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하가 하는 걸 지켜보다가 얼마간 빵 만들기에 관심이 생겨서 밀가루 반죽을 치대고 오븐에 굽기를 반복했다. 빵 반죽이란 게 반죽하고 발효하고 지켜보고 또 발효하고. 어찌나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던지. 만약 힘이 얼마나 투여되는지로 여성/남성을 나눈다면 베이킹이 여성의 영역이 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리오슈는 계란과 버터가 들어가는 빵인데 특히 버터가 많이 들어간다. 버터 먹는 게 싫어서 아주 조금만 넣었는데 만들 땐 맛이 어떠려나 우려했지만 오늘 샌드위치를 싸와서 먹어보니 꽤 먹을만 했다. 오늘 샌드위치는 당근라페 샌드위치. 통상적으로 라페에는 신만 단맛을 가미하지만, 나는 그냥 겨자와 올리브오일만 넣었다. 집에 맛이 가고 있는 청상추가 있길래 같이 넣어서 쌌다. 당근향이 엄청 강했다. 브리오슈는 약간 달콤하기도 약간 고소하기도. 다 약간약간씩. 꽤 맛있었다.
2026년 2월 23일 월요일
[스크랩] 칭신 우
Chinghsin Wu received her Ph.D. in Art History from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specializing in Asian and modern art with an emphasis on transnational and cross-cultural perspectives. She is the author of Parallel Modernism: Koga Harue and Avant-Garde Art in Modern Japan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9) and Truth through Immersion: A Biography of Painter Tsai Yun-yan [Ronghui Zhizhen Tsai Yun-yan] (Taipei: Yishujia Chubanshe, 2018).
Her other publications include “Colors of Empire: Watercolor in Meiji Japan,” in The Visual Culture of Meiji Japan (Routledge, 2022); “Institutionalizing Impressionism: Kuroda Seiki and Plein-Air Painting in Japan,” in Mapping Impressionisms (Routledge, 2021); “André Lhote and Japanese Modern Art,” in André Lhote and His International Students (Innsbruck University Press, 2019); “Reality Within and Without: Surrealism in Japan and China in the Early 1930s,” in Review of Japanese Culture and Society (December 2014); “Transcending the Boundaries of the ‘isms’: Pursuing Modernity through the Machine in Japanese Avant-Garde Art,” in Rethinking Japanese Modernism (Leiden: Brill, 2012); “Icons, Power, and Artistic Practice in Colonial Taiwan: Tsai Yun-yan’s Buddha Hall and Boys’ Day,” in Southeast Review of Asian Studies 33 (2011); and “Reflecting and Refracting Modernity: Images of the Modern Girl in 1920s and 1930s Japan,” in Japon Pluriel 8 (2011).
Wu has worked at the National Palace Museum in Taiwan, producing a “digital museum” project which used digitization technologies to create an interactive virtual exhibition on Buddhist iconography and philosophy entitled Convergence of Radiance—Tibeto-Chinese Buddhist Scripture Illustrations (2003). She has also worked as a Curatorial Research Associate at the Museum of Fine Arts, Boston, where she helped curate a traveling exhibition, Japanese Masterpieces (2011), which sent approximately one hundred Japanese artworks to Japan. In addition, she has written essays and entries for exhibition catalogues, including Surrealism Beyond Borders (Metropolitan Museum of Art and Tate Modern, 2021) and Modern Art at Official Exhibitions: Tokyo, Seoul, Taipei, Changchun (Fukuoka Asian Art Museum, 2014). Before her current position at Rutgers, Camden, she was the Phillips Collection Postdoctoral Fellow for 2015-2016, and has previously taught at Tufts University, Brown University, Brandeis University,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and elsewhere.
2026년 2월 10일 화요일
2026년 1월 5일 월요일
2025년 12월 27일 토요일
2025년 12월 18일 목요일
[스크랩] 섹슈얼리티와 공간
섹슈얼리티와 공간 | 정암총서 2 | 베아트리츠 콜로미나 | 알라딘
![]() |
| Self Portrait with Wife and Models negative 1981; print about 1984 |
2025년 12월 15일 월요일
세마 하나평론상
링크: 관종의 시대와 자기 노출 전략의 미학 :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을 중심으로 –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
집중해서 텍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가 쉽지 않다. 한 두 번 정도 스킴했으나 결국 제대로 읽진 못했다. 왜 그런진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 글에서 놀라운 점 하나는, 작품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로지 큐레이터의 의도만 가지고서 전시비평을 할 수 있다는 것일 텐데, 호오를 떠나서 이런 관점이 '수상'까지 했다는 건, 어떤 변화에 대한 합의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지도 모른다. 큐레이팅이든 비평이든.
- 이 글은 전시가 일종의 '수치플'을 하고 있다고 봄. 기후정의를 실천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는 자신을 일정 부분 '노출'하는 일. 수치스러움이야말로 여성적이고 해방적이다..?
- 할 포스터는 포르노그래피적인 것과 옵씬한 것을 구별한다. 최소한 내가 지속 가능한 미술관에서 본 것은 옵씬하진 않았다. 오히려 '지속가능성'이란 정상적 규범의 강박적 재현에 가깝달까..?
- 로라 멀비라는 반갑고도 오래된 이론가가 글 속에서 등장하는데. 내가 기억하기로 멀비의 <시각적 쾌락>은 글 대부분을 헐리우드 내러티브 영화가 여성을 재현하는(대상화하는) 방식, 소위 남성적 응시의 구조를 비판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그래서 멀비가 노출증을 해방적 요소라고 보았는 게 정말 그랬나? 싶은데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체크해봐야겠다. 아무튼 멀비 같은 오래된 글을 이론에서 더 이상 보고 싶지는 않다. 너무 단순하지 않은가? 보는자 보이는자.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 권력과 피해자 등등의 이분법.
- 관종의 원래 뜻에 좀 더 충실했다면 어땠을지. 노출증자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서 더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성기를 시각적으로 쏘아 보냄으로써 당하는 쪽이 당황하게끔 하는 게 목적 아닌가? 바바리맨이 고추를 보여줄 때 작다고 놀리면 당황해서 도망간다는 썰처럼. '과도하다'는 건 노출증자의 생각이 아니라 그걸 쓰고 있는 필자의 생각인듯. 암튼 노출증자의 목적은 성적 쾌락이지 수치스러움? 그 자체가 아니라는 거...
- 인격화된 미술관: 여럿 작품을 모아 둔 전시를 블랙박스화하고 블랙박스의 표면만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큐레이터는 작품과 미술관의 대변인이 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