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5일 월요일

세마 하나평론상

링크: 관종의 시대와 자기 노출 전략의 미학 :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을 중심으로 –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

집중해서 텍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가 쉽지 않다. 한 두 번 정도 스킴했으나 결국 제대로 읽진 못했다. 왜 그런진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 글에서 놀라운 점 하나는, 작품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로지 큐레이터의 의도만 가지고서 전시비평을 할 수 있다는 것일 텐데, 호오를 떠나서 이런 관점이 '수상'까지 했다는 건, 어떤 변화에 대한 합의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지도 모른다. 큐레이팅이든 비평이든.

- 이 글은 전시가 일종의 '수치플'을 하고 있다고 봄. 기후정의를 실천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는 자신을 일정 부분 '노출'하는 일. 수치스러움이야말로 여성적이고 해방적이다..?

- 할 포스터는 포르노그래피적인 것과 옵씬한 것을 구별한다. 최소한 내가 지속 가능한 미술관에서 본 것은 옵씬하진 않았다. 오히려 '지속가능성'이란 정상적 규범의 강박적 재현에 가깝달까..?

- 로라 멀비라는 반갑고도 오래된 이론가가 글 속에서 등장하는데. 내가 기억하기로 멀비의 <시각적 쾌락>은 글 대부분을 헐리우드 내러티브 영화가 여성을 재현하는(대상화하는) 방식, 소위 남성적 응시의 구조를 비판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그래서 멀비가 노출증을 해방적 요소라고 보았는 게 정말 그랬나? 싶은데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체크해봐야겠다. 아무튼 멀비 같은 오래된 글을 이론에서 더 이상 보고 싶지는 않다. 너무 단순하지 않은가? 보는자 보이는자.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 권력과 피해자 등등의 이분법.

- 관종의 원래 뜻에 좀 더 충실했다면 어땠을지. 노출증자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서 더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성기를 시각적으로 쏘아 보냄으로써 당하는 쪽이 당황하게끔 하는 게 목적 아닌가? 바바리맨이 고추를 보여줄 때 작다고 놀리면 당황해서 도망간다는 썰처럼. '과도하다'는 건 노출증자의 생각이 아니라 그걸 쓰고 있는 필자의 생각인듯. 암튼 노출증자의 목적은 성적 쾌락이지 수치스러움? 그 자체가 아니라는 거...

- 인격화된 미술관: 여럿 작품을 모아 둔 전시를 블랙박스화하고 블랙박스의 표면만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큐레이터는 작품과 미술관의 대변인이 될 수 있을까?

2025년 10월 22일 수요일

서문의 정석

 반민수 Auction House: Bronke.. : 네이버블로그

반이정은 이런 글을 잘 쓴다. 전시서문의 정석..?

그나저나 반민수란 작가의 작업은 흥미롭다.

2025년 10월 21일 화요일

김어준의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어젠가 뉴스공장에서 김어준이 자신이 조만간 큰 공격을 받게될 것이고 여기에 대한 대비는 이미 10여년 전에 끝났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정준희와 인터뷰에서도 느낀 것인데 습관적으로 김어준은 '나는' '이런 사람이야' '그런 사람 아니야'라는 어법을 사용한다. 마치 이 부분은 일정 부분 이명박의 유명한 대선 주장 '나는 그런 삶을 사라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과 겹치면서도 (사건이 아닌 인물을 통해, 사실보다는 믿음을 전제해야 한다는 점에서) X세대 특유의 '나'라는 자의식이, 마치 '나'에 대한 드러냄을 '책임' 혹은 '진리'와 연결시키는 것 같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당연하게도 나를 드러냄이 곧 책임과 연결되지 않을 뿐더러 진리와 연결되지도 않는다. 

한국 동시대미술 비평의 맥락적 퀀텀점프

김장언(1) 김소라의 불 : 공(空)과 색(色) - PONG

미술사적으로 루샤와 나우먼의 불은 시각적으로 침묵의 발언과 사물의 소멸, 남겨진 것과 사라진 것, 순간과 영원이라는 의미에서 캘리포니아 개념미술가들의 비사회적(asocial) 혹은 냉소적 정치성을 함축하는 듯하다.[2] 이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오히려 직접적인 발언을 소거하는 침묵의 방식을 통해 시대의 폭력성에 응답하려는 역설적인 정치적 실천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압력에 대한 응답으로서, 어떤 사건을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그 불안의 공기를 무심히 태우고, 그 행위와 시간을 무덤덤하게 기록한다. 그들은 침묵했지만 불태웠으며, 우리는 그들의 뒤틀린 불을 추론해야 한다.

김소라의 전시, 《EMPTY》는 다소 특이점이 있다. 김소라는 6, 70년대 개념미술가들의 실천을 참조하듯이 [...]

나는 이 말이 웃기다. 미국 미술사에서 띄우는 대표적인 작가 에드 루샤와 브루스 나우먼을 들먹이다가 갑자기 (미국) 60, 70년대 개념미술가의 실천을 '참조'하는 김소라로 퀀텀 점프한다. 미국 미술사적 맥락이 도입되는 배경에 대한 설명보다 발빠르게 앞서 그 맥락이 '있음'을 독자에게 심어 넣는 것이 대체 어떤 유의미함이 있는지, 그 간극에 대한 설명은 책 10권으로 부족할 것이다.

내 생각엔 이런 글의 증상은 필자 자신을 향해 원인을 귀속시켜야 마땅한데, 김장언 같은 행동력이 결여된 X세대 코스모폴리탄은 이게 '당연'한 거다. 한국 작가가 미국 60-70년대 개념미술가를 당연히 참조할 수 있는 것이다. 미술은 시간적으로 컨템퍼러리하며 공간적으로 글로벌하기 때문이다. 후배 세대인 나는 전혀 믿지 않지만...

2025년 10월 16일 목요일

최진욱 블로그를 보다가

포럼A에 쓴 글 카테고리의 글을 쭉 읽다가 최진욱이 쓴 글에 누군가가 댓글 단 부분이 웃겨서 가져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ㅋㅋ

 신영식님 의견 2004-09-23 오전 10:57:00 Delete

젊은 평론가라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노라면,
뭔가 상당히 착각하는거 같은데, 자신들의 지적, 실천적 경험의
얕음과 일천함을 선정적인 수사들로 채우는걸 좋아한다는 것이다.
비유의 방식등을 보면 아마, 다른 대중문화들의 담론형식(특히 영화)을 모방하는것 같다.

글은 기름기가 잔뜩 배어있으나 진정으로 '미술적'인 시각의 필터를 구축하지 못했으므로
현실을 보는 눈들은 정확하지도 못하고 무엇보다 앙상하다.
찾아내는게 아니라 재단하는걸 좋아하는 아주 못된 습성들만 전세대에서 이어받은거 같다.

도데체 같은 세대인 내가 보아도 정말 하릴없고 얕고 무의미한 글들이 많다.
지적배경또한 날림이라는게 금방 감지되어서 조금은 기대를 했다가 재빨리 접는다.
그정도 얕은 시각의 글들은 인터넷에도 널렸기 때문에 굳이 볼 필요가 없다.
차라리 수많은 익명의 블로거들, 혹은 논자들이 더 현명하고 깊다.
평론가라는 명함을 내밀려면 이들보다는 다른(즉 전문적인) 뭔가를 보여줘야 할게 아닌가?
사실 기대를 끄는게 열받지 않는길일게다. 미술이 뭐란 말인가?
그 물음들을 평론가들에게 먼저 되돌려 주고 싶어진다.

2025년 10월 10일 금요일

피자 기억

피자가 정말 먹고 싶었던 어린 시절. 어디서 파는지도 모르겠고 프렌차이즈가 지금처럼 발달을 하지도 않았고 비쌀 것 같아서 주문해 달라고 감히 그렇게 말 할 수도 없었던 시절 할 수 있었던 건 '엄마 피자 좀 만들어주면 안 되나?' 엄마는 당연히 할 줄 모른다고 했던 것 같지만 계속 먹고 싶다고 하니까 나름 연구를 해서 후라이팬을 사용해서 만들어 보셨다. 술빵같이 떡진 식감의 빵 위에는 피망과 햄, 케첩, 양파를 얹었다. 뭔가 소시지 야채 볶음 같은 맛도 나고..그랬던 것 걑다. 원래 피자 맛을 모르니 그런가보다 하고 몇 번 먹었던 기억. 특히 기억나는 건 아빠가 여보 피자 한판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던 말. (그 빵을 '피자'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던 순간.) 옛 기억을 떠올려보지만 그때 치즈가 올라갔었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치즈맛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건 환이 집에서 식빵으로 만든 피자를 먹었을 때 치즈가 늘어나는 걸 보고 놀라워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