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토머스 크로우와 다른 이들이 주장했듯이, 그것들의 거대함(magnitude)을 아마도 제외한다면, 시각문화와 연관된 이런 변환은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형식적 분석, 예술가의 오브제, 전통적 미디어와 예술적 생산품으로부터 빠져나와, 그리고 상업적 인공물과 새로운 테크놀로지, 미적 소비에 관한 문화적 혹은 담론적 분석로 지향하는, 강조점에 대한 변화가 있다. 다른 말로, 시각문화와 미술사는 구성적 이분법 안에서 서로 간의 타자(Other)로서 상호간을 대우한다. 그것의 필드의 분할은 상호간의 가치의 양극성(polarities)이 역전된 것처럼 존속된다. 내 관점에서, 더욱 초미의 과제는─이제 몹시 놀랍게도 인공적인─경계선 그 자체다. 그것은 미술사와 시각문화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상업적인 것과 순수미술 사이에서도 익사하고 또 익사한다. 간단하게 적자면, 시각문화는 종종 상업적인 미술의 미술사에 다름 아니게 된다. 상업적인 것과 순수미술 사이의 인접성(adjacency)과 미끄러짐(slippages)은 확실히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예를 들어, 중세적 길드 혹은 위대한 유러피언 아카데미의 상업적 차원에 대한 생각은 다이렉트하게 모더니즘보다 먼저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20세기 후반에 다른 스케일로 성취됐다. 이 시기 동안, 미국의 정치와 언론(public speech)은 전례없는 단계(degree)의 시각적인 것으로 들어섰다. 시각적인 것 그 자체가, 여러가지 중에서도 광역적으로 급등하는 텔레비젼 보급을 통해, 공격적으로 상업화되고 광범위하게 자본화되는 와중에 말이다.미술사와 시각문화, 미디엄과 미디어, 예술과 상업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지금처럼 어설프게 놔두는 것보다) 규명하는 것이 조슬릿의 목표 중 하나. 그렇다면 이 관계는? 거칠게 말하자면 상호작용한다. 둘은 하나다. 둘을 연결시키는 것을 "궤도"(비릴리오)라고 한다면, 어떤 작업은 그 궤도(통로)를 통해 거슬러 올라가 상업적인 것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이 조슬릿이 끊임없이 주장하는 바.
2015년 4월 18일 토요일
quotes from Feedback pp. 31-2.
시각문화연구가 망했다는 조슬릿의 진단... 뭐 통섭학이 망한 것과 비슷. 요새 통섭학을 말하는 자는 그걸 팔아먹으려는 약장수 밖에 없지. 그리고 미술사와 시각문화 사이의 경계짓기 그리고 은밀한 경계 없애기가 문제라는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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