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19일 화요일

2019년 2월 11일 월요일

역량평가?

절차적 공정성 같은 개소리를 지껄이는 (우파는 차치하고서라도) 미술계 좌파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터져 나온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정녕 미술계의 대통령으로 보고 싶다면, 그냥 국민투표에 부치자고 이야기하는 편이 나아보인다. 미술계 사람들이 그것을 환영할까? 미술의 미자도 모르는 일반 시민이 그것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2019년 2월 1일 금요일

보기 싫어하는 것

나는 아직도 홍성담과 이구영의 그림이 흥미롭다. 왜냐하면 이 그림을 좌파와 우파 모두가 보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거칠게 정치 전반이 이 그림을 싫어했다고 말해야할지도 모른다. 정치는 왜 특히 이들의 그림을 그렇게 느꼈던 것일까?

하나. 세련된 신좌파가 보고 싶어하지 않는 어떤 이미지. 이것은 운동적인 경향을 담고 있는, 어딘가 낡고 무식해보이며, 단도직입적이고, 무례한, 그래서 감각적인.

둘. 우익이 보고 싶어하지 않는 이미지.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본 모습.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것이 출현하면 단박에 자신의 거울상이 되어버리는 민중(미술)적인 무엇, 그래서 쉽게 독해 가능한, 감각에 호소하는.

"안 본 눈 삽니다"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보기 싫거나 끔직하거나 혐오스러운 걸 보면 눈이 멀 것 같다는 말도 한다. 상상이나 가능한가? 스펙터클이란 말이 거의 아무대서나 쓰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어떤 이미지가 이렇게까지 위협적이라니? 정말로 이미지에 우리는 무뎌진 것일까? 민감해진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홍수라는 말은 오히려 어떤 불길한 이미지의 철저한 억압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언가를 본 것 만으로(사실은 보여진 것에 가깝지만) 부정탄다고 믿어버리는 미신은 일찍이 S. 프로이트가 지적한 언캐니한 감정으로, 그 기원은 고대 사회의 애니미즘까지 올라간다. 

한국사람은 아직까지 추상적인 것을 독해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 추상적인 단어가, 특히 근대 이후에 태동한 사고방식을 규정하는 그런 단어가 한국어에 많이 없기 때문일까?

한국미술계에서 좋은 작품이란 어떻게 보면 추상화의 성공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해석이 가능할 정도로 꼬아져있어야 한다. 반대로 해석이 가능해야지만 좋은 작품이라는. 그런데 이때 좋은 작품이라고 만족감을 느끼는 주체는 누구일까?

2019년 1월 2일 수요일

결산?

이맘쯤 되면 꼭 2018년 결산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나와서, 미술이나 영화, 책 같은 걸 목록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적은 인스타그램식 취향 과시인 경우도 있지만, 말 그대로 한 해를 압축 가공해서 보여주려는 야망을 가진 경우도 있다. 사실 여기엔 리스크가 있다. 한 해를 짧은 리스트로 갈무리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취사 선택의 심리와 배경이 드러난다는 것이 문제다. 취향 과시의 경우에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선택한 문화 컨텐츠가 내 취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선택 자체가 내 취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것에 있다. 그런 척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는 일은 어쩌면 관음 행위를 들켰을 때 드는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취향 과시는 그런 쪽팔림의 리스크를 안고 있다. 물론 그 리스크를 알고 있다면 사실 리스트를 만들어 공개할 생각은 쉽게 못하겠지만. 아무튼. 갈무리파의 경우도 내 선택 자체가 문제가 된다. 하지만 취향과시파가 그냥 애정결핍처럼 보인다면, 갈무리파는 야망도 있고 진정성도 있고 끈끈한 동료애도 있다. 갈무리파는 어쩌면 지난 한 해가 정말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고 목록을 만드는 것 같다. 갈무리파는 취향과시파보다 훨씬 객관적으로 목록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인척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어쩌구저쩌구...

어쨌거나 그럼에도 어떤 사람이 정리한 한 해를 보는 건 재미있는 일.

2018년 12월 28일 금요일

인건비

어쩌면 갤러리에서 아무 일도 안 하고 얼굴마담 하는 여직원이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업계의 싼 인건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2018년 12월 26일 수요일

2018년 12월 2일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