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럿 무어만과 남준 백이 콜라보레이션을 시작할 때 무어만은 1964년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을 위한 칼하인쯔 슈톡하우젠의 <<오리기날레>>를 제작하고 있었다. 예술가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와 공동으로 쓴, <<오리기날레>>는 전후 작곡에서 가장 급진적인 발전을 포괄하고 있는 것 같았다: electronic sounds, the austere mathematical order of serialism, and the messy, veristic improvisations found in happenings. 무어만은 상대적으로 프로듀싱에서 뉴했지만 잘 알려진 괴짜 첼로주자로, 그녀의 뉴뮤직의 해석은 잡 디스크립션을 초과했다.
...
악기적 대체
"인간화된 기술"이 백남준의 잘 알려진(그리고 무어만의 조금 덜 알려진) 사이버네틱스에 관한 관심으로부터 도출된 한에서, 그것은 이중의 스테이트먼트로 독해되어야 한다. 경력 후기에, 백남준은 여기에 관해 "나는 기술을 바보처럼 만든다"고 덧부치기도 했다. 동일한 결론이 그가 노버트 위너와 마샬 매클루언, 케이지 사이의 "공통분모"라고 부른 것을 고려함으로써 도달할 수도 있다. 믹스드 미디어와 비결정성, "전자학과 물리학의 시뮬레이션 혹은 비교"에 덧붙여서, 백남준은 "미학과 사이버네틱스의 관계성" 속 중요한 연결지점을 위해 앙리 베르그송의 "시간의 개념"을 사려했다. 메카닉한 인식과는 반대로, 이것은 생기있는 연속체로서 상상된 시간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지속으로, 거기서 무질서는 오직 비결정성과 엔트로피, 실패 같이 예기치 않은 질서이다. 이런 이유로, 베르그송은 (손탁처럼) 오토마티즘이 코미디의 본질적인 원천이며 사회 비판의 형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계적 강요를 유동적 시간성, 굳은 액션이나 아이디어의 자동적 변화를 강요하든 꼭두각시와 리플리카의 외양을 강요하든, "인간 몸의 그 태도와 제스처, 움직임은 몸이 기계를 우리에게 떠올리는 꼭 그만큼 웃길 수 있다." 인간과 그들의 발명품을 화해시키는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인간화하는 기술"은 <오페라 부파>의 역할을 역전하는 것처럼 기능했다. 달라가 설명했듯이, 그것은 새로운 시간성 안에 새로운 주체성을 제시함으로써 현재에 반대하는 판타지다. "그것의 무기"는 그가 말하길 " 공통 휴머니티에 참여하는 것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는 것을 웃음거리로 만든다."
캠페인 트레일의 입후보자처럼, <로봇 케이456>은 ... 백남준이 무대에서 종종 그랬던 것처럼 말린 백태를 "쌌다." 뉴욕에 그것을 가지고 오기 전에, 백남준은 그것의 사포와 부싯돌 페니스를 제거하며 더욱 더 안쪽의 조크를 불어 넣었다. 케이지가 쓰길, "로보트의 똥은 비타민과 데오도란트, 사슴똥을 연상시키는 모양의 흰색이다; 페니스는 손가락의 그림자다;질은 고래의 그것이다." 케이지는 자연과 마약상점의 메타포를 통해 로봇을 이해했다. ... 다른 말로, <로봇>은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문화적으로 조합된 형상이었으며 예술가 자신의 자화상이었다. 왜냐하면 백남준은 <오리기날레>동안 관중에게 콩을 던졌고 <심플>에서 같은 것을 퍼포머에게 시켰고, 로봇의 콩의 배설은 또한 백남준의 일을 대신했던 것이었다. 백남준은 실로 그것이 그렇게 되길 희망했다.
도구에 의해 대체(substitution)되거나 로보트로 만들어진 노동자에 대한 조크는 산업화의 여명 이후 순환하는 불안을 건들였다. 빠르게 밤낮없이 지속되는 만족모르는 생산성은 새로운 기술이 노동자를 전부다 대체하려고 위협하는 동안에도 산업 기계의 기계적 움직임의 확실성을 오랫동안 필요로 했다. 1960년대에, 컴퓨터적 기계는 비슷한 울티마텀을 보여줬다. 동시에, 마이너리티와 여자 노동자의 밀어닥침(백남준과 무어만과 다르지 않게)은 미국 고용 시장을 압박했으며 어떻게 자본주의가 objectify하는지에 관한 마르크수조의 담론을 재점화했다. 그러나 프로덕션이 자본주의 경제 하의 인간과 오브젝트 사이의 트랜스피규레이션의 에이전트로 보였다면, malfunction은 <로봇오페라> 안에서 트랜스피규레이션의 에이전트였다. "다시 새로워진 존재론", 즉 "서프라이즈 아 프리오리"가 참여자를 익명화하는 곳으로부터 떠오른, <로봇>은 일을 멈추기 위해서 설계됐으며 그것은 무어만과 백남준이 욕망했던 역할의 융합을 초래했다.
그 로봇은 <ㅇ리기날레>의 타임포인트동안 무어만과 함께 슈톡하우젠의 유명한 <플러스 마이너스>를 듀엣으로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피치카토는 로봇이었다--하지만 로봇이 부서져서 피아노로 백남준에 의해 대체됐다. "스테이지 프라이이트"는 리뷰에 프린트된 설명이었다. 섭스티튜션과 트랜스피겨레이션은 다음 봄 유럽 투어까지 이어졌다. ... 생상의 <동물의 카니발>의 <백조>를 연주하는 동안, 무어만은 챌로주자로 행동하는 것에서 백조를 그리는 것으로 선회하여 한 배럴 물에 자신을 잠기도록 하고 물을 뿌리는 작곡을 완수했다. <로봇>이 무어만을 따라 작동하고 있을 때 마다 그 곡은 <로봇 오페라>를 참조하는 듯했다. 무어만이 자신이 음악이 될때까지 음악을 연주하는 동안, 악기적 로봇은 삶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인간의자, 인간 엔드핀 스토퍼, 백조 인간, 로봇 뮤지션에 더해서, 무어만과 백남준은 <24 stunden>의 <26'1.1499">의 급진적인 해석을 수행할 참이었다. ... 백남준을 "인간 첼로"로서 연주하기는 케이지의 작곡에 대한 무어만의 초기의 가장 도발적인 주석 중 하나였다. ...
케이지는 정확하게 그 시퀀스가 "시간 속 사운드 이벤트라기보다 액션을 중시했다"고 헐뜯었다. 실로, 퍼포머의 음악적 트레이닝과 체화된 존재를 향해 퍼포먼스가 재지시됨으로써, 무어만은 오페라 안에 음악이 가진 에이전시와 <오페라 부파>가 mistaken identity의 케이스를 제공한다는 사회적 풍자를 선호했다. 악기를 위해 인간을 잘못 취하는 것은 프로페셔널 필드로서의 학제와 후기 자본주의의 억압적인 행위 룰로서의 디서플린 사이의 유비를 만든다. ...
2018년 6월 7일 목요일
2018년 6월 6일 수요일
실패
롤러코스터를 탈 수 있는 것은 그 기계가 실패할 확률이 극도로 낮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기계를 탈 때 공포감을 느끼는 것은 일말의 실패할 확률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테슬라의 전기차가 자율주행 테스트에서 큰 사고를 냈다. 자율주행 전기차는 아직 상용화될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시스템의 실패란 총체적 붕괴로 직결될 수 있다. 예컨대 전력 공급의 실패는 단순한 어두운 삶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때문에 전기는 무슨일이 있어도 365일 끊임없이 공급되는 데 실패하면 안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전기는 인위적인 현상임에도 마치 언제나 어딘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연처럼 받아들여진다.
실패를 하기엔 그 기회비용이 너무 큰 지금의 사회 시스템.
예술가가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실패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실패할 것이고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다.
2018년 5월 30일 수요일
Jay W. Wilkey, Marshall McLuhan and Meaning in Music (1969)
"나는 매클루언의 기본 아이디어, 특히 의미(meaning)에 관한 아이디어를 찜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나는 매클루언이 철학적 스테이트먼트를 제공하는 것 속에서 어떠한 철학자나 음악가보다 중요하게 음악에서의 의미의 문제를 다뤘다고 본다."(53)
"우리는 모두 인지하고 있다. 많은 음악가--"절대주의자"가 음악이 의미를 가진다는 주장의 합법성을 부정한다는 것을. ... 마샬 매클루언은 그러나 얼마간의 통찰을 준다. 그 통찰이란 전통적인 절대주의자와, 음악은 반드시 그것이 기호화되기 위해서 의미를 가진다는 참조주의자 사이의 합의를 위해 지반을 제공할지도 모른다."(53)
"매클루언의 미디엄 개념은 공히 분명하지만, 메세지 개념은 용어의 상식적 정의와 얼마간 대치된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사이버네틱 혁명에 속한 대다수 과학자와 철학자에 의해 공유된다. 그들은 메시지를 컨트롤이나 효과, 변화의 관점에서 정의한다. 분리된, 목적론적 매너 속에 프로젝션된 정보나 컨텐츠의 관점에 아니라. 케네스 볼딩을 매클루안은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메시지의 의미는 변화이며 이미지 안에서 그것을 생산한다." 오직 효과나 피드백의 프로세스를 통해 누군가는 메시지가 이해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53)
"문맥 하나에 적절해서 변화를 촉진시킬 법한 것은 또 다른 문맥 안에서 부적절하고 고로 무의미(즉, 효과 없음)할 수 있다. 그처럼, 어떤 청자에게 잠재적으로 좋은 음악적 미디엄은 감성 혹은 신체적 미성숙함이 이유든 아니면 기본 지성과 교육의 결핍이 이유든 그것을 듣는 데 준비되지 않은 다른 이에게 무의미할 수 있다. 이런 토탈 커뮤니케이션 상황 안에서, 매글루언에 따르면, 문화적 문맥(cultural context)을 취하는 미디엄은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의미 개념의 상식은 미디엄의 중요성을 인지하지만, 컨텐츠나 정보를 토텔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매클루언은 컨텐츠의 주제에 목을 매는 이 경향이 시각으로부터 연원한 문화의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문화가 구텐베르크 컴플렉스--시각지향적, 프린트지배적 서구 문화를 위한 용어--의 희생양은 아니다. 세계 대다수는 구술로부터 연원된다.
서구 사회의 시각적-문자적 지향은 아마도 절대주의-참조주의 논쟁이 왜 음악적 서클 안에 영원히 머물게 됐는지 설명한다. 르네상스와 프린팅 프레스의 발명 이후, 유럽인은 점점 더 시각적으로 지향됐다. 이 프로세스의 결과 하나는 형이상학적 중요성 안에서 음악이 탈강조된 것이다. 예를 들어 칸트는 음악을 가장 덜 중요한 예술--원리적 기준이 되는 컨텐츠의 결핍--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감성적으로 파워풀한, 음악의 효과성 혹은 의미를 명확하게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시각적으로 지향된 사회와 함께, 많은 진지한 음악가가 이런 장식적이고 감성 중심의 존재에서 벗어나 음악을 지성적이고 의지적인 것을 포함하는 더욱 중요한 지위로 키워내려고 애쓴 것은 지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프로그램 뮤직과 참조주의 미학의 아이디어는 시각 지향 사회의 뻔한 발전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프로그램 뮤직은 매클루언의 컨텐츠와 미디엄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이상적인 예시를 제공한다. 절대주의 음악은 주어진 악보의 음악적 컨텐츠는 음악 자체--즉, 톤, 얼마나 그것들이 연결되어 있는지, 형식--와 동일하다고 계속 주장할 것이다. 다른 말로, 형식(미디엄)과 내용은 동일하다. 평범한 하나의 프로그램 음악에서--말하자면, 리처드 스트라우스 심포닉 포엠에서--프로그램(컨텐츠)는 형식(미디엄)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극렬한 레퍼런셜리스트는 특정한 작업의 가치는 프로그램(컨텐츠)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음악적 프로세스--즉, 형식(미디엄)--에 달려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나 <돈 퀴호테>의 철학적 깊이는 <Till Eulenspieel's Merry Pranks>보다 나은 작업을 만들지 않는다. 다른 말로, 우리는 음악적 미디엄이 메시지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혹은 반대로, 음악적 컨텐츠라는 것, 구별가능한 컨텐츠가 존재하는 장소인 그것이 청자에게 행해지는 컨트롤을 결정하는 데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53-6)
"구텐베르크 시대에서, 반응react없이--즉시적인 피드백의 이득 없이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것--작곡가가 행위act할 수 있게 됐다. 프린팅의 발전과 함께 전문화--작곡가, 퍼포머, 교사, 결국엔 지휘자--의 발전이 도래했다. 구텐베르크 컴플렉스의 효과는 청자로부터 작곡가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 궁국적인 인간 미디엄은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다. 그는 반드시 그의 커뮤니케이션 미디엄과 고로 프린트된 스코어에 의해 상징화된 그의 메시지를 종종 왜곡하는 다른 사람의 도구성에 의존해야만 한다. 전자 음악의 발전은 의심할 여지 없이 자신의 음악을 다시 컨트롤하기 위한 시도를 보여준다.
마샬 매클루언의 그림책 <미디엄은 마사지다>에서, 사진의 단 한명의 음악가는 미스 샬럿 무어만으로, 케이지와 아방가르드주의자의 음악을 지지하는 첼로주자다. 그녀는 특정한 케이지의 작업, 즉 드라이 클리닝을 커버하는 데 사용하는 비닐백을 위한 콘서트 의상을 입고 사진이 찍혔다. 미스 무어만은 미디엄으로서의 퍼포머에 관한 고찰을 위해 흥미롭고 중요한 포인트를 만든다. 그녀의 퍼포먼스의 메시지는 그녀의 가상적 누드성에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퍼포먼스된 그 작업은 (정확히, 케이지에 따르면) NBC 텔레비전에서 퍼폼된 것(그녀가 똑같은 시나리오를 따라갔지만 의상을 전부다 갖춰 입은)과 다른 작업이다. 그리고 그 작업은 그러므로 콘서트 홀에서 퍼포먼스된 그 작업은 벌레스크 무대에서 퍼포먼스된 똑같은 시나리오와 다르다; 혹은 최소한, 다른 메시지가 커뮤니케이션됐다.
콘서트의 비틀즈나 멍키스를 생각해보라. 젊은 관중은 즉시 들리는 피드백을 시작한다. 그 특정한 퍼포먼스가 잘 수행됐는지 아닌지 듣기 위해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 미디엄은 거기 있고 기능하고 있다; 그 메시지는 즉시 이해된다. 이런 현상은 10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
근본적인 감각에서, 그 퍼포머는 음악적 미디어의 세 가지 층위에서 가장 중요하며 그러므로 가장 영향력있는 메시지다. 이것은 자신의 개성에 음악을 맞게 만드는 퍼포머와, 작곡가의 오리지널 의도의 현실화에서 도구성으로서 자신을 우선적으로 보는 퍼포머 모두에게 진실이다. 전자의 접근은 개별 작업이 완전한 현실화를 위해 개인적 개입에 의존하는 특정 음악 스타일--재즈, 소울, 음악 코미디--에 적절하다. 하지만 대부분 스타일은 후자의 접근을 요구한다; 맥시멈 효과는 퍼포머가 자신의 개성을 부정하는 동시에 듣기위한 스타일과 개별 작업의 묽은 미디어를 허용할 때 성취된다.
역설적으로, 오직 강한 개성--파워풀한 통제하는 미디엄--만이 서로 다른 음악 스타일에서 메시지를 저자적으로 프레젠테이션할 수 있으며, 이것은 전체 세계와 우리가 화해하는 데 중요하다: 동과 서, 젊음과 늙음, 부와 빈, 교육됨과 아님. 오직 성숙한 퍼포머만이 그의 예술성을 보증할 수 있고, 그는 바흐부터 Boulez에 이르는 창조적인 정신의 메시지로부터 발산하는 생동하는 힘의 지휘자로 수행할 수 있다. ... 질문은 음악의 퍼포머가--그리고 음악 퍼포머의 교사가--매클루언의 메시지(미디엄은 메시지다)의 도전을 충분히 진지하게 취할 것인지 아닌지다."(58)
"우리는 모두 인지하고 있다. 많은 음악가--"절대주의자"가 음악이 의미를 가진다는 주장의 합법성을 부정한다는 것을. ... 마샬 매클루언은 그러나 얼마간의 통찰을 준다. 그 통찰이란 전통적인 절대주의자와, 음악은 반드시 그것이 기호화되기 위해서 의미를 가진다는 참조주의자 사이의 합의를 위해 지반을 제공할지도 모른다."(53)
"매클루언의 미디엄 개념은 공히 분명하지만, 메세지 개념은 용어의 상식적 정의와 얼마간 대치된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사이버네틱 혁명에 속한 대다수 과학자와 철학자에 의해 공유된다. 그들은 메시지를 컨트롤이나 효과, 변화의 관점에서 정의한다. 분리된, 목적론적 매너 속에 프로젝션된 정보나 컨텐츠의 관점에 아니라. 케네스 볼딩을 매클루안은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메시지의 의미는 변화이며 이미지 안에서 그것을 생산한다." 오직 효과나 피드백의 프로세스를 통해 누군가는 메시지가 이해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53)
"문맥 하나에 적절해서 변화를 촉진시킬 법한 것은 또 다른 문맥 안에서 부적절하고 고로 무의미(즉, 효과 없음)할 수 있다. 그처럼, 어떤 청자에게 잠재적으로 좋은 음악적 미디엄은 감성 혹은 신체적 미성숙함이 이유든 아니면 기본 지성과 교육의 결핍이 이유든 그것을 듣는 데 준비되지 않은 다른 이에게 무의미할 수 있다. 이런 토탈 커뮤니케이션 상황 안에서, 매글루언에 따르면, 문화적 문맥(cultural context)을 취하는 미디엄은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의미 개념의 상식은 미디엄의 중요성을 인지하지만, 컨텐츠나 정보를 토텔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매클루언은 컨텐츠의 주제에 목을 매는 이 경향이 시각으로부터 연원한 문화의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문화가 구텐베르크 컴플렉스--시각지향적, 프린트지배적 서구 문화를 위한 용어--의 희생양은 아니다. 세계 대다수는 구술로부터 연원된다.
서구 사회의 시각적-문자적 지향은 아마도 절대주의-참조주의 논쟁이 왜 음악적 서클 안에 영원히 머물게 됐는지 설명한다. 르네상스와 프린팅 프레스의 발명 이후, 유럽인은 점점 더 시각적으로 지향됐다. 이 프로세스의 결과 하나는 형이상학적 중요성 안에서 음악이 탈강조된 것이다. 예를 들어 칸트는 음악을 가장 덜 중요한 예술--원리적 기준이 되는 컨텐츠의 결핍--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감성적으로 파워풀한, 음악의 효과성 혹은 의미를 명확하게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시각적으로 지향된 사회와 함께, 많은 진지한 음악가가 이런 장식적이고 감성 중심의 존재에서 벗어나 음악을 지성적이고 의지적인 것을 포함하는 더욱 중요한 지위로 키워내려고 애쓴 것은 지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프로그램 뮤직과 참조주의 미학의 아이디어는 시각 지향 사회의 뻔한 발전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프로그램 뮤직은 매클루언의 컨텐츠와 미디엄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이상적인 예시를 제공한다. 절대주의 음악은 주어진 악보의 음악적 컨텐츠는 음악 자체--즉, 톤, 얼마나 그것들이 연결되어 있는지, 형식--와 동일하다고 계속 주장할 것이다. 다른 말로, 형식(미디엄)과 내용은 동일하다. 평범한 하나의 프로그램 음악에서--말하자면, 리처드 스트라우스 심포닉 포엠에서--프로그램(컨텐츠)는 형식(미디엄)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극렬한 레퍼런셜리스트는 특정한 작업의 가치는 프로그램(컨텐츠)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음악적 프로세스--즉, 형식(미디엄)--에 달려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나 <돈 퀴호테>의 철학적 깊이는 <Till Eulenspieel's Merry Pranks>보다 나은 작업을 만들지 않는다. 다른 말로, 우리는 음악적 미디엄이 메시지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혹은 반대로, 음악적 컨텐츠라는 것, 구별가능한 컨텐츠가 존재하는 장소인 그것이 청자에게 행해지는 컨트롤을 결정하는 데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53-6)
"구텐베르크 시대에서, 반응react없이--즉시적인 피드백의 이득 없이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것--작곡가가 행위act할 수 있게 됐다. 프린팅의 발전과 함께 전문화--작곡가, 퍼포머, 교사, 결국엔 지휘자--의 발전이 도래했다. 구텐베르크 컴플렉스의 효과는 청자로부터 작곡가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 궁국적인 인간 미디엄은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다. 그는 반드시 그의 커뮤니케이션 미디엄과 고로 프린트된 스코어에 의해 상징화된 그의 메시지를 종종 왜곡하는 다른 사람의 도구성에 의존해야만 한다. 전자 음악의 발전은 의심할 여지 없이 자신의 음악을 다시 컨트롤하기 위한 시도를 보여준다.
마샬 매클루언의 그림책 <미디엄은 마사지다>에서, 사진의 단 한명의 음악가는 미스 샬럿 무어만으로, 케이지와 아방가르드주의자의 음악을 지지하는 첼로주자다. 그녀는 특정한 케이지의 작업, 즉 드라이 클리닝을 커버하는 데 사용하는 비닐백을 위한 콘서트 의상을 입고 사진이 찍혔다. 미스 무어만은 미디엄으로서의 퍼포머에 관한 고찰을 위해 흥미롭고 중요한 포인트를 만든다. 그녀의 퍼포먼스의 메시지는 그녀의 가상적 누드성에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퍼포먼스된 그 작업은 (정확히, 케이지에 따르면) NBC 텔레비전에서 퍼폼된 것(그녀가 똑같은 시나리오를 따라갔지만 의상을 전부다 갖춰 입은)과 다른 작업이다. 그리고 그 작업은 그러므로 콘서트 홀에서 퍼포먼스된 그 작업은 벌레스크 무대에서 퍼포먼스된 똑같은 시나리오와 다르다; 혹은 최소한, 다른 메시지가 커뮤니케이션됐다.
콘서트의 비틀즈나 멍키스를 생각해보라. 젊은 관중은 즉시 들리는 피드백을 시작한다. 그 특정한 퍼포먼스가 잘 수행됐는지 아닌지 듣기 위해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 미디엄은 거기 있고 기능하고 있다; 그 메시지는 즉시 이해된다. 이런 현상은 10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
근본적인 감각에서, 그 퍼포머는 음악적 미디어의 세 가지 층위에서 가장 중요하며 그러므로 가장 영향력있는 메시지다. 이것은 자신의 개성에 음악을 맞게 만드는 퍼포머와, 작곡가의 오리지널 의도의 현실화에서 도구성으로서 자신을 우선적으로 보는 퍼포머 모두에게 진실이다. 전자의 접근은 개별 작업이 완전한 현실화를 위해 개인적 개입에 의존하는 특정 음악 스타일--재즈, 소울, 음악 코미디--에 적절하다. 하지만 대부분 스타일은 후자의 접근을 요구한다; 맥시멈 효과는 퍼포머가 자신의 개성을 부정하는 동시에 듣기위한 스타일과 개별 작업의 묽은 미디어를 허용할 때 성취된다.
역설적으로, 오직 강한 개성--파워풀한 통제하는 미디엄--만이 서로 다른 음악 스타일에서 메시지를 저자적으로 프레젠테이션할 수 있으며, 이것은 전체 세계와 우리가 화해하는 데 중요하다: 동과 서, 젊음과 늙음, 부와 빈, 교육됨과 아님. 오직 성숙한 퍼포머만이 그의 예술성을 보증할 수 있고, 그는 바흐부터 Boulez에 이르는 창조적인 정신의 메시지로부터 발산하는 생동하는 힘의 지휘자로 수행할 수 있다. ... 질문은 음악의 퍼포머가--그리고 음악 퍼포머의 교사가--매클루언의 메시지(미디엄은 메시지다)의 도전을 충분히 진지하게 취할 것인지 아닌지다."(58)
유튜버 단상
연예인이 하나 둘씩 유튜브 계정을 파고 있다. 유튜브 컨텐츠 시장의 성장에 발맞추어 후발 주자가 우세한 (상징) 자본을 무기 삼아 뛰어들고 있는 모양새다. 그중에서도 개그맨이 눈에 띈다. 아무래도 제한된 시간 내에 재미를 줘야하는 유튜브 생태계에서 순발력이 필요하다보니 개그맨이 상대적으로 적응하기 쉬운 것 같다. 최근엔 맛있는 녀석들의 김민경이 민경장군이란 쿡방 채널로 무언가를 흉내내고 있다. 아마도 개그맨 사이에서 이 종목?이 화두인 모양인데, 실력도 미비하고 내용도 재미없어 시류에 편승하는 느낌이 들어서 아직은 비호감이다. 하지만, 네임밸류 있는 연예인 혹은 기획사가 본격적으로 이 판에 뛰어든다면 분명히 순식간에 파이가 커질 것이다. 아직은 궤도에 오른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사실 엠비씨의 마이리틀티비나 CJ의 다이아TV를 비롯하여 이런 낌새는 오래전에 감지되고 있다. 앞으로 컨텐츠 수준이 질적으로 향상되는 동시에 다분화되면 지금과 같이 UCC 수준의 영상을 제작하는 1인 유튜버가 살아남기는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대신 1인 유튜버는 다이아티비 같은 대기업에서 전속 크리에이터로 활동할 가능성이 높겠다. 유튜브가 플랫폼이라면 다이아티비는 플랫폼의 플랫폼인 건가? 인디씬에서 이름이 높아지면 메이저로 올라가야지만 살아 남을 수 있는 우리나라 가요 생태계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과거 홈페이지를 스스로 만들기, 서버를 스스로 구축하기 열풍이 분적이 있었다. 요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플랫폼이 그런 원천 지식을 배울 필요성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가끔은 얼기설기 만든 개인 홈페이지를 찾았을 때 느꼈던 손맛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느낀다. 인터넷은 여전히 바다에 비유할 수 있는가? 그런 항해자의 시대는 이미 저문 것 같다. 우리는 지금 가두리 양식장 안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