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3일 토요일

이주원의 비디오가 알려주는 진실 (2017)

이주원의 비디오가 알려주는 진실 (2017)

* 작가 홈페이지: http://juwonlee.com

지금까지 이주원은 그럴듯한 거짓말을 지어내어 관람자를 속여 왔다. 작업에서 여럿 진실의 형식—다큐멘터리 필름이나 뉴스의 파운드푸티지, 공들여서 만들어진 (거짓) 사물 등—을 증거자료로 채택하면서 거짓말에 신빙성을 가했다. 작업이 속한 문화권과 관람자의 문화권 사이의 정보 격차는 종종 인용된 파운드푸티지의 실제 내용이 어떻든 간에 이미지-형식만으로 맹목적인 믿음을 양산하기도 했다. 거짓으로 점철된 비디오에 속아 넘어가는 관람자를 보면서 작가는 때로는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읽기에서 가정되는 관람자는 두 부류다. 하나는 비디오를 진실한 르포로 받아들이는 순진무구한 타입인데, 이는 작가가 설정한 방식대로 작업을 제대로 감상한 경우라고 여겨진다. 다른 한편, 비디오의 내용이 애초에 푸티지와 부합하지도 않는, 터무니 없이 노골적인 허구라는 것을 어떤 맥락에서든 알아차린 관람자가 있을 수 있는데, 이 경우 이들은 작업의 본질을 가장 잘 꿰뚫어 본 관람자임에도, 그렇기 때문에 비디오를 올바르게 감상할 수 없다는 역설에 부딪힌다. 본질을 파악했는데도 불구하고 작업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면, 어쩌면 이것은 작업 자체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두 번째 부류의 관람자일 평론가 곽영빈의 푸념은 이런 관점을 잘 반영한다.  그가 어느 글에서 쓰길, “자신의 펀치 라인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제시될 것인지를 미리 예고하고 먼저 키득대는 개그맨처럼, ‘싸이’와 ‘김정은’의 관계는 당연히 진실이 아니고, ‘나치에게 빼앗겼던 의문의 초상화’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사한 집에서 발견됐다는 명화가 명화일리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의도주의적 평가는 거짓말을 진실로 믿게 하는 과제야말로 작업의 시작이자 끝으로 파악하며, 왜 그렇게 관람자를 속이는 것이 중요한지에 대한 이유를 좀 더 간추리자면, 당연하게도, 그의 이야기가 근본적으로 거짓말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거짓말이니까 속이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다.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 건 정말로 그것 밖에 없느냐는 것이다. 이런 해석적 관점이 간과하는 것은 선의도된 결과값 외의 모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어느 글에서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사진으로 인해 예술의 전체 질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갈한 적이 있는데, 이 관점을 그대로 여기에 도입해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의도가 제대로 성취되었느냐 아니냐보다 정말로 따져 물어야 할 것은, 지금 여기, 작업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사실의 총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주원의 작업에서 이따금씩 등장하는 거짓말의 핵심인 인터뷰 푸티지 사용은 대개 푸티지 필름이 나타내는 정보와 자막이 나타내는 정보 사이의 격차를 의도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착안된다. 보통 언어를 두 개 이상 사용하는 영상이 시청각 정보와 (그 정보를 번역한다고 여겨지는) 자막을 딱 달라붙어 떨어질 수 없는 자의적인 것으로 다룬다면, 이주원은 그 둘을 독립된 매체로 재창안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때문에 이미 존재하던 파운드푸티지가 담고 있는 정보와 작가가 창작한 자막의 정보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으로 동작한다. 이런 이해를 허용하는 한, 어느 매체 하나가 다른 하나에 복속된다거나 어느 매체가 다른 하나보다 더욱 진실하거나 진실하지 않다고 말할 근거는 희박하다고 말하고 싶다. 파운드푸티지 자체는 움직일 수 없는 특정 시공간의 역사적 사실/진실이다. 한편 작가 스스로가 창작한 자막은 일종의 소설로 볼 수 있는데, 넬슨 굿맨에 따르면 이런 문학적 특질은 자필적autographic이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일말의 작가적 진실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각각의 상이한 진실은 존재론적으로 통약불가능한 수준에 위치하지만, 관람자 수준에 와서는 몹시 자의적으로 통합되며, 그 결과, 경험적 효과는 다분히 다분화한다. 내가 보기에 작업이 놓이는 문맥에는 크게 세 종류의 관람자가 위치한다. 먼저, 두 가지 언어에 모두 능숙한 관람자 (혹은 둘의 내용이 상이하다는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 관람자)가 있다. 이런 관람자는 곧 바로 영상이 의도적으로 시청각 정보와 자막이 서로 미끄러지도록 구성했다는 사실을 몹시 투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관람자는 시청각 정보와 자막의 불일치 (그러니까 거짓말) 자체야말로 의도된 진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것은 이따금씩 그들을 허무주의로 이끌지도 모른다. 다음, 만약 파운드푸티지 속에 포함된 언어에만 능숙한 사람에겐, 다큐멘터리나 뉴스의 파운드푸티지가 제시하는 내용 또한 (다큐멘터리나 뉴스 그 자체에 대한 진실성을 문제삼지 않는 이상) 진실이다. 이 경우 자막은 실상 파운드푸티지의 내용을 반복한다고 가정되는 보조 장치로서, 실상 불필요한 잔여물로 남는다. 마지막으로 자막의 언어에만 능숙한 관람자라면, 마치 외화를 감상하는 것과 비슷한 감각(우리는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막을 본다!)으로, 푸티지의 어떤 시청각적 전형의 뉘앙스를 매순간 자막에 의지해 수용할 것인데, 이 경우 푸티지의 시청각 정보는 보조 정보로 전락하며, 관람자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필적 진실성과 관계 맺는다.

그러니까 세 부류의 관람자는 동일한 비디오를 통해 서로 다른 진실을 획득하는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오늘날의 탈진실적 상황 그 자체라는 것이다. 가짜뉴스가 창궐하고 팩트체크가 거기에 맞서고 있는듯 하지만, 여전히 누구에게는 가짜뉴스가 더욱 팩트로 다가올 것이며, 그 반대도, 양비론적 냉소주의도 가능하다. 우리가 지난 정권 동안 혹독하게 경험했듯이, 정보(접근성)는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통제되고 또 채널화되고 있으며, 이 속에서 사용자는 각자의 지지자만으로 구성된 팔로잉/프랜드 리스트를 축적하며 동일한 정보만을 무한 신뢰, 수용, 반복 재생산하며 자신만의 (가짜) 진실을 강화해 나간다. 탈진실이라는 상황은 무엇이 진실인지 가려낼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필요성 자체를 상실하게 하기도 하는데, "물러나라"라는 주장만을 가득 담은 <한겨레>의 어떤 칼럼이야말로 몹시 증상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이런 정보 비대칭성과 공론장의 붕괴야말로 비디오를 둘러싼 행위자가 놓인 구조적 상황과 꼭 같으며, 현시점에서 이를, 나는 ‘진실’이라고 판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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