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5일 목요일

《메이드 인 경상도》 띄엄띄엄 시청기

깔끼..? 피식대학의 《메이드 인 경상도》(이하 《경상도》)를 처음 봤을 때 경상도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경상도 사투리 아닌 것 같다, 혹은 재미없다. 그도 그럴 것이 경상도 사람들에게 짭투리는 그렇게 새로운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새롭고 신선한 것은 제대로 된 사투리인데, 최근 조국이 부산을 찾아 “고마 치아라 마”를 시전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거센 파도”를 일으킨 것을 보면 잘 알수 있다.1) 반면 <그것만이 내 세상>의 윤여정은 고작 3개월 공부하고 사투리 연기에 도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경상도 사람은 그 도전이 지겨웠겠지만, 애초에 서울 사람에게 사투리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상도 사람은 그것이 경상도 사투리가 아니라는 사실 말고는 다른 관심이 없다. 

툭과 탁과 씹뽕구리의 삼각관계

니 어데 출신이고 묻기 좋아하는 경상도 스타일로 따지고 들자면, 이용주는 부산 출생이라곤 하지만 어렸을 때 수도권으로 이사와 사투리 냄새를 1도 풍기지 않으며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는 호주에서 살아서 영어도 비교적 유창하다고 한다. <피식쇼>가 월드클래스를 표방하며 영어로 진행될 수 있는 핵심적인 이유이며 여기서 물론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사람은 단연 이용주이다. 이용주는 누가 보더라도 부산 사람이 아니다. 이게 본캐다--과장 좀 섞자면 그는 정말로 ‘월드클래스’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본캐를 거의 가공없이 그대로 차용해 온 《경상도》에서, 이용주는 자신을 부산 사람이라고 억지 주장한다. 그리고 이 억지 주장은 코미디 구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바퀴벌레를 뜻하는 바쿠쌉꿀마를 비롯하여 지금도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깔끼까지, 경상도 사람 본인이 그거 경상도 말 아니에요 해도 오히려 그를 호통치며 가르치려고 달려든다. 누가 봐도 무지성 버티기 모습이 애처로우면서도 굳이 그 많은 지역 중에서도 잘 하지도 못하는 경상도 말을 향한 열정의 원천을 알수가 없다. 웃음 포인트가 여기쯤인 듯 하다.

한편 이용주는 김민수의 경멸의 눈빛을 정통으로 맞는다. 《경상도》의 김민수와 정재형은 모두 이용주 캐릭터를 좀 더 뚜렷하게 만들어주는 안티테제로 역할한다. 김민수는 본래 경상도, 울산, 순수혈통, 그러니까 진리나 원본의 자리에 서서, 존재 그 자체로, 이용주의 떳떳하지 못한 모습을 저 반대편으로 상대화한다. 김민수는 이용주의 말을 받아 줄 필요가 없다. 인상만 써도 된다.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존재 자체가 진리의 자리에 서있기 때문이다. 《경상도》에서 김민수라는 원본의 존재로 인해 이용주의 열등함--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순식간에 이미 서울 사람이 되어 있다--이 자동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으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에서 웃긴 것이다.2) 출신에서 밀리는 이용주는 김민수를 회유할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 《경상도》에서 이용주가 김민수에게 보인 태도는 정재형과는 사뭇 다르게 사뭇 호의적이다. 본토 사람 김민수 앞에서는 다소 억지도 쓰지만 결국 비굴한 자세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도 같은 의미에서 웃긴 것이다.

반면 정재형은 대구 출신 부모를 두었지만 서울에서 나고 자란, 너무나 처음부터 서울 샌님으로서, 경상도 호소인의 또 다른 안티테제가 된다. 어느 에피소드에서 이용주는 나머지 둘과 술을 마시며 김민수와는 같은 경상도끼리 “툭 하면 탁” 통할 것 같은데 정재형은 그렇게 될 수 없다고 선을 긋는다--왜냐하면 그는 “씹뽕구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시뮬라크르 사이의 관계와 꼭 닮았다. 김민수가 이용주에게 쿠사리를 줄 수 있다면, 이용주 역시 정재형에게 쿠사리를 줄 수 있다--갈수록 경상도 본적이란 원본에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소 부조리하더라도, 이용주는 정재형이 자신보다 훨씬 경상도 사투리를 잘 구사할 수 있을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용주는 계속해서 그를 서울 사람으로 위치시키려고 애쓴다.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생략이다. 《경상도》에서, 최소한 초반에는 정재형의 분량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적었는데, 이는 마치 아다치 미츠루가 자주 자신이 손수 만든 빌런을 만화에서 재현하는 방식과 꼭 닮았다--예를 들어 감독에 잘못 찍힌 엑스트라처럼, 『H2』에서 키네는 한 번도 그럴싸한 장면을 얻지 못한다.3)
 
위에서 서술한 이용주와 김민수, 정재형 3인의 구성적 대립은 《경상도》에서 장소가 바뀌어도 한동안 반복되는데--각 인물의 특징이 현실로부터 그대로 차용되었다고 하더라도--이 부분만은 상당히 작위적이란 인상이다. 로드무비 류의 다큐멘터리라고 보기에, 《경상도》에서 모든 인물은 서로간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 구도를 십분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극 바깥에서 합의된 것으로, 극 안에서 인물은 회차가 진행되더라도 마치 이런 설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해소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다시 말해, 이용주의 경상도 호소에 다른 출연자는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주면서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데 이는 다분히 의도된 것이다--상식적이게도 이용주가 정말로 현실에서 바퀴벌레의 경상도말이 바쿠쌉꿀마로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 이유 때문에 《경상도》는 비록 다큐멘터리의 외양을 하고 있더라도 한없이 시트콤에 가까워진다. 관례적으로, 시트콤의 전개는 결함 있는 인물이 등장하고, 곤란한 상황이 주어지면서 인물이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좌충우돌 무언가를 시도하지만 그럴수록 상황은 악화되고 결국 그 상황은 그 인물이 가진 한계를 넘지 못하고 종결되며, 같은 문제가 같은 인물에게 다른 상황이 주어지며 그때마다 인물은 전 회차와 비슷하게 고통 받고 비슷하게 해결된다.4)
 《경상도》도 대략 그랬다. 여기까지가 초기 설정.

설정 붕괴가 시작되고..

이용주의 우기기가 좀 지겨워질 때쯤, 김민수가 이를테면, 갑자기 말이 많아진다. 극 중에서 이용주는 김민수가 컨텐츠가 망할 것 같아서 심드렁했다가 슬슬 주목 받으니 태도가 바뀌었다고 지적한다. 어쨌든지간에 김민수도 이용주만큼 웃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선 경상도 호소인인 이용주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그 설정에 경상도 자부심이 피 속에 녹아 혈관을 타고 흐르는 찐 경상도 싸나이 설정을 여기에 덧붙인다--시끄럽게 오버하는 경상도인의 전형적인 모델은 강호동에 가깝다. 김민수는 이제 이용주를 무시하거나 냉소하는 차원을 넘어서 진짜 경상도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어하기도 하는데--예를 들어 “내 한 마디만 해도 돼요?”를 시끄럽게 반복해 외치는 대사--이로써 이용주의 결함이 웃음의 핵심이었던 초기 설정은 애매해지거나 최소한 복잡해졌다. 거듭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에서 만약 웃음이 열등한 악인의 모방에서 나온다면 말이다.

하나의 열등함은 주지하다시피 불완전한 경상도인 그 자체에서 나온다. 하지만 다른 하나의 열등함은 경상도의 지나친 과잉에서부터 출현하는 것 같다. 이 인물의 성격, 그러니까 여기서 모방하는 경상도 남자는 독선적이고 목소리 크고, 자존심과 고집은 세고, 항상 진심을 남발하는 진정성주의자로, 오늘날 감각에서 별다른 설명 하지 않아도 ‘꼰대’라고 일축될만한 하다.  이런 구도 속에서 이용주는 김민수에 비해서 정상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이용주는 꼰대의 시뮬라크르이지만 김민수는 꼰대의 이데아이기 때문이다.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은, 《경상도》 김민수의 성격은 이미 <한사랑산악회>에서 김영남이란 인물에서 시험된 적 있으며, 《경상도》 본편에서도 나오는 바이지만. 실은 그의 아버지 김성왕씨로부터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그러니까 《경상도》의 김민수는 여전히 현실의 김민수는 아닌 어떤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모방이다.)

다른 한편에서 정재형도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용주에게 무시당하고 컨텐츠 자체, 즉 세계관으로부터 생략당하기 일쑤였던 정재형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대구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오히려 이용주보다 김민수와 티키타카를 시전한다. 한쪽에서는 정재형이 순수 서울 혈통의 샌님인데, 다른 한쪽에서는 대구 출신 부모로부터 엘리트 경상도 말 교육을 받은 수재이다. 실로, 정재형은 이용주 초기 설정을 업그레이드한다. 억지 주장이 억지가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로 더욱 능란하게 구현해내는 것이다--정재형은 서울 출신이지만 사투리를 그정도까지 하는 것 보면 이미 쏘울은 대구 맞다 같은. 여기에 이용주가 낄 자리가 없으며 이쯤에서 점점 더 초기 설정--경상도 호소--을 지켜나갈 의지를 잃어버리는 듯하다. 극중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여러번 지적되듯이, 이제부터 이용주는 서울말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을 자주 까먹기 시작한다.

이런 설정 붕괴 속에서 김민수와 정재형은 이용주가 용인(수지)과 호주 출신이라는 것을 《경상도》에서 공식화한다. 이용주는 이제 억지주장을 ‘호소’하지 않는다. 다만 김민수에게 경상도인임을 ‘증명’해야 한다. 다른 한편에서, 이용주는 정재형이 더욱 완벽하게 모방해한다는 점에서 이제 경상도인인 척 하기 힘들지만, 서울 사람 아닌 척 하기도 힘들다. 이용주의 역할이 미묘하게 바뀐다. 이제 웃음 포인트는 ‘경상도 호소인’이 아니라 경상도 사투리를 따라하는 서울 사람에게 찐 경상도 바이브를 알려주는 ‘경상도 자처인’--김민수--에게 넘어갔다. 지금까지 논의에서 이 순간은 매우 중요한데, 비로소 이용주의 본모습에 가까운 무엇이 등장하기 때문이다--서울 남자. 

여기까지 따라 왔다면, 《경상도》에서 이용주가 서울사람화 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아슬아슬하지만, 김민수와 정재형이 웃기려면 이용주가 서울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밖의 선택지가 없었으리라는 점도 함께 이해하리라 믿는다. 이제 영양까지 오고 나면 이들 모두 진정한 경상도 남자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이제 《경상도》에서 이들에게 중요한 것이 ‘진정한 경상도 추구’가 아닌 것이다. 이용주는 경상도 호소를 거의 포기한 반면, 김민수는 경상도 꼰대 아재라는 구시대 유물을 뒤쫒는다. 정재형이 경상도 연기를 잘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서울 출신임에도’란 단서 속에서 흥미롭다.

경상도 없는 영양

돌아가서, 《경상도》의 출발은 경상도 스테레오타입의 인물을 연기해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 주지하다시피 <한사랑산악회>의 김영남 같은 인물에서 이미 시험된 바가 있다. 김영남을 연기한 김민수는 경상도 바이브를 연기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용주는 그렇게 할 수 없었기에 ‘경상도 호소인’이 되었다. 경상도 호소인이란 말을 마음만은 진정한 경상도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일 수도 있다. 이용주가 극중에서 흉내내고 있는 부산 남자의 특징이 약간의 힌트를 주는데, 예를 들어 목소리가 크고 통이 크고 무대뽀 기질이 있으며 등등.. 이용주가 흉내내는 건 진짜 싸나이, 부싼 싸나이, 남성적 카테고리의 전형으로, 현실의 경상도 남자라기보다는 미디어에서, 그러니까 <친구> 같은 영화가 재현하는 부산 조폭의 이미지와 더욱 닮았다.

아마도 레이 초우(Ray Chow) 같은 비교문학자는 《경상도》의 이용주가 매혹된 야만적 이미지를 원시적인 것(the primitive)이라고 부를 것이다. “서양 모더니즘이라는 형식의 발명이 비서양의 땅과 사람들을 계속해서 원시화한다는 것(primitivization)과 표리일체를 이룬다.”5) 잘 알다시피 피카소, 세잔, 고갱, 마티스 등 모더니스트 화가가 원시적인 것을 가지고 서구 모더니즘을 ‘발명’하는 것과 타자가 원시화하여 ‘원료’로 사용되는 것은 등가교환된다. 만약 그렇다면, 《경상도》에서 이용주의 경상도인 호소, 억지 주장은 진정한-경상도인-추구를 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경상도는 나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여가의 장소, 바꿔 말하면 바로 그 장소, 경상도인을 호소하면 할 수록 역설적으로 내가 서울 사람으로 있을 수 있는 바로 그 우월감에 매혹된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경상도》의 이용주는 너무나 서울 사람에 가깝거나 너무나 경상도 사람으로부터 멀다.

그러고 보면, 《경상도》는 출발부터 아슬아슬한 코미디였다. 이용주란 인물이 가진 가장 본질적인 문제, 중심의 우월성은, 최소한 초반 설정에서는, 지방--김민수--에 의해 안에서부터 견제되었다. 하지만 김민수가 인물의 정체성을 꼰대--경상도 사람도 싫어하는 경상도 사람--로 전환하면서 구성적 대립이 극 내부에서 사라졌다. 그럼 어디로 갔을까? 실제 영양 사람들로 향하지 않았을까? <영양편>을 보면 3인조의 정제되지 않은 웃기지도 않은 말을 무리하게 해댄다. “할매 살 뜯는 맛” “부대찌개 같은 맛” 등등. 이들이 자신들의 말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몰랐을까? 그럴리가 없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들은 이 시퀀스가 괜찮다고 보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웃음은 상식보다 더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구봉서는 1997년의 자서전에서 “사람들은 배삼룡이 바보스러운 말을 하는 걸 보며 우월감을 느꼈다”고 썼다.6) 코미디언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바보를 자처해 왔다. 《경상도》의 3인조 역시 경상도 사투리라고 괴상한 말을 우기거나 이제 사장된 경상도 꼰대들의 습관적인 어투를 따라하며 그렇게 했다. 여기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영양편>에서도, 3인조는 자신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 같다. 그 예상은 적중했다. 다만 그것이 미적 가상 안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우스꽝스러움을 알아봐주는 역할이 이미 내부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역할을 《경상도》는 피사체에게 넘겼다. 하지만 최소한 극 안에서는 그들은 반격하지 못했다--얼어붙었을 뿐이다. 잘 알다시피 <영양 편>은 외부의 강력한 비판을 맞고 소위 ‘나락’의 문턱까지 갔다. 혼쭐이 난 나쁜 아이들은 이제 마음을 고쳐 먹고 거의 공익 광고 모델처럼 영양을 홍보하기에 나섰다. 내가 피식대학을 보지 않게 된 시점이 여기서부터였던 것 같다. 

지켜야할 선과 코미디의 운명

몇 가지 남은 딜레마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전설적인 꽁트인 <봉숭아 학당>에는 손가락으로 배트맨 흉내를 내는 맹구라는 인물이 나온다. 돌이켜 보면 맹구는 뇌병변 장애인을 흉내낸 것이고 오늘날 같았으면 장애인 비하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중요하게도 웃기는 건 고사하고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그 시절 우리는 맹구가 손을 쳐들며 등장하길 기다렸고 그를 보고 웃었고 대개 여기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현재의 관점에서, 맹구를 약자의 반윤리적인 재현으로 평가해야할까? 아니면 역사적 한계라는 박스에 갇혔을 뿐이라는 변명거리라도 만들어줘야 할까? 오늘날의 시청자는 과거보다 윤리적으로 우월한가? 맹구를 보고 웃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시대에 태어난 운이 좋은 공모자였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때도 지금처럼 맹구를 비판했어야 더욱 옳았을까? 

누가 맹구의 배트맨을 흉내내면 다들 하나 둘씩 따라서 배트맨을 외치며 흉내내면서 놀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본다. 그 시절 학급에는 으레 장애인이 한 두명씩 있었고 자주 (선생님 포함해) 누군가에게 놀림감이 되기도 했고, 물론 그건 큰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일을 방지하기위해 그를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당시엔 오늘날 같은 윤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필요 없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때 장애는 결함이기도 했지만, 그냥 딱 그정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크게 주목할 필요 없는 특징이기도 했다.7) 한편 주호민 사건을 통해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장애 가족은 자식이 일반학급에서 공부하는 걸 간절히 원하는 반면, 비장애가족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현실이다.8) 그렇다면 오늘날 장애 가족이 간절히 바라는 학급의 모델은 역설적이게도 봉숭아 학당이 더욱 가까울 수도 있다. 

<영양 편> 같은 일이 벌어지면 많은 사람들은 ‘가장 큰 문제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하곤 한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패한 농담의 미래가 처벌이라면 누가 죽자고 농담을 할까? 혹은 역설적이게도 이 시대 농담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비장한 일이라도 된 걸까? 움베르트 에코(Umbert Eco)는 「텔레비전에서 동네의 바보를 알아보는 방법」이란 에세이에서 오늘날의 가능한 코미디가 무엇인지 검토한다. 그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코미디는 “불구자나 소경, 말더듬이, 난쟁이, 뚱뚱보, 백치, 일탈자, 평판이 나쁜 직업, 열등 민족으로 간주된 겨레,” 즉 답도 없이 열등한 것을 흉내내며 사람들을 웃겼다.9) 하지만 오늘날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에서 그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에코는 이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옛날에는 마음 놓고 노예를 비웃는 데서 주인임이 인정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마치 노예들만이 주인을 조롱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10) 하지만 에코가 지적했듯 ‘권력을 비판하는 바보’는 정의로울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전복적일 수 없다는 점에서 웃기기보단 처량해진다. 에코가 보기에 현대사회가 찾아낸 “정치적으로 올바른” 웃음을 위한 해결책은 멍청하고 때로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노출증 환자를 찾아 직접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관객은, 정의의 편에서, 안심하고 저 멍청함을 비웃을 수 있다. 멍청함을 자처하는 조회수에 목마른 유튜버. 조건은 이미 갖추어져 있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영양 편> 이후 대중적 분노에 발빠르게 화답한 공권력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영양군수는 《매일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피식대학을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경상북도에서도 “대응 매뉴얼”을 마련하겠다고 했다.11) 많은 뉴스가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JTBC》는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의 지역 비하 발언”이라고 일찌감치 헤드라인을 잡고 몇 차례 후속 기사를 썼다.12) 박명수는 KBS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코미디언이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13) 마치 온 나라가 피식대학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 보였다고 하면 과언일까? 10여년 전 박정근씨는 북한 찬양 게시물을 리트윗하여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이란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받아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여기에 대해 법학자 홍성수는 한 칼럼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사회계약’을 통해 농담할 자유, 그걸 보고 웃을 자유, 그리고 하나도 안 웃기다고 비판할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실패한 농담에 대해 형벌권을 발동할 권한을 국가에 부여한 적은 없다”고 썼다.14) <영양 편>을 보자면, 피식대학 역시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든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실질적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오히려 빵집은 매진되었으며 영양이란 도시가 실존한다는 것을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최소한 <영양 편> 이후의 전개 양상에서 실제로 작동한 것은 홍성수가 말한 “비판할 자유”보다는 “형벌권을 발동할 권한”에 가깝다. 영양군수와 경상북도는 연예인 잡것에 분노하며 복수를 다짐하는 듯 보였고, 이는 마치 오노 요코(Ono Yoko)의 <조금씩 잘라내기(Cut Piece)>에서 그랬듯이, 좋아요를 하나씩 감질나게 빼고 있던 그들에게 매우 묵직한 -1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감히 “비판의 자유” 따위가 진짜로 어디에 있을까? 대신, 그보다 앞서, 실질적인 처벌, 즉 연예인 경력과 생계를 쥐었다 펴는 나락/극락 보내기가 이미 이루어졌다. 떠오르는 비유가 애니메이션이라서 미안한데, <페이트>에 등장하는 쿠훌린이란 랜서가 가진 '찔러 뚫는 죽음의 가시 창'은 상대의 심장에 명중했다고 하는 결과 뒤에, 창을 상대에게 던지는 원인을 끌어내는 인과역전 회피불가의 필살 보구이다. 내게는 나락이란 게 그렇게 보인다. 일단 먼저 죽여 놓고 이유는 나중에 있던지 말던지다. <영양 편> 이전에도 이후에도 시청자는 영양이 뭔지라던지 관심이 별로 없을 것이며, 지방소멸은 북극곰이나 팽귄의 소멸과 비슷한 느낌으로 들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양 편> 이전이나 이후나 영양군수는 잘먹고 잘 살 것이다. 피식대학은 재미없으면 안 보면 된다. 어짜피 좋아요 하나 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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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진구 기자, 「'기세등등' 조국... 고향 부산 찾아 尹 겨냥 "이제 고마 치아라 마"」, 《한국일보》, 2024 3. 21.,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32110330000050, (접근: 2024. 11. 28.)

2)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2004), 31, 43쪽.

3) 이로부터 정재형 왕따설이 불거져 나왔는데, 《경상도》는 000 에피소드에서 이를 곧장 컨텐츠화 했다.

4) 주창윤, 「로맨틱 시트콤의 장르관습과 미학: 남자셋 여자셋을 중심으로」, 『한국언론학보』, 43, 1999, pp. 17-18.

5) 레이 초우, 『원시적 열정』, 정재서 역, (이산, 2004). 42쪽.

6) 양지호 기자, 「“웃기 떄문에 행복한 거예요. 웃어야 복이 오는 거예요.”」, 《조선일보》, 2016. 8. 29.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29/2016082900581.html, (접근: 2024. 11. 28.)

7) 다음 글에서 묘사하는 80년대 상황을 읽어 볼 것. 장우원, 「'장애'가 불편하지 않는 세상」, 《은평시민신문》, 2019. 11. 25., https://www.e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7293, (접근: 2024. 12. 5.)이는 장애를 특별하게 대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역설적이다.

8) 김세훈 기자, 「주호민 자녀 전학 배경에 “장애인 많아진다” 민원 있었다」, 《경향신문》, 2023. 8. 14. https://www.khan.co.kr/article/202308131810001, (접근: 2024. 12. 5.)

9) 움베르트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이세욱 역, (열린책들, 2009,) 이후 인용은 모두 여기.

10) 이런 관점의 기사로는 다음을 볼 것. 박돈규 기자, 「영구 50년, 바보 캐릭터 다시 볼 수 있을까」, 《조선일보》, 2021. 10. 13.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1/10/13/G6ABD5X2KZGNNOYHES2ZOAIVLE/, (접근: 2024. 12. 5.) 하지만 에코가 지적했듯 ‘권력을 비판하는 바보’는 정의로울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전복적일 수 없다는 점에서 웃기기보단 처량해진다.

11)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 영양 비하 발언 논란… 경북도 "대응 매뉴얼 만들 것"」, 《매일신문》, 2024. 5. 16. https://imaeil.com/page/view/2024051618134546056, (접근: 2024. 11. 28.).

12) 「피식대학 지역 비하 '시끌'…해당 업주도 "조금 무례했지요" [소셜픽]」, 2024. 5. 17., https://news.jtbc.co.kr/article/NB12196564?influxDiv=JTBC, (접근: 2024. 11. 28.)

13) 「박명수, 피식대학 일침 "지켜야 하는 선 있어"」, 《뉴시스》, 2024. 5. 27. https://www.newsis.com/view/?id=NISX20240527_0002748966, (접근: 2024. 11. 28.).

14) 홍성수, 「[세상 읽기] ‘실패한 농담’까지 처벌해서야」, 《한겨레》, 2012. 11. 25.,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2210.html, (접근: 2024. 11. 28.).

《퐁》에 실렸음.

2024년 12월 4일 수요일

해프닝

해프닝은 보통 아무 일도 아닌 우발적으로 어그로 끈 일로 이해된다. 해프닝은 미술의 용어이기도 하다. 비슷한 의미이긴 하다. 하지만 어제밤 계엄령이 계속 이어졌다면? 오늘 계엄령은 윤대통령의 해프닝이 아니었을 것이다. 큰 사고와 해프닝은 한끗차이다. 그렇기 때문에 큰 사고가 해프닝이 되어야 하는 만큼 해프닝 역시 큰 사고의 예방이라고 봐야함이 마땅하다. 그러니까 416이 해프닝이었다면? 이태원이 해프닝이었다면? 같은 접근이 가능할까..

망동

생동도 있고 충동도 있고 정동도 있는데 윤석열 정부를 보니 0동 클럽에 망동도 하나 끼워 넣어야 겠다.

흔히 하는 말. 강호의 도의는 땅에 떨어졌다. 이제부턴 개와 늑대의 시간.

2024년 10월 23일 수요일

어떤 변화

미술을 하다 보면 처음엔 마르크스주의자, 그 다음엔 자유주의자, 마지막엔 아나키스트가 되는 것 같다.

2024년 10월 10일 목요일

컨아밈의 세계

2024년 8월 25일 자 《퐁》의 익명게시판, 아고라에 피드가 올라왔다. “입시하면서부터 컨아밈을 보면서 자란 애들은 뭐가 될까.”1) 입시생과 컨템퍼러리 아트? 살면서 거의 생각해 본 적 없는 조합이라 흥미로웠던 것도 사실이다. 한갓 어그로 끄는 인스타그램 계정 comtemporary_arts_meme(이하 컨아밈)이 끼치는 영향 때문에 미술 꿈나무를 걱정할 수도 있구나. 왜? 연이은 피드에서 슬쩍 대답이 나오는데, “냉소주의자”, 그리고 “냉소주”란 드립이었다.2) 며칠 뒤 컨아밈을 닉네임으로 쓰는 누군가는 “똥”이라고 했다. 《퐁》이 미술전문 비평 매체임을 감안하면, 이 모든 피드가 미술계 사람들로부터 나왔을 확률이 높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컨아밈이 대체 뭐길래 입시생도 보고 자라며, 대체 뭘 하고 있길래 미술계 사람들이 불편한 기색을 보일까? 그럼에도 팔로워 수 4만이면 동시대미술 계정 중에선 대기업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묻자면, 오늘날 컨아밈을 그렇게 색다르고 그렇게 매력적으로 만드는 건 무엇일까?

이게 바로 현실

컨아밈이 즐겨 다루는 소재를 하나만 꼽아 보자. 예술가. 이 방식은 매우 가혹하기 그지없다. 지피(GIPHY) 같은 해외 밈 사이트에서 퍼온 밈에다가 캡션을 붙이는 식으로 만드는 짤에서, 대다수 예술가는 자신의 현실적 무능은 부인하면서, 매우 높은 이상적 자아(ego-ideal)만을 추구하지만, 그럴수록 현실은 악화하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주제파악 못해서 자신과 주변을 모두 파괴시키는 안타까운 유형의 주체로 재현된다.3) 예를 들어 한 짤에서는 소녀가 귀엽게 표정으로 능수능란하게 정면을 보며 마치 파인다이닝의 서버처럼 한 손으로 주전자(“내가 한 작업”)를 높이 들어 다른 손으로 든 찻잔(“당대의 예술쟁점을 아우르며 숭고한 목표에 도달하기”)에 차를 붇지만 과녁이 빗나가서 땅으로 떨어진다(“사람들이 내 정신 건강을 걱정하게 만들기”).[도판1] 어느 골퍼가 물가에 잘못 떨어진 공(“당신의 작업”)을 구해내기 위해 스스로 물에 들어가 신중하게 샷을 날리지만 그 공은 휘어서 도리어 호수 한가운데에 빠진다(“당신의 삶”).[도판2] 예술가는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또한 작업과 별 상관없는 철학적 개념과 언어”를 스테이트먼트에 마구 때려 부어 라떼 잔을 넘치게 만들며, 두더지잡기 게임에서 짧은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소시지를 좀처럼 입에 물지 못해 안달 난 시바처럼 공립레지던시, 창작지원금, 예술인파견지원사업 선정에 실패하고 화를 내는 소인배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4) 어찌 보면 컨아밈은 마치 메시아나 선지자와 같은 위치에 선다. 설명하지 않고 그냥 그런 거라고 제시할 뿐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짤이 “Based on true story”라는 댓글로 자주 증명하듯, (그리고 때때로 “철저히 허구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같은 과장된 문구로 넌지시 시사하듯,) 누구나 알고 있다고 가정되는 현실,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기반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미술계 썰’인 것이다. 사람들은 왜 썰에 매혹될까? 사실 대부분의 썰은 서점의 어떤 소설을 하나 골라잡아 비교해 보더라도 탄탄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거나 생각하지 못한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썰에 솔깃하다면 그 이유는 철저히 사실 기반의 경험담이라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판춘문예 같은 말로 곧장 반증할 수 있다. 조회수를 노린 지어낸 이야기란 의미의 판춘문예는 그것이 소설로 밝혀질 경우 낚여서 실망했다는 반응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니까.5)

아무튼, 그럼에도, 컨아밈이 판춘문예에서 완전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여러 차용된 이미지와 알레고리, 이미지의 관계 속에서 사실은 열화되거나 부풀려지고 그 의미는 어떤 요소를 주목하느냐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 특유의 반의적 표현 때문에 어떤 피드가 누군가를 조롱할 때도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순수한 조롱인지 조롱의 스테레오타입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인지도 엄밀히 말하면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컨아밈의 썰은 미술계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직접 경험하고 수집한 일종의 에스노그래피(ethnography)이면서도 어떤 주관적이고 허구적인 성질을 띄는, 말 그대로 썰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과 허구의 결합은 자주 컨아밈을 모순적인 자리에 가져다 놓지만, W. G. 제발트의 『이민자들』 같은 에스노그라피적 문학에서 진지하게 실험된 적도 있다. 『이민자들』이 독특한 점은 소설 자체가 가지고 있는 허구적 특성을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역사에서 살아남은 개인의 디아스포라적 삶을 관찰하고 수집한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라는 점을 일인칭 화자와 각종 사진을 통해서 독자에게 끊임없이 소구하고 있다는 점이다.6) 허구든 사실이든 쨌든 모르겠고 ‘이게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Based on true story”와 “철저히 허구를 바탕으로 했습니다”가 겹쳐진다.

아트 스쿨 컨피덴셜

대체 원래도 매우 취약한 미술계의 좋지 않은 모습을 굳이, 심지어 양념을 쳐 부풀리는 식으로 ‘미술계 현실은 시궁창’을 소구할 긴급한 이유가 있을까? 거듭,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처음 《퐁》의 피드로 돌아가서, 컨아밈을 누가 보는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컨아밈이 천기누설하는 미술계 현시창은 은폐된 비밀이 전혀 아니며, 사실은, 그럼에도 그것이 미술을 하거나 그만두는 이유가 아니기 때문에 존치되는 이상-지향 커뮤니티가 바로 미술계이기 때문이다. 미술계 안으로부터 나오는 반응이 “냉소주의”인 것은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7)

사실 컨아밈은 2022년 10월 16일 출발했지만 처음부터 4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계정은 아니었고 호응이 좋은 편도 아니었으며 자주 게시물을 올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대개 1에서 30개 사이를 오가던 좋아요 수가 급격하게 늘기 시작한 시점은 대략 2023년 5월. 예대 1학년 선호 예술가 3대장이란 제목의 밈은 황소윤, 자비에 돌란, 고 버질 아블로 같은 힙스터를 내세워 좋아요 385개를 기록한다. 다음 회화과와 디자인과를 비교하는 피드가 좋아요 94개 기록. 며칠 뒤 컨아밈은 인서울 주요 미술대학 짤을 올린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한예종은 술만 마시고 홍익대는 그 자체로 폐허이며 서울대의 급을 단과별로 나누면 미대는 꼬마 급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홍대가 186개로 상대적으로 많은 좋아요 수치를 기록했다. 6월 1일, “미대를 졸업한 다음 주로 뭘 하나요?”라는 밈은 1932개, “예대입학 그리고 졸업”이란 제목의 원숭이가 졸업장 받은 사진과 5천만 원이란 캡션은 993개로 다른 피드 대비 압도적인 수치를 보였다. (이 모든 피드는 미술계 내 관계자라면 언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알려진’ 스테레오타입이다.)

물론 컨아밈의 전체 피드에서 미대생 컨텐츠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고 할 순 없지만 미대생이란 지표를 의식하면서 피드 전체를 다시 살펴보면 대개 컨아밈은 예비작가나 젊은 예술가의 현실적인 상황을 자조 섞인 뉘앙스로 다루고 있으며, 2023년 8월쯤 시작한 컨아밈 상담소의 질문과 답을 보면 독자는 미술에 관심 있는 비전공자까지를 독자 범위로 쉬이 상정할 수 있다. 컨아밈의 독자는 어떠한 이유로든 미술 제도를 향한 접근성이 취약한 주체다. 이 독자를 편의상 지금부터 예붕이라고 부르자. 정리하자면 컨아밈은 예붕이에게 ‘이게 현시창이야, 도망치려면 지금’이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보면 《퐁》의 첫 번째 아고라 피드가 입시생을 거론한 건 매우 일리가 있다. 그래서, 컨아밈이 단순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마냥 미술계 뒷담을 잘 모르는 미술계 밖에다 대고 하고 있다고만은 볼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컨아밈이 하고 있는 일은, 다름 아닌 예비작가를 향한 조언, 멘토링이다.

참 스승을 기다리며

2023년 8월 31일 컨아밈은 “반응이 생각보다 좋아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상담소를 열어보겠습니다?”란 멘트와 함께 ‘컨아밈 상담소’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 후 가장 열의를 다해 하고 있는 것이 상담소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문답 대부분의 특징은 질문에 질문으로 맞대응하면서 실상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질문자 자신 안에 있는 문제로 가두는 데 주저함이 없다. 예컨대 “무슨 작업 하시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요..”란 질문에, 컨아밈은 “말만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면 우리는 대체 왜 작업을 해야 하죠?”라는 말로 맞받아친다. “사진 예술이 계속될 수 있을까요?” 지젝의 얼굴에 말풍선을 달고 “응 그건 자네 손에 달렸네”라고 한다. “항상 심오하고 깊은 주제를 생각하면서 작업해도 항상 엉성하고 조잡한 것 같아요”란 질문에 “미대생들은 기억하세요. 만듦새가 엉성하다고 해서 당신의 주제가 심오해지거나 당신을 지적으로 보이게 하지 않습니다”라고 반대로 답한다.[도판3]

이렇게 보면, 젊었을 때 고생하면 다 성공할 수 있다는 유명한 거짓말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부터, 2010년 1월 《퍼블릭아트》에 게재되어 (컨아밈을 포함해) 아직까지 영향력을 암암리에 끼치고 있는 임근준의 「대학졸업을 앞둔 예비작가에게」를 지나, 세상 탓하기 전에 방구석부터 치우라고 해 얼트 라이트의 열화같은 지지를 받았던 조던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멘토링 담론이 기반하는 자기의 테크놀로지를 컨아밈도 따르는 것 같다. 심지어 ”흙수저도 아닌 아예 수저가 없는 학생입니다. 저에게 미술의 꿈은 어렵겠죠? 진지하지만 조언 짤로 부탁드려요“란 무거운 질문에는 ”그만할라 했는데 이거만 대답해 줄게 친구야. 일단 생계부터 어떻게 해봐. 미술엔 은퇴가 없어 나도 마흔 살 넘어서 시작했어”라고 성심성의껏 답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개인의 현실적인 노력, 그러니까 ‘자기 생존’에 방점이 찍힌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로 이해된다.

다양한 멘토 담론이 비판받았던 지점은, ‘라떼는..’이란 꼰대의 습관적 훈계에 대한 조롱을 담은 말이 있듯이, 대략 출발선이 달랐던, 어찌 보면 운이 좋아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이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인 청년에게 일방적으로 하는 실효성 없는 조언이었기 때문이다. 살펴봤듯이, 컨아밈의 피드가 경험담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상 라떼는 담론으로부터 피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컨아밈은 전 세대 멘토에 비해서 위로나 희망을 논하지도 않는 대신, 악으로 깡으로 견디거나 그만두라고, 어쨌거나 현시창이란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놀리는 것 같다는 점에서 더욱 악질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컨아밈 스스로도 그것을 당당하게 숨기지 않는다. “컨아밈 상담소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무료입니다. 여전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무료입니다.”[도판4] 왜 그런 컨아밈에게 예붕이들은 질문하려는 것일까?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지 뻔히 아는 데도? 

소결: 공허함이 말해주는 것

컨아밈이 기존의 멘토와 조금 다르다면, 관찰자의 자리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실로 컨아밈은 익명성 뒤에 숨어서 자신을 감추려는 노력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컨아밈 계정의 주인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검색하면 바로 알 수 있으며, 자신이 누구와 친한지, 어떤 사람과 결혼했는지, 얼마나 가난한지,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 안에 놓여 있는지, 얼마만큼 실패했는지에 관하여 겁도 없이 썰을 푼다. 그러니까 컨아밈은 자신이 봇이 아니라 현시창을 맛보고 있는 살아 있는 한 예술가이자 과도한 이상적 자아를 소유한 어쩔 수 없는 관종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컨아밈의 썰은 그래서 다른 게 아니라 컨아밈이란 계정을 쓰는 결함 있는 범박한 한 예술가가 살아온 방식이며, 그 예술가가 보는 미술계이며, 그 예술가 가지고 있는 예술관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정치적 미술이나 공공미술에 대한 편견을 근거 없이 드러낼 때도, 때때로 기금을 향한 무조건적인 적의를 보일 때도, 때때로 소수자 스테레오타입을 무성의하게 희화할 때에도, 철학자를 인용하는 예술가를 조롱하면서도 자신의 인용구가 틀렸음이 탄로 날 때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어떤 큰 진리를 여기서 얻을 수 있겠는가?

컨아밈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약속하면서도 질문하라고 하고, 예붕이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에 기뻐한다. 이들의 약속대련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익히 아는 멘토-멘티 담론의 파산을 나름대로 조롱하면서 도파민을 즐기는 커뮤니티 안의 오락인 것 같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먼저 태어난 사람, 선생이 살아오면서 얻은 지혜는 후대 세대에게 정말로 불필요한 것일까? 혹시 목욕물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린 것은 아닐까?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볼거리는 엄기호의 조금은 철 지난 『단속사회』에 잘 나온다. 그는 10여 년 전에 생존을 위해 각개전투하고 있는 청년을 걱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삶의 실제적 경험으로부터 조언과 충고가 나온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나와 다름 경험이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망이 필요하다. 우리보다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한 사람으로부터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 사회는 망한 사회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 사회가 ‘사회’일 수 있는 것은 연속성을 갖췄기 때문이다. 연속성을 지녔다는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경험과 지혜가 끊임없이 갱신되면서 후대들에게 전승될 수 있음을 뜻한다.”8)


한편 내용 없는 형식의 공허한 반복은 멘토와 멘티가 동시에 사라졌다는 강력한 트라우마에 대한 병리학적 반응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컨아밈은 단순히 약속대련의 상대가 아니라 정말로 멘토의 자리를 대신 하는 대상으로 상상된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게 농담만은 아닌 게, 2024년 4월 10일 컨아밈은 건국대학교 현대미술과 학생을 위해 컨아밈 상담소를 열었다. 디지털워크숍1 수업에 대한 특강 요청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가장 보수적인 교육 개념을 가진 대학에서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소문난 컨아밈 상담소를 특강에 호출한 이런 기막힌 사연은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불길한 위기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지점에서 컨아밈의 상담소는 멘토-멘티 담론을 조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공허는, 현시창을 살아가는 예붕이들을 위한 진정한 선생의 출현을 긴급히 요구하는 다잉 메시지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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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퐁》, 2024. 8. 25., https://pong.pub/agora/ (접근: 2024. 10. 5.)
2) 《퐁》의 아고라는 댓글이나 트위터의 리트윗 기능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이 반응이 정확히 #60에 대한 것인지는 엄밀히 말하자면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맥락상 댓글에 해당한다고 본다. 위의 페이지.
3) 컨아밈의 게시물은 엄밀히 말해서 밈이라고 할 수 없다. 박상권의 연구에 따르면, 인터넷 밈이 하나의 집합이자 현상이라면, 짤은 밈이 되지 못한 하나의 단일 컨텐츠다. 컨아밈은 인터넷 밈을 개작한 단일한 온라인 시각물, 그러니까 짤이라고 파악하는 것이 온당하다. 박상권, 「밈, 바이럴, 패러디, 짤과의 비교를 통한 인터넷 밈의 개념적 고찰」, 『상품문화디자인학연구』, 72, 2023, p. 179.
4) 누가복음 23장 34절
5) 송혜진, 「오늘도 당신은 '판춘문예'에 낚이셨나요?」, 《조선일보》, 2017. 1. 14.,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1/13/2017011301535.html (접근: 2024. 10. 9.)
6) 이렇게 에스노그라피가 문학화하는 이유는 사회과학적 관찰자의 시각이 절대로 어떤 집단과 문화의 특징을 객관적으로 기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포스트모던 에스노그라피는 고전적 에스노그라피에서 전제하는 여러 불평등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윤희, 「에스노그래피로서의 문학의 가능성」, 『독일어문학』, 제88집, 2020, p. 144, 161를 볼 것.
7) 이 대목은 김영하와 조영일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이 논쟁은 문학 지망생을 향한 조언으로부터 시작해 예술가 주체에 대한 상반된 견해로 확장했는데, 요약하자면 김영하는 예술가를 자율적 주체로 본 반면, 조영일은 사회적 존재라고 했다. 본문에서 말하는 미술계 내부 커뮤니티, 즉 이상-지향 커뮤니티는 현시창인줄 알면서도 그것을 초월한 삶을 살기로 자기 결정했다는 의미에서 김영하의 예술가론과 가깝다. 곽영신, 「작가가 굶어죽는 사회의 작가론」, 《오마이뉴스》, 2011. 2. 16.,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24158 (접근: 2024. 10. 15.)
8) 엄기호, 『단속사회』, 창비, 2014, p. 20.

2024.10.10.
안대웅 
주부

2024년 9월 2일 월요일

표현의 자유 메모

1) 어떤 표현에서 내가 무엇을 표현할 자유가 있다 2) 이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에서 '무엇'이 확실시 가정 된다. 1)에서는 내가 표현한 확실한 무엇이 있다. 2)에서는 표현된 무엇이 있다. 

1) 여기서 '무엇'은 표현한 사람의 의도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때 표현할 대상은 그것이 아직 표현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표현한 사람의 마음 속에 이미 있다. 이 마음속에 있는 표현 할 대상은 얼마만큼 확실시되는가? 이는 공히 주관의 영역이다. 그리고 주관/주체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바, 표현한 사람 스스로도 알 수 없다.

2) 표현된 무엇이 있다는 건 객관의 세계이다. 이 객관화된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은 마치 표현 '전'에 무엇이 먼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마치 바위가 사람보다 먼저 존재한 것처럼) 이 경우 사물이란 해독되어야 하는 원인 불명의 사태이며, 즉슨, 표현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단 뜻이 된다.

표현한 무엇, 표현된 무엇은 어떤 경우에도 명확한 실체를 포착하기 힘들다는 엉터리 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