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갈리안과 워마드로 대표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일부가 일으키는 사회적 혼란은 페미니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혐오의 미학화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혐오가 페미니즘의 방법론적 전략으로서가 아니라 사이다로 대표되는 즐김의 수단이 된 것이다. 여성주의계는 이 즐김이 혁신 과정 가운데 일어나곤 하는 필요학, 혹은 작은 소란 정도로 축소하고 싶은 듯하다. 하지만 문제는 혐오로 변질된 미러링이 일종의 '목적 없는 합목적성' 같은 것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미러링-혐오를 평가하는 유일한 수단은 취미판단인 것 같으며, 이 가운데 사태를 판단하기 위한 최소한의 객관성도 무의미한 것이 되기 일쑤다. 남성권력이 자행하는 혐오를 반사시킨다는 미러링의 든든한 이데올로기적 후원자인 페미니즘은 이런 미학적 혐오발화에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로써 혐오 발화는 미러링의 외양을 띤채 혐오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어떤 페미니스트는 일베가 여전히 있는 한 미러링의 자리는 어쩔 수 없는 반동의 자리, 영원한 면죄부의 자리인 것처럼 여긴다. 일베 다음에 미러링이 존재한다는 인과론. 하지만 여성을 중심으로하는 혐오 커뮤니티는 미러링 담론 이전에도 일베처럼 하지만 이름 없이 인터넷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성 일베로 호명되기 전, 이들은 미러링 댬론을 통해 페미니스트의 지위를 점유하게 됐다. 물론 일정부분은 그들이 페미니즘의 동력이 됐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의 원천은 페미니즘과 아무 상관 없는 일베와 동일한 혐오 집단일 수 있고, 어떤 점에서 우리는 단호하게 페미니즘의 방법론적인 전유--미러링--과 여성 일베를 솎아 내어야 할 결단의 순간에 왔는지도 모른다. 혹은 우파적 혐오 발화와 구별이 모호해진 시점에서 미러링을 통한 운동성은 파산 선고를 이미 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라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근본적이라는 건 뿌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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