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1일 화요일
김어준의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한국 동시대미술 비평의 맥락적 퀀텀점프
김장언(1) 김소라의 불 : 공(空)과 색(色) - PONG
미술사적으로 루샤와 나우먼의 불은 시각적으로 침묵의 발언과 사물의 소멸, 남겨진 것과 사라진 것, 순간과 영원이라는 의미에서 캘리포니아 개념미술가들의 비사회적(asocial) 혹은 냉소적 정치성을 함축하는 듯하다.[2] 이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오히려 직접적인 발언을 소거하는 침묵의 방식을 통해 시대의 폭력성에 응답하려는 역설적인 정치적 실천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압력에 대한 응답으로서, 어떤 사건을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그 불안의 공기를 무심히 태우고, 그 행위와 시간을 무덤덤하게 기록한다. 그들은 침묵했지만 불태웠으며, 우리는 그들의 뒤틀린 불을 추론해야 한다.
김소라의 전시, 《EMPTY》는 다소 특이점이 있다. 김소라는 6, 70년대 개념미술가들의 실천을 참조하듯이 [...]
나는 이 말이 웃기다. 미국 미술사에서 띄우는 대표적인 작가 에드 루샤와 브루스 나우먼을 들먹이다가 갑자기 (미국) 60, 70년대 개념미술가의 실천을 '참조'하는 김소라로 퀀텀 점프한다. 미국 미술사적 맥락이 도입되는 배경에 대한 설명보다 발빠르게 앞서 그 맥락이 '있음'을 독자에게 심어 넣는 것이 대체 어떤 유의미함이 있는지, 그 간극에 대한 설명은 책 10권으로 부족할 것이다.
내 생각엔 이런 글의 증상은 필자 자신을 향해 원인을 귀속시켜야 마땅한데, 김장언 같은 행동력이 결여된 X세대 코스모폴리탄은 이게 '당연'한 거다. 한국 작가가 미국 60-70년대 개념미술가를 당연히 참조할 수 있는 것이다. 미술은 시간적으로 컨템퍼러리하며 공간적으로 글로벌하기 때문이다. 후배 세대인 나는 전혀 믿지 않지만...
2025년 10월 16일 목요일
최진욱 블로그를 보다가
포럼A에 쓴 글 카테고리의 글을 쭉 읽다가 최진욱이 쓴 글에 누군가가 댓글 단 부분이 웃겨서 가져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ㅋㅋ
신영식님 의견 2004-09-23 오전 10:57:00 Delete
젊은 평론가라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노라면,뭔가 상당히 착각하는거 같은데, 자신들의 지적, 실천적 경험의
얕음과 일천함을 선정적인 수사들로 채우는걸 좋아한다는 것이다.
비유의 방식등을 보면 아마, 다른 대중문화들의 담론형식(특히 영화)을 모방하는것 같다.
글은 기름기가 잔뜩 배어있으나 진정으로 '미술적'인 시각의 필터를 구축하지 못했으므로
현실을 보는 눈들은 정확하지도 못하고 무엇보다 앙상하다.
찾아내는게 아니라 재단하는걸 좋아하는 아주 못된 습성들만 전세대에서 이어받은거 같다.
도데체 같은 세대인 내가 보아도 정말 하릴없고 얕고 무의미한 글들이 많다.
지적배경또한 날림이라는게 금방 감지되어서 조금은 기대를 했다가 재빨리 접는다.
그정도 얕은 시각의 글들은 인터넷에도 널렸기 때문에 굳이 볼 필요가 없다.
차라리 수많은 익명의 블로거들, 혹은 논자들이 더 현명하고 깊다.
평론가라는 명함을 내밀려면 이들보다는 다른(즉 전문적인) 뭔가를 보여줘야 할게 아닌가?
사실 기대를 끄는게 열받지 않는길일게다. 미술이 뭐란 말인가?
그 물음들을 평론가들에게 먼저 되돌려 주고 싶어진다.
[출처] 아트지와 젊은 미술이론가 신지영이 받은 추석선물 (2004)|작성자 달리는꽃
2025년 10월 10일 금요일
피자 기억
이타도리의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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