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일 월요일

급진적 미술에 대한 미술평론의 모순

논문을 읽다가 1895년 도쿄에서 열린 내국공업전람회, 구로다 세이키의 <아침화장>을 둘러싼 일본인의 반응에 대하여, 

"누드를 미술이란 제도에 의해 하나의 미적 대상으로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개념이었고, 따라서 전람회라는 새로운 서구적 제도가 도입되고 미술학교에서 누드를 교육과정으로 그리게 되면서 누드라는 미술의 형태가 점차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 기노시타 나오유키 (미술사학자, 1994)

김영나는 누드화는 누드란 미술제도가 사회적 합의를 이루었을 때 가능하다고 한다. 한편 어떤 급진적인 양상이 현행 미술의 제도, 틀에 포섭되지 않을 때, 미술평론가는 모순적인 위치에 선다. 

과거 줄리 벽화 같은 사건을 보면 1) 미술은 가짜야 이런 거 가지고 호들갑 떨기는, 2) 저런 저급한 것도 미술이냐로 갈린다. 사실 이 두 가지 견해는 같은 이야기인데...

"1) 미술은 원래 그런거야 이런 거 가지고 호들갑 떨기는.." -> 줄리 벽화는 미술이다. 미술은 원래 풍자도 하고 패러디도 하고. 근데 그건 실제가 아니라 가짜일 뿐. <- 이 견해에서 줄리 벽화는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미술의 양상 그 자체다. 이 경우 급진성이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밝혀진 바, 여기에 관한 평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한다면 질적인 평가로 넘어간다.

"2) 저런 저급한 것도 미술이냐." -> 줄리 벽화가 미술이라면 매우 저급한 것이기에, 평을 할 가치가 없으며, 그렇기에 미술이 아닌 것과도 같다. 

이 두 가지 연계된 논리에서 줄리 벽화는 미술의 전제로부터 시작해서 종국에는 미술로부터 배제된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1) 이것이 미술이 아니기 때문에 급진적일 수 있다. 2) 이것은 미술이 아니기 때문에 미술 제도의 질적 규범을 따르지도 않는다.

진보적 미술평론은 미술이 아닌 대상을 평해야 하며, 그것이 되도록이면 나중에라도 미술로 남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그 말은 미술평론이 미술계에서 인정받을 기회가 없다는 뜻..

2024년 8월 28일 수요일

민희진 대표이사 해임

민희진이 어도어 대표이사에서 해임되었다. 경영과 제작을 분리한다는 취지라고 하는데, 제작을 경영 아래에 두고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행정과 학예가 서로 반목하는 미술관도 비슷한 처지라 제작 편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제작과 경영이 일원화된 민희진 시대의 어도어는 그러고 보면 대단했던 것 같다. 큰 성과는 큰 위험부담을 안는다. 큰 위험부담은 결국 관행으로부터 얼마만큼 벗어나느냐다. 창의성이 클수록 위험하다. 제작에서 하는 일이다. 

경영에서 중요한 건 이 제작의 영역을 이해하는 것이 첫번째이고 그것을 가지고 일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두번째이다. 경영은 제작에서 발생한 위험부담을 어떻게든 푸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안 하면 된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경영의 입장에서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쩄든 제작의 힘을 믿고 경영도 다른 종류의 위험부담을 안아야 한다. 

민희진 시대에는 그런 것이 가능했다. 지금 이원화된 조직 형태에선 그 이상을 절대 이뤄내지 못할 것이다. 사사건건 경영의 결재를 득해야 한다면 그만큼 창의성이 구현화 될 수 있는 영역은 줄어들 것이다. 관리자 지상주의. 소는 누가 키우나?

2024년 7월 29일 월요일

잡것에게 분노를 느끼는 권력

 ‘쯔양 협박’ 구제역 구속에 검찰총장 “수익 박탈하라” (msn.com)

왜 권력은 유독 잡것들의 일탈에 분노할까? 그것을 반드시 단죄하고 삭제하고 싶어할까? 

잡것들의 일탈 = 주제 파악 안 되는 쾌락 추구 = 다른 건 봐줘도 계급-선 넘는 건 못 참아

2024년 5월 14일 화요일

멘토와 꼰대의 변증법

어느 큐레이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구구절절한 질문이 올라왔길래 댓글을 달아준 적이 있다. 핸드폰으로 '감사합니다' 같은 댓글 알람이 떴길래 한 시간인가 뒤에 들어가봤더니 게시글이 삭제된 뒤였다. 내가 댓글을 단 건 꼭 그 사람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다 참고를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는 댓글로 조언을 해주는 대부분의 사람이 다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좀 허무하고 허탈하기도 하고 괴씸하기도 하고. 몇몇 커뮤에서는 그래서 게시글 삭제 금지 조항이 있다. 아무튼.

경험적인 이야기이지만, 요즘 엠지가 말하는 좋은 멘토와 나쁜 꼰대는 뭐 이런 거 같다. 좋은 멘토는 도움은 되어도 언제든지 끊어내도 나에게 피해가 없을 관계일 것. 나쁜 꼰대는 언제든지 끊어낼 수도 없는데 나에게 실이익도 주지 못하는 관계. 멘토는 언제나 좋을까? 멘토가 점차 도움이 되지 않는 시점에 꼰대가 된다. 꼰대가 해주는 말을 당사자가 싫어했는데 나중에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어쨌든 간에 여기서 관계, 사회, 공동체란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씀.

2024년 4월 29일 월요일

정지 이미지

어떻게 모든 것이 초고속으로 움직이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정지된 이미지에 불과할까. 정지 이미지는 모든 역량을 빼앗겨 꽁꽁 묶여버린 이미지다. 정지 이미지는 사물화된 이미지이며 정확히 상품의 논리를 따른다. 정지 이미지는 사진과 닮았지만 전혀 다르다. 사진은 인풋이 통제되지만 정지 이미지는 아웃풋이 통제된다. 뉴진스의 최신 뮤직비디오는 정지 이미지의 최상의 예이다. 

2024년 4월 18일 목요일

Yuk Hui, ChatGPT, or the Eschatology of Machines

지피티로 위협을 느끼고 있음

칼 슈미트 등 모던이론은 모두 신학적 개념이 세속화한 것 -> 이런 이해는 모던의 합법성을 깎아내림 

비슷하게 AI의 장점은 기계와 산업 프로파간다--모던 스테레오타입--에 의해 만들어진 종말론적 상상에 파묻혀버릴 지경.

AI를 테크니컬한 것 이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음. 

지피티는 단순히 이해하지 못하는 패턴을 출력하는 게 아님 -> 재귀성(피드백)

원인-결과 매커니즘(선형적 인과관)은 자연, 기계론적. - 오가니즘에 대한 사유가 18세기 등장(칸트). 판단력비판. 생각(철학)은 유기체만 가능하다. <-이건 사이버네틱스 등장으로 종료

사이버네틱스는 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재귀성. -> 비선형적 인과관계

지피티는 기계적(인간이 알 수 없는 기계적 알고리듬으로 이뤄짐)이지만도 않고 유기체적(모든 인간의 텍스트를 알고있다)이지도 않음. 통합함.

지성(intelligence)이 반성형식이라면  칸트는 그게 인간만 가능하다고 봤지만 사이버네틱 시스템에선 그렇지 않음

이플럭스 AI 관련 글

링크: Search - e-flux

지겹더라도 읽어야한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