월급을 저축해서 논을 네 마지기 사셨다. 그 논에서 쌀농사를 지었다. 논은 문경 상류 선상지의 작은 평야지대에 있었다. 설마 거기 평야가 있을라고? 하는 방심의 틈새에 평야가 있었다. 남도 기준으론 평야랄 것도 아니지만. 그 소중한 논을 온천 나온다는 소식에 파셨다. 좀더 있다가 팔았더라면! 하고 후회를 하셨다.
문경온천은 요즘 유황천이고 탄산염천이고 뭣이고간에 기운이 많이 쇠한 것 같다. 초창기에는 전국구로 소문날 만큼 탕에 들어갔다 나오면 피로가 싹 풀렸는데..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 정책 이후 실직하셨다. 동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후 90년대 내내 대구 소재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하셨다. 공장 노동자가 된 후에는 커피를 즐기셨다. 하루에 두 잔 이상 마셨다. “커피는 사람 피를 말린다”고 못 마시게 하셨던 기억은 날라갔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는 깨끗했다. 문경새재에서 흘러나린 시내는 맑았다. 전혀 탄가루가 날리진 않았지만, 저녁 어스름 귀가하는 동네의 이웃집 가장들 대부분 얼굴이고 발이고 몽땅 시커맸다. 대부분 광부였다.
갱도 내에 들어가는 ‘항내부‘가 있었고, 갱도 밖에서 일하는 ’항외부‘로 나눠져 있었다. 이상하게 탄광촌에서는 ‘갱’을 ‘항’이라고 독음했다. 은성탄광, 봉명광업, 대성탄좌, 장자광업소 등등 많은 탄광회사들이 있었다.
나는 <쇳돌>이란 책이 소개될 때,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외부에서 본 르뽀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생래적인 반응이다. 아무리 잘 조사했다고 해도. 2022년 황재형 작가를 태백에서 만났을 때 역시 속내를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했다. 다 이야기 해서 뭣하랴.
단지 나는 극빈한 집에서 태어나 자신의 출신성분을 창조적으로 배반한 루돌프 슈타이너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을 따를 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파란곡절 끝에 사다리 타기에 성공한 평범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 소위 말하는 자수성가, 실제로는 체제 손바닥이 허락할 정도의 억수로 운 좋은 놈.
가령, 용인에서 거의 준정규직이 보장되었을 때거나 광주에서 중앙부처 정규직 5급 공무원이 되었을 때, 그냥 눌러 앉았어야 효자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앞가림 하는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살고자 하고, 실제 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고, 그럴 수 없었다. 여전히 생각의 페티시스트로서 살고 있다.
내가 찾았을 때, 아비는 문경병원에서 곡기를 끊고 계셨다. 서먹하던 부자는 평생 처음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충북 영동 대박골에서 오대조가 훈장 어른 하시고, 제자들은 다 급제해도 당신께서는 늘 낙방하셨단다. 그 길로 마치 수운처럼 과거길을 끊고 후손들에게 공부하지 말 것을 유언하셨다고. 그게 끝나는 게 내 대라고.
믿거나 말거나였지만, 아비 돌어가신 후에 구비문학대계 영동편에서 그 이야기와 거의 동일한 이야기를 찾아냈다. 신기해서 대박골을 가보려 했다.
이런저런 삶의 물굽이들 중에서도 유년기 첫 물굽이는 항상 회고하기 부담스럽다. 그런 의미에서 <쇳돌> 같은 책이 내게는 가장 부담스런 유형의 책이다. 예기치 않게 뭔가 훅하고 들어올 것만 같은. 그러면 반문할 것이다. “대체 무슨 권리로?” 그래서 하염없이 묵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언젠가 읽게 되리라는 예감은 있었지만, 새내가 사라지고 책벌레가 생겨날 때까지 묵혔어야 옳았으리라.
그리고 실제로 읽으면, 어떤 대목들에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씰룩 하리란 걸 알고 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책을 소개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시도 자체가 없던 일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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