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7일 월요일

Buddhism and the Neo-Avant-Garde: Cage Zen, Beat Zen, and Zen By Alexandra Munroe

http://www.alexandramunroe.com/wp-content/uploads/2009/06/Cage-Zen-Beat-Zen-and-Zen-by-Alexandra-Munroe.pdf

.

2010년 중반의 시티팝
80년대 도시의 노스텔지아
일본에서 느끼는 한국의 노스텔지아
90년대 일본문화 개방
30-40대 뮤지션

비평과 내편

나에게는 그러고보면 언제나 미술의 아이디얼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아이디얼은 단순하게 세계에 대한 미술의 어떤 효능감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정치적인 것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사회적인 것이라고도 이야기한다. 어찌됐든 좋다. 그런 것에 관심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런데 나에게는 효능감의 아이디얼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아이디얼에 부합하는 미술이란 찾기가 힘들었고, 언제나 나는 작업 앞에서 동요했다. 

어제 문득 든 생각은 내가 거꾸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있는 미술에서 효능감을 찾지 못하면, 효능감이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같은. 

나는 언제나 정치를 니편 내편이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나도 역시 어느 편에 속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 편과 니 편을 가르는 것이 나에게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현실에 기반해서.

2019년 10월 4일 금요일

네트워크의 명과 암

네트워크라는 말의 개념을 요즘엔 인터넷 기반 컴퓨팅의 감각으로 많이들 사용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더욱 전통적으로 네트워크라는 말을 사용하는 감각은 친밀도다. 누가 누구를 끌어왔냐. 누가 누구랑 친하냐. 누가 누구랑 안 친하냐를 가지고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없다를 판단한다.

그래서 networked society란 개념은 어떤 면에서 진부할대로 진부하다. 가령 80년대의 '진영' 논리는 내가 보기에 네트워크 연대체를 기반으로 한다. <<오늘의 살롱>>을 비롯하여 많은 신생공간의 전시는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이뤄졌다. 추천은 추천을 낳는다. 알음알음의 평판으로 한 사회는 그를 일원으로 받아들일지 아닐지를 결정한다.

어제 전시 순회

어제는 민하와 몇 개의 전시를 돌았다. 시청각의 윤지원 개인전을 시작으로, 보안여관의 범준, 윌링앤딜링의 백경호, 마지막으로 킵인터치의 <<코너3>>로 마무리.

백경호와 <<코너3>>는 그냥 그랬다. 백경호는 한국의 '팝아트', 예를 들어 초기 배윤환이나 잭, 아트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인데 조금 더 마티에르가 거칠다고 해야하나. <<코너3>>는 코너 연구를 테마로 작업을 섭외했나본데, 작업도 코너도 밍숭맹숭 그 자체. 큐레이터쉽의 부재 혹은 단순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전시.

보안여관의 범준 개인전은 머랄까. 유튜브 컨텐츠를 차용해서 가족예능의 느낌으로 영상 제작. 나머지 그림은 그냥 그랬고, 하나는 testimony의 느낌으로 걸려 있었다. 영상에서 오브제 제작의 비중이 있는 작가가 종종 영상과 함께 사용된 오브제를 함께 전시한다. 김웅현이 자주 그러고 임흥순 국현 전시에서더 그런 것을 봤다.

범준의 영상에서 시종일관 느껴지는 건 라캉식으로 '대타자'라고 불릴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에게 보여지고 있느냐. 여기서 '누구'는 유튜브 시대의 채널 구독자일 것이다. 그런데 이걸 네트워크와 분리된 공간에 전시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1) 전시장-관객은 유튜브-구독자의 관계와 동일한 관계로 이해할 수 있을까. 즉, 현실 공간은 유튜브적 네트워크와 별반 차이 없고 관객의 인식 패턴도 유튜브 구독자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없다? 2) 혹은 의식적인 네트워크로부터의 분리라고 봐야할까? 그렇다면 전시장에 나뒹구는 (작동하지 않는) 네트워크의 파편은 무엇을 의미할까? 3) 혹은 물리적 분리, 심리적 동기화? 3)의 경우 캐서린 헤일스가 노버트 위너의 정보 이론을 비판하는 관점을 떠오르게 만든다. 신체의 약화 비물질적 정보, 즉 정신의 우세화. 이것이 데카르트의 코기토, 자유주의 휴머니즘과 연결된다는 것. 이 작업도 전시장이나 전시장에 걸린 모니터 스크린, 그걸 보는 관객 보다는, 그 작업이 전시장 안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따로 분리되어 있는 그 하나만 있는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작업을 보길 원하며, 영상 자체도 분명히 네트워크와 분리된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는 심리를 투사하길 원한다는 점에서, 머랄까. 정신을 어따 팔고 있냐, 유체이탈, 혼이 빠져 나갔다 같은 말이 떠오르는데...

윤지원의 작업은 시네마와 전시를 '융합'하려는 시도. 하지만 아쉽게도 전시는 큰 의미를 발휘하지 못한듯. 9개로 분할해 놓은 영상은 날짜별로 제시되어, 물론 랜덤액세스의 가능성은 여전히 있긴 하면서도, 별로 효과적으로 제시되지 못했다는 평가를 할 수 있을듯. 즉, 9개의 영상을 하나로 이어붙여도 크게 무리가 없다. 글 못쓰는 사람이 앞에 번호만 붙이면 뭔가 완결된 것처럼 느끼는 그런 식의 느낌적 느낌이 여기에 있었달까. 엄청난 소재에 비해서 작업은 얄팍했다는 게 나의 평가다.

+ 윤지원이 연대를 갔다고 하는데, 모든 구성 요소가 연대의 연대여서 이건 이거 나름 대로 흥미로움.

2019년 10월 2일 수요일

사이버네틱스 2nd 서문 틈틈이 노트

"내가 챕터 IX에서 보여주려고 하듯이, 이 랜덤 노이즈 이론은 전자회로의 분석이나 다른 논-리니어 프로세스를 위해서 실천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종합을 위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1] 이때 쓰이는 디바이스는 랜덤한 인풋이 된 논-리니어 도구(instrument)의 아웃풋을 잘 정의된 일련의 orthonormal 함수로 환원하는데, 이것은 에르미트 다항식(hermite polynomials)과 매우 연관이 있다. 논-리니어 회로의 분석에서 문제는 평균화하는 과정에서 인풋의 특정한 파라미터에서 이런 다항식의 계수를 결정하는 것에서 만들어진다.

이 프로세스의 설명은 되려 간단하다. 분석되지 않은 논리니어 시스템을 블랙박스라고 부른다면, 나는 어떤 알려진 구조의 몸통으로 내가 부르고자 하는 화이트박스는 욕망된 확장이라는 다양한 의미를 표현한다. 나는 블랙박스와 화이트박스에 똑같은 랜덤 노이즈를 넣는다. 블랙박스의 발전에서 화이트박스의 계수(coefficient)*는 그것들의 아웃풋 생산의 평균으로 주어진다. ... [어우 무슨 이야긴지 모르겠다] *두 박스의 유사도를 이야기하는듯

블랙박스를 하나씩 똑같이 재현하는 중독적인 파트(?)를 만드는 각각의 화이트박스의 계수를 정의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이것의 양을 동시에 결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또한 적절한 피드백 디바이스를 사용하여 화이트박스 각각이 자동적으로 그 자신을 블랙박스의 발전에 있는 그것의 계수에 동기화하는 레벨로 그 자신을 맞추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복수의 화이트박스를 구축했고, 그것이 적절히 블랙박스에 연결되고 같은 랜덤 인풋을 넣는다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블랙박스와 작동면에서 동등하게 형태화할 것이다. 비록 내부 구조는 많이 다를지라도." (x-xi)

"리니어한 예측 이론과 논리니어한 예측 이론은 모두 예측에 들어맞는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규준과 관련이 있다. 가장 간단한 규준은, 그것이 가장 쓸모있다고 할 수는 없어도, 에러의 평균제곱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xiii)

"러닝 머신(learning machine)의 개념은 예측자나 필터, 다른 비슷한 장치를 위해서보다 훨씬 더 확장될 수 있다. 그것은 특별히 체커스 같은 경쟁 게임을 플레이하는 기계를 연구하고 구축하는 데 중요하다. 여기에 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 Corporation 실험실의 사무엘과 와타나베가 해왔던 활력있는 작업이 있다. 필터와 예측자의 경우에서처럼, 시간 시리즈의 기능/함수가 더 큰 함수 클래스가 확장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발전된다. 이런 함수들은 의미있는 양을 수적으로 평가할 수 있고, 성공적인 게임 플레이는 여기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그것들은 양편에 있는 말의 수, 이 말의 총 커멘드 수, 그것들의 이동성 등등으로 이뤄진다. 이 기계를 채용하는 출발점에서, 이 다양한 고찰은 잠정적인 가중치를 부여받고, 그 기계는 ... 이 시점에서, 그 기계는 견고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일을하고 러닝머신이지는 않다.

그러나, 동시에 그 기계는 다른 업무를 상정한다. 그것은 그 기능/함수를 확장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1 지는 것은 0, 아마도 비기는 게임은 1/2 .... 이런 방식으로, 그것은 이런 고찰의 가중치를 재결정하며 더욱 복잡한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게 된다." xiii-xiv

"모든 이 작업은 프로그래밍을 프로그래밍하는 이론과 실천의 부분이며, 이것은 Electronic Systems Laboratory of the MIT에서 극렬하게 연구되어왔다. 여기서 컷이 발견되는데 얼마간 그러한 러닝 디바이스가 채용되는 한, 리지드한 패턴의 머신의 프로그래밍은 그 자체로 어려운 과제이며 이 프로그래밍을 프로그램하기 위한 디바이스에 대한 긴급한 요구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제 그 러닝 머신의 컨셉이 우리가 만드고자 하는 머신에게 적용가능하다는 것은, 그것은 우리가 동물이라고 부르는 살아있는 머신과 유사하기도 하며, 우리가 생물학적 사이버네틱스에 관한 새로운 빛을 던지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여기서 다양한 현재 연구 중 하나를 지목하고 싶은데, 그것은 살아있는 시스템의 Kybernetics에 관한 스탠리-존스의 책이다.[1] 이 책에서 그들은 신경 시스템의 작동 레벨을 특별한 자극에 반응하는 다른 피드백과 마찬가지로 유지하는 피드백에 몹시 관심을 두었다." xiv-xv.


2019년 10월 1일 화요일

뉴턴적 시간, 베르그송적 시간

백남준의 <노버트 위너와 마샬 매클루언>이란 글에 보면 이 둘을 가지고 책을 쓰고 싶은 생각을 비치는데, 시간관에 관한 챕터에 뉴턴적 시간과 베르그송적 시간이 적혀있는 걸 볼 수 있다: "인도의 시간, 그리스의 시간, 성서의 시간, 뉴턴의 시간, 베르그송의 시간, 깁스의 시간, 후설의 시간, 하이데거의 시간, 사르트르의 시간, 케이지의 시간, 위너의 시간, 슈톡하우젠의 시간." 특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볼게 많았으므로 지나쳤는데, 그 레퍼런스가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에 있었다는 걸 오늘 알았다. <사이버네틱스>의 첫 번째 장이 '뉴턴적 시간과 베르그송적 시간'이다.

뉴턴적 시간은 가역적인데, 인과관계가 바탕이 되기 떄문이다. 깁스의 시간은 확률적이어서 뒤집을 수 없다. 깁스의 시간은 베르그송의 철학과 상통한다. "가역적인 시간에서 새로운 건 없다. 진화와 생리학의 비가역적인 시간에는 언제나 새로운 어떤 것이 있다. 베르그송은 이 둘의 차이를 강조한다." Cybernetics, p.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