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는 작업이다. 하지만
작업에 흐르는 작가의 멘털리티는 확연히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선과 악을 나눠놓고, 섹스돌과 (비인간화한) 인간 모두에 거리를 두며, '가련한 그들'을 카메라 렌즈로 더듬는다. 얼빠진 노동자가 흉악스런 손놀림으로 섹스돌을 헤집어 놓는다. 마오의 초상이 언뜻 보인다. 똑같이 생긴 폴리곤 캐릭터를 샷건으로 쏘는 게임... 이런 요소 때문에 포드주의 비판의 전형이 순식간에 떠오른다. 더군다나 작가의 자리는 너무 안전하다. 이런 상황을 고독하게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다. 좀 더 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의 휴머니즘을 옹호한다고 해도, 다른 걸 다 떠나서 나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 모든 작업이 이제 지겹다. 자신의 터질듯한 에고를 얼마간에 응축시켜놓고, 그걸 보라고, 알아달라고, 중요하지 않냐고, 대단하지 않냐고 떼를 쓰는 작업이 역겹다. 말로만, 영상으로만, 이미지로만 정의를 떠드는 정의 속물이 너무 싫다. 영상에 보여지는 노동자는 그야말로 얼빠진, 무기력한, 반복 노동을 일삼는 자다. 발터 벤야민을 많이들 읽지만 <생산자로서 작가>만큼 무의미하게 소비되는 글도 없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정윤석은 이데올로기의 후원자 자리에 있다. 해방은 영화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가 그랬어야 했다.
한편 휴머니즘을 떠나서 감독에게 물어보고 싶다. 섹스돌도 돌권이 있을진데, 그들이 느낄 수치심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는가?! ㅎ 휴머니즘의 시점에서 <눈썹>은 포르노가 아니다. 하지만 아마 인형의 시점에선 답도 없는 포르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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