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인터미디어 아트의 형태로 입증하기 위해서, 디펜스하는 목격자는 무어만을 "리빙 스태츄"로 부르며 오토마톤을 말했다. 물론 "나는 거듭말하건대, 그 물건은 내게 아트오브젝트로 제시되었고, 인간이기도 했고, 일부 흥미로운 의상의 젊은 여성이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고 잭 크롤, 뉴스위크 매거진의 시니어 에디터가 증언했다. "그녀는 일종의 살아있는 상이었고 일종의 인간 조형 프레젠테이션이었다"고 그는 이어갔다. 크롤의 증언은 "첼로에 앉아있는 살아있는 그리스 여성 토르소"와 매치됐다. 그것은 무어만의 방어의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했다. 그리스 조각상은 분명히 미술사에서 숭고한 장소다....
문제는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그 상은 영원하고 이성적이고 아름다운 이상의 모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건 시간에 따라 움직였다 ... 54-5쪽
린다 니드 같은 문화 역사가는 여성의 몸이 정적(static)인 오브젝트로서 제시되지 않는다면 옵씬(obscene)한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을 발견했다.[36] 움직임(movement)을 이렇게 금지시키는 것을 지지하면서, 밀튼 샬릭은 "살아있는 상"은 부동성도 전시하지 않았고 전통을 향한 지지--범죄활동으로서의 누드성으로부터 예술의 누드성을 구별하는 본질적 요소--도 전시하지 않았다고 이유를 밝혔다. 클레멘트 그린버그 같은 모더니스트 비평가의 매체특정적 본질주의를 상기시키는 주장과 함께, 그는 미적 헤테로지니티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건 음악 퍼포먼스였나? 혹은 타블로였나? 만약 그게 음악적이었다면 그 퍼포먼스를 알몸이 도왔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라고 판사는 의견을 전달하는 가운데, "만약 그것이 타블로였다면 첼로의 기능은 무엇인가? 사람들이나 오브젝트를 그루핑하는 픽쳐레스크라고 그건 보기 힘들며 우리가 알고 있듯이 적절하게 작복하고 포즈를 취하는 사람에 의한 그림의 재현이라고도 볼 수 없다. 또한 마지막으로 관중 참여나 관중과 퍼포머 사이의 인터렉션을 포함하는 단발적인 이벤트의 시리즈가 분명히 아닌 이유로 그건 "해프닝"일 수도 없다"라고 이었다.[37] 물론, 무어만은 엄격한 해프닝 아티스트가 아니었고, 해프닝이 언제나 쌍방의 사건인 것도 아니다. 물론 유도된 반응이나 상호작용이 있을지라도, 많은 작업은 전체화하는 예술 작업 안에서 강요된 관중의 수동성이나 레디메이드 오브제처럼 취급된 관자를 강화했다.[38] 판사 샬릭의 해프닝에 대한 정의는 그가 각주에서 인용한 커비를 오독한 것으로부터 온다. 장르를 제한하기보다, 커비는 모호성과 "섹슈얼한 매터리얼의 상징적 혹은 삐뚜름한 처리"를 지지했다.[39] <Happenings:An Illustrated Anthology>에서, 커비는 초현실주의 프로시저의 것들과 한 편에 서 있는 해프닝의 언캐니한 속성을 리스트한다: "에른스트의 식물은 새와 사람의 형태를 상기시킨다. ..."
수정 제1조(First Amendment)를 지켜내지 못하며, 방어쪽은 전략을 전환시키며 이렇게 논했는데, 작곡의 충실한 해석자로서, 무어만은 누드성에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악보는 로젠버거의 주장에 쓸모가 없었다. "웃긴 건 그 경찰이 악보를 달라고 해서 우리가 그걸 줬고 그들은 그것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서 그 악보가 유명해졌다는 것이다"라고 무어만은 회상했다. "지방검사는 이게 몹시 바보같은 악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그건 악보로 보이지 않았다. 그건 백남준이 휘갈긴 몇개의 노트였으며 그들은 그걸 심지어 진짜라고 여기지 않았다."[42] 그 악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면 범죄적 의심을 푸는 데 도움을 줬을 것이다. 그러나 지방 검사는 백남준의 낙서를 해독할 수 있었다면, 불확정성이 무어만으로 하여금 자의로 위반을 행하고 유죄성을 확신하는 모든 장소를 볼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56쪽)
결국에, <민중 대 샬럿 무어만>은 무어만의 의상에 기초하여 prima facie 케이스가 됐다. 무어만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데 익숙한 방식으로 적절하게 입고 포즈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판사는 그녀의 의도가 경제적 이익을 위해 남자를 자극한 것이었다고 결론내렸다.[43] 무어만의 전시주의가 또한 가슴의 사회적 의미를 잘못 재현했다는 것은 비극이었고 이를 그는 문화적 "감염"이라고 비난했는데, 이는 "옷가지 디자인으로 여성을 가짜로 만들어 여성을 여성으로 보이지 않게 만든 입생 로랑 같은 패션 디자이너"에게도 해당됐다. 그 판사는 무어만의 누드성을 Les Ballets Africans의 아프리카 딘서의 "네이티브 포트레이얼"과 대조했다. 아프리카인 몸은 벗은 걸 봐도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반면 (백인) 미국 첼로주자는 반드시 업계 안에서 옷을 입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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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정성과 인터미디어처럼, 잘못된 유니폼 입기는 자크 랑시에르가 <감각적인 것의 분배>라고 언급한 것을 화나게 한다. "감각적인 것의 분배"는 관리하는 시스템을 표현하는데, 그것은 퍼셉션과 액션 생각이 가능하게끔하는 것이다. 그것은 플라톤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안됐는데, 그는 질서 있는 사회는 커뮤니ㅣ의 참여와 배제의 정도를 몇몇 특정한 체제에 분할하며 거기서 "각각의 사람은 오직 그들의 '본성'에 따라 하도록 운명지어진 한 가지 것만 한다."[47] 에를 들어 첼로주자는 사회 정책에 커멘트할 수 없을뿐더러 어떻게 악보가 퍼폼되는지를 결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고대부터, 예술가에 의해 실천된 미메시스는 더욱 많은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에 의해 노동의 분할을 위협했다. "미메시스주의자는 이런 분배에 혼란을 가져오며," 랑시에르는 설명하며 이어가길, "그는 이중화의 인간이며, 한번에 두 가지 것을 하는 작업자다."[48] 플라톤의 예술가가 시뮬라크라로 세계를 어질러놓는 것 이상의 죄가 있었던 것처럼, 무어만의 "범죄는 우발적인 노출보다 훨씬 심대하다"고 베이커는 우스꽝스럽게 지안했다. 뮤지션과 문화 평론가 모두를 누드 상과 그로테스크한 콜라주, 이미지와 액터로 표출하면서, 무어만은 전문적인 norms, "자연적" 질서, 즉 법의 질서를 재분배했다. draft-card-burning longhairs와 전염적인 젠더 블랜딩 디자이너와 비슷하게, 언캐니한 이중성을 가진 그녀는 노동자가 선기입된 역할을 채우는 것 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예술의 정의를 감찰하는 것과 사회적 유니폼을 강요하는 것은 예술에서 매체특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여성의 특정한 역할을 유지하기 위한 혹은 그가 말한대로 "커뮤니티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질병이라 사려되는 영향에 생각없이 굴복하기에 충분한 약한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을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은 재판에 썩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니다"라고 애석하게 여겼지만, 무어만은 합리적인 의심을 넘어서 죄가 내려졌다[49]
케이지가 예고했듯이, 괴물같은 것은 작곡가와 퍼포머가 주체의 욕망을 자신들로부터 비워내는 데 실패했을 때 발생한다. 사운드가 강제징발conscription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반면, 무어만의 몸은 악보에서 자유롭지도 "행동을 관리하는 법"에 강요된 사회적 스크립트로부터 자유롭지도 않았다. 재귀적 시스템에 갇힌, 그리고 그녀 자신의 금지된 프로그램에 휘둘리는, 오토마톤처럼 그녀의 액션은 생각없지만 고의적으로 생각됐고 그녀가 저자가 아닌 악보에 써진 비음악적 표기에 책임을 져야 했고, 그녀의 젠더화된 아이덴티티를 흐릿하게 만들었음에도 그녀는 아나토미를 노출했기 때문에 외설스럽다고 생각돼야 했다. 그리고 오토마톤으로서, 그녀는 곧바로 억압된 컨텐츠가 판타지와 스크린 심볼을 통해 접근되는 장소로 돌아와야 했다. 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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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하워드 와이즈 갤러리 <창조적 미디엄으로서의 티비> 전시 동안 데뷔했던 무어만과 백남준의 다음 메이저 콜라보레이션은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티비 브라>였다. 그 작업은 라이브live와 인에니메이트inanimate 사이의 에로틱한 격동과 혼란을 재방문했는데, 이는 이전에 법적 위험 안에 그들을 놓았던 것이었다. 거듭, 코스츔은 작곡에서 중요한 측면이었고, 그것은 사회적 규범을 전복하기 위해 새로운 음악 이론을 정신분석학적 전략과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의 코스츔이 악보의 비음악적 표기를 재현했다면, 여기서 코스츔은 비표기된 이펙트로서 소리를 등재했다. 백남준은 무어만의 첼로를 와이어로 감아서 사운드 웨이브가 그녀가 연주하는 동안 전자적 간섭이 됐다. 즉 사운드 웨이브는 그녀의 벗은 가슴을 장식하는 두 개의 작은 모니터위에 방송되는 왜곡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됐던 것이다. Consisting entirely of right angles with its Plexiglas “cups” inverted to support manufactured televisions, <티비브라>는 첼리스트의 상에 부적합했다. 무어만의 몸에 족쇄를 채워, 무거운 모니터는 첼로 목에 걸처 앉아 괴상한 각도의 면에 매달렸다. 와이어는 갈비뼈 주변으로부터 페달 콘트롤러로 흘렀고, 그것은 그녀가 디스플레이를 조작하게 가능하게 한 반면 그녀를 꼼짝 못하게 했다. 그러한 테크놀로지의 조악한 뒤범벅은 전통적인 오케스트라 복장을 참조하는 그녀가 입은 롱블랙 스커트와 대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퍼포먼스동안 오프스테이지 포지션의 백남준은 그 텔레비쥬얼한 것을 무어만의 라이브 푸티지와 믹스했다. 동시에 그녀의 토르소는 티비브라 안에서 텔레비전 이미지로 등장했다. 각각의 모니터는 그래서 이미지 안의 피드백 이미지의 미장아빔이 되며, 레졸루션이 허락하는 한 재귀적으로 재전송됐다. 그 피드백은 무어만의 이미지 안에서 연속성을 설립한 것 만큼 꼭 그것의 언캐니한 불일치(discord)를 설립했다: 스크린 밖에서, 무어만은 관중의 응시에 응답하고 응시를 받았다. 스크린 내부에서, 그 재현은 라이브 아티스트 액션에 의해 가려지고 왜곡됐다. 무엇이 플레이되고 있는지 그녀는 보지 못하는 것과 백남준이 그녀의 제스쳐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퍼포먼스가 불확정적이 공동창작됐다는 것을 확신시켰다.[50]
<티비브라>를 활성화하는 것은 작곡 프로세스를 뒤집다. 전통적인 악보는 퍼포머가 만들어야 하는 신체 움직임과 소리를 표시하는 기호로 이뤄진다면, 무어만의 액션과 그녀가 생성해 낸 사운드는 그들의 시각적 인덱스의 아 프리오리가 된다. 법을 아이러니하게 따르면서, 혀용가능한 옷입기의 신념을 그것이 그녀의 예술적 노동을 방송한다는 것에 포지셔닝함으로써 그녀를 예술가라고 허용했다. 동시에, <티비 브라>는 무어만의 래디컬하게 기이한 해석적 스타일을 조력했다. 무어만이 언제나 퍼포먼스에서 "그녀 자신을 연주한다"는 것은 이제는 보통의 후렴이었다. <티비 브라>가 무어만의 전문적인 아이덴티티를 예술적 프로덕션을 위한 instrument로 강화하면서, 그녀는 그녀의 형상을 첼로 얼터-에고와 융합하는 것으로 드러나며, 무척 문자 그대로 "그녀 자신을 연주한다."
관중은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티비 브라>가 인간과 mechanized production의 비유를 만들었고 인간을 예술적 오블제로 다루는 방식에 관해 야단법석을 떨었다. "미스 무어만--주위를 끄는 데 천재인 아방가르디스트--는 전시의 일부였다"고 존 그루언은 리포트했다. "그녀는, 사실,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티비 브라>라고 명명된 쇼를 향한 백남준의 위트있는 작업 안에서 '살아 있는 조각"이다."[51] 그루언에게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타이틀이었는데, 그것이 "'전자적인 것을 인간화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고 '테크놀로지의 인간적 사용'을 보여주는 목적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업 내부에 조크를 만든다: 무어만은 예술 오브제였을뿐만 아니라 레디메이드였다. 비슷한 흥분된 반응이 무어만이 워싱턴 디씨의 전시 <사이버네틱 세렌디피티>에서 다음해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티비 브라>를 퍼폼했을 때 반겨졌다.[52] <워싱턴 포스트>를 위해 글을 쓰며, 매리 위거스는 무어만의 기계같은 노동에 관한 방문자의 농담을 인용하며 리뷰를 결론내렸다: "기계 몇몇은 작동하지 않았다. '미스 무어만 빼고', 앰바사도르 프리맨은 말하길 "그녀는 몹시 열심히 작동하고 있다."[53] 무어만이 그녀를 둘러썬 기술적 혁신의 퍼포먼스를 상회했던 반면, 존 시리의 <티비 타임 캡슐>(1969)는 소진됨으로부터 붕괴하는 노동자같이 행동했다. 투명한 플라스틱 비닐로 래핑된, 텔레비전은 그것이 스스로 번아웃될때까지 플레이됐는데,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그건 두번이나 일어났다. 그것은 퍼포먼스로 기능했는데 그 퍼포먼스는 퍼포밍 티비가 작동하길 멈출 때 끝날 것이었다. 무어만이 그녀의 일을 하는 것을 끝냈을 때 <티비 브라>가 끝난 것처럼 말이다. 어떤 "라이브"한 것을 조각으로 전환했던 트랜스포지티브 프로세스 안에 텔레비전을 포함시키는 것으로, 그래서 그것의 시간성을 사용함으로써 조각을 퍼포머티브 아트로 전환함으로써, 두 개의 작업은 텔레비전의 제조된 사물성으로부터 강조점을 그것이 퍼포된 노동으로 전환했다.
신경질적인 유머가 귀결됐다. 프로이트에게 유머는 언캐니와 동종의 디바이스다. 그 테크닉이 너무 많이 "기계화"되지 않는 한, 인간 요소가 남아 있는 한, "어떤 친숙한 것이 재발견된다. 우리가 어떤 새로운 것을 기대했던 장소에서"라고 그는 주장했다.[54] 무어만의 가슴에 대한, 오브젝파이드된 형상화에 대한, 인터미디어 퍼포먼스 안에서 식별할 수 없는 역할에 대한 강조는 <민중 대 샬럿 무어만>에 대한 인지에서 친숙하다. 얼마만큼 그녀의 메카닉스의 성적매력이 다른 덜 flesh한 것보다 잘 "작동했는지"에 관해 킬킬거리는 것은 음악을 에로틱하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그녀를 금지한 법적 조치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유머는 또한 쇼크를 발성했다--부분적으로 벗은 여자를 보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누드성과 여성 섹슈얼리티의 규범적인 디스플레이 사이의 탈코드(discord)를 통해서. 프로이트에 따르면, 쇼크는 유머를 자동화하고 "자유화된 넌센스"를 해방하는 것으로 "청자가 한때 믿었던 제도와 진실에 대한 리스펙트를 조각낸다"고 그는 단언했다.[55] 백남준에 따르면 테크놀로지는 궁극적인 아방가르드 쇼크 전략이며 그러한 부서뜨림을 엔지니어링할 수 있다. 무어만이 법적 트러블이 있기 1년 전에, 그는 "사이버네틱스화된 예술"이라고 명명된 메니페스토에서 주장했다. 거기서, 그는 "만약 우리가 독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오직 특정하게 만들어진 독을 통해서라는 파스퇴르와 로베스피에르의 주장이 맞다면, 사이버네티드된 삶에 의해 발생하는 특정한 공포는 적절한 사이버네티드한 쇼크와 카타르시스를 필요로 한다. 비디오 테이프와 캐소드레이 튜브를 사용한 내 일상 작업은 이것에 대해 나에게 확신을 준다."[56] 백남준은 해프닝(관계의 예술)과 사이버네틱스(관계의 과학) 사이의 유비를 형성하는 데로 나아간다. 두 개가 환생이나 윤회와 연루되있다고 결론내리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 관계성은, 그가 논하길 엔티티를 형성하지 않지만 엔티티 사이의 커뮤니케이티브 스페이스, 죽는 순간의 영혼 같은 트랜스마이그레이팅transmigrating의 능력을 가진다. "사이버네틱스화된 예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가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티비 브라>에서 했던 것처럼, "사이버네틱스화된 삶"의 인간과 도구instruments 사이의 특징의 트랜스마이그레이션에 맞서 백신을 맞는 것이다. 섹슈얼라이즈드 된 음악과 인간 노동의 instrumentalization 둘 다에 반대하는 규제를 나타내며, 그 쇼킹한 오토마톤의 외양은 무어만의 유죄판결로 이끈 사회의 그리고 작곡의 법칙을 조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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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무어만은 그녀의 파트를 너무 잘 플레이했을지도 모른다. 오토마톤이 부조리한 상이라면, 그것은 동시에 1960년대 여성과 노동자에 깊이 뿌리내린 인식과 일치하기도 했다. 어떻게 <살아있는 조각..>이 젠더와 작업의 재현을 복잡화했는지 고찰하기보다는, 이 작업의 묘사는 백남준의 뛰어남을 보여주는 도구로 무어만을 위치지으려고 한다. instrument로서의 무어만이라는 가장 놀라운 아이러니도 아닌 인식은 마사 로슬로로부터 온다. 로슬러의 작업은 여성의 간과된 경험에 비판적인 주목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녀의 1985년 에세이 "Video: Shedding the Utopian Moment"에서 로슬러는 백남준을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비디오아트를 둘러싼 유토피아적 신화를 까발림으로써 그들의 콜라보레이션에서 무어만의 에이전시의 가능성을 간과했다. <살아 있는 조각..>을 의심할 여지 없이 마음에 두고서, 로슬러는 "그리고--오 맞아!--그는 남자다. 그 영웅은 남성적 mastery를 지지하고 가부장제를 숭배한다. 적어도 재현에서는. 그의 작업의 쓰레드는 여성 신체의 페티시화를 그 자신을 플레이하는 instrument로 포함시키고 다른 유명한 남성 아티스트-마술사나 선지자(본질적으로, 케치지)를 향한 보완적인 오마주의 쓰레드를 포함한다. . . . 백남준의 유희적인 시는 장소에 사람을 핀박아 넣는다."[57] 로슬러 또한 무어만을 장소에 핀을 박아 넣고 있지 않을까? 무어만이 활동적이고 완성된 콜라보레이터라기보다는 조작된 신체 이미지라고 지레짐작함으로써, 로슬러는 자신이 비난하는 백남준을 향한 부당한 인증을 영속화하지 않을까? 텔레비전을 미하과하기만 하는 백남준을 비난하는 와중에, 로슬러는 말해진 테크놀로지의 무어만의 활성화가 정적이고 단일하게 감독된 아트 오브제로서의 그것의 지위에 도전했다는 것을 지운다. 남성 주인이 힘을 행사하든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논쟁이든, 이 방정식 속의 여성은 오직 다른 누군가를 위해 퍼폼한 종속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무어만이 자신을 작곡가라고 불렀다면, 아마 그녀의 컨트리뷰션은 보기가 훨씬 쉬웠을지도 모른다. 예술을 혼합하고 인터미디어적 방법을 배치한다고 해도, 1960년대 퍼포먼스에게 기존의 계급 편견에 따라서 지식 노동과 육체노동 사이를 구별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사회 경제에서 그렇듯이, 퍼포머의 노동은 과소평가됐다 왜냐면, 커비가 설명했듯이 "선택은 그에게 달렸지만 그는 창조하기 위해 아무것도 일하지 않는다. 창조는 그가 행위의 아이디어를 정식화했을 때 아티스트에 의해 실행된다. 퍼포머는 오직 아이디어를 육화하고 구체화하기만 한다."[58] 노동의 이런 분할은 그럼에도 감각적인 것의 또 다른 분할로 귀결된다. 과제를 퍼폼한 사람은 과제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창조한 사람들과 비동기적이며 구별되기도 한다. 아이디어를 "육화"하는 그들의 신체 때문에 그들은 그것의 지적인 소유자가 동시에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리차드 스키드모가 첼로 켜기가 주체 없이 일어났다는 그런 소멸과 함께 "활용utilized"된 것으로 무어만을 말할 수 있다: "백남준은 유명하지 않은 윗통을 벗은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을 '살아 있는 조각'으로 활용했다. 그는 그녀의 표준적 의복을 그녀의 가슴을 가로질러 묶인 3인치 텔레비전 두개로 수정했다. 첼로를 켜는 것은 두 개의 스크린 위에 왜곡을 발생시켰다."[59] 비슷하게, 그레이스 그룩은 그 작업이 "백남준에 의해 창조된, 어여쁜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은 그녀의 첼로를 단순히 켬으로써 그것의 이미지를 조정할 수 있다. 미스 무어만은 (매일 두시간씩) "창조적 미디엄으로서의 티비>에 있는 전시물중 하나이다."[60] 여기서, 무어만은 예술이지만 아티스트가 아니다. 첼로켜기는 그녀의 단 하나의 "단순한" 기능이며 그녀의 육체 노동은 오직 백남준의 아이디어를 육화하는 것이다.
<창조적 미디엄으로서의 티비>를 둘러싼 기술성애적 담론은 노동 이슈 주변에서 굴절되기도 했다. 실로, 초기 티비와 비디오아트의 일반적인 비판은 되려 티크놀로지적 진보의 모더니즘적 신념을 퍼로모션하는 가운데, 예술가와 관중은 노동을 백안시했다. 이런 주장을 만드는 가운데, 밴자민 부클로는 백남준의 예술더러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위계 시스템 안의 개인들의 특정한 관심과 조건을 다루지 않고 사회정치적 프레임워크 내부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라는 추정을 영속화한다고 지적했다.[61] 작곡과 미디엄으로 선점된 모더니즘은 비슷한 무관심 때문에 비난당했다. 텔레비전 예술을 미디엄 그 자체로 계급화 함으로써, <창조적 미디엄으로서의 티비>는 많은 작업이 조각적이고 퍼포머티브한 로직에 양다리를 걸치고 티비를 복잡한 사회적 네트워크로 접근했음에도, 형식주의 가치를 가지고 자신의 줄을 세웠다. 피드백과 인터랙티비티, 환각적 이미저리는 수동적인 텔레비전 소비와 연관된 관람성적 바이너리를 일견 깨부수는 것을 위한 카운터컬처적 개입으로 사려됐다.[62] 노동 하이어라키와 젠더 재현 정치는 그러나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았다.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의 배회하는 메아리처럼,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티비 브라>는 그 전시의 매체특정적 전제 홀로를 통해 이해될 수 없다. 더욱 말이 되는 것은 텔레비전의 도메스틱한 편재성에 관한 전시의 예측이었다. 와이즈는 "티비 위에서 '자라고'" "마샬 매클루언이 가정에서도 흔한 이름이 된 문화에서 자란 예술가의 명단을 기술했다.[63] 독일어로, heimlich의 의미는 집과 관련있다. 그것은 친밀하고 친숙하고 비공공적인 것을 참조하며 때몬에 밀봉되어 있다: 닫힌 문 뒤에서 이뤄지는 행위. 후자의 코노테이션은 운하임리히의 정의를 으스스하고 소름끼치는 것으로 하도록 길을 내주며 그것은 감춰진 것으로 남았지만 앞으로 빛을 보는 것이다. 이런 어원학을 추적하면서, 프로이트는 이 용어의 내재적 양가성에 관한 언캐니 분석을 기초로 다진다.[64] 언캐니한 경험은, 그가 결론 내리길, 하임리히가 운하임리히와 동일해지는 포인트로부터 떠오르며 두 개의 단어는 반대지만 모순적이지 않다: 친숙한 것과 감춰진 것. 전치사 "언"은 억압의 토큰이다. 그것은 되돌아옴의 전조이며, 이성reason 너머의 ambiguous이중적 형태로 도달할 것이다.
운하임리히가 친숙함과 낯섬, 시각적인 것과 밀봉된 것 모두를 기호화하는 것처럼,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티비 브라>는 텔레비전의 이상한 친숙성을 몇몇 개입을 무대화하기 위해 사용했다. "티비를 브라로 사용함으로써 . . . 가장 인류에게 친숙한 것을 브라로 사용함으로써," 백남준이 말하길, "우리는 테크놀로지의 인간 사용을 보여줄 것이며 어떤 수단을 위해서가 관객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상상적이며 인간적인 테크놀로지의 사용 방식를 모색하기 위한 판타지를 자극할 것이다."[65] "휴머니즘적" 방법 안에서 생리학에 응답하는 장치를 엔지니어링하는 것은 분명히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이론에 근거를 뒀는데, 그것은 어떻게 기계가 우리의 창조적인 역량을 증가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말했다.[66] 그럼에도 그 디바이스는 오직 인간 신체를 instrumentalizing함으로써 테크놀로지를 인간화했다. 오직 그로테스크하게 여성화된 사이보그로 퍼폼된 무어만이 휴머니즘적이었을 때 예술적인 에이전시가 가시화됐다.** 이중적인 워딩이 또한 그것을 분명하지 않게 만든다. 그 아파라투스가 조각스러운 무어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무어만이 inert한 텔레비전 관중을 위한 오브젝트인지는 말이다. 두 가지 독해 모두 넓어진 텔레비전의 역량과 스펙타클의 프로그래밍 속의 관람객을 포함하는 것이 그것의 정신적 통제에 반대되는 가능한 스탠스라는 억측을 문제화한다. 의심은 "가장 친숙한" 그것이 브라이냐 티비이냐 특정하는 걸 혹은 왜 이런 섹슈얼하고 전자적인 속성이 부과된 오브제가 인간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조각", 즉 말하자면 오토마톤에 부과되는지에 관해 특정하는 걸 거부하는 스테이트먼트를 통해 지속된다.
라캉에게, 친숙함은 텔레비전이 그런 것 같이 문턱이며, 그것은 신체와 상징적 영역 사이를 매개한다--브라처럼. 프로이트의 운하임리히를 일견 부합할 수 없는 포지션을 융합함으로써 정교화하며, 라캉의 신조어 익시티미티extimité 혹은 "외밀함"은 주체 안에 가장 내밀하고 깊이 묻어져 있는 무엇의 외부의 퀄리티를 묘사한다. 문화 이론가 믈라든 달러는 특별히 익시티미티의 명쾌한 설명을 제공한다. 그것은 "실재가 이미지계의 서비스를 향해 들어가기 위해 상징계와 즉시 일치하는 포인트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며 " 그래서 언캐니 한 것이 무엇이냐는 거듭 상실의 회복이다: 상실된 파트는 리얼리티를 완성하기보다는 리얼리티를 부순다"고 말했다.[67] 공공 방송과 사적 수용 사이의 교란으로서, 텔레비전은 라이브 이벤트의 "외밀한" 코드화를 주체-형셩하기 재현으로 모델화한다.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티비 브라>에서, 텔레비전은 비재현적이고 불확정적인 첼로의 사운드를 contained 이미지로 번역하며,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외부의 친숙함의 심볼의 모양을 형성하기 위해 이중화한다. 무어만의 가슴을 커버링하는 것은 검열의 친숙한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며, 그래서 "가장 친숙한 것"은 법 이전의 주체로서의 그녀의 포지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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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마톤과 음악,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주체성 사이의 역사적 관계성이 있다. 사운드를 레코딩하고 다시 재생하기 위해서 모던 사운드 테크놀러지는 사운드-리시빙과 사운드-제너레이팅하는 인간 신체의 기관을 본따 만들어졌다. 인간 감각체의 확신적인 이메테이션과 메니플레이션은 자연계가 이해 가능하고 과학을 통해 지배된다고 제안했다. 경험론을 따라서, 식민주의적 아젠다는 자연을 마스터하고 싶은 욕망에 기름을 부었고 지배하는 실천의 벌 떼에 정당성을 주었다. 미니어처에서 그런 실천을 리허설하며, 18 19세기 오토마타는 종종 원시적이고 서발턴적이고 시민이 되기 위해 감독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상을 닮게 디자인됐다: 맹수, 이그조틱한 외국인, admonitory 몬스터, 잠재적 로봇, 그리고 여성. 더욱 특정적으로, 그것들은 이런 형상의 길들여진, 억제된, 순한 버전을 닮았는데, 왜냐하면, 인류학자 마이클 타우시그가 썼듯이, "통제된 미메시스는 사회화와 원칙의 필수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75] 인지되는 패컬티에 의해 힘을 얻는 계몽조의 철학이 명확하게 인간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이 둔탁한 (하지만 놀라운) 창조물은 기계적 강박을 통해 생명을 얻었고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했다.
스펙터클의 대중적인 오브젝트인 오토마타는 엔터테인먼트의 후속 형태를 위해 프로토타입으로 복무했다. 오토마타는 종종 음악가의 옷을 입었고, 그리고 그것의 키네틱하고 오디오비쥬얼한 프레젠테이션은 어떻게 프로토시네마틱 테크놀로지가 발전되고 이론화됐는지에 관해 뚜렷한 역할을 플레이했다.[76] 떠오르는 미디어를 향해 태도를 틀지으면서, 그것들은 테크놀로지를 휴머니티의 하인으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이런 지향성 속에서, 모델적 피고용자를 위한 사회적 프로토타입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날카롭게 산업화하는 사회의 요구와 만나기 위해, 그 이상적인 노동자는 법을 이해해서 참는 것이 아니라 더욱 기계처럼 됨을 통해 참을 것이었다. 그러나, 주인행세의 만족감은 언제나 폭동의 위혐과 함께 끼어 있다. 제임스 라스트라에 따르면, 사운드 테크놀로지가 진보하면서, 증강된 보철이 "신체적 감각 기관을 혹은 '드워프 휴먼 캐퍼시티'를 강탈하거나 능가하고, 철지나게 만들고 전통적인(그리고 '올바른') home altogether로부터 그것을 대체할 수 있다."[77] 테크노포비아는 신체적 통제를 잃을 두려움으로 발전했다. 오토마타는 잃기 어려운 인간 얼굴에 그런 근심을 부여했다.
오토마톤은 언제나 이중적 아이콘으로, 사회가 컨트롤하는 무엇과 상상 불가능한 반격을 품는 무엇 사이에서 진동해왔다. 불안이 언캐니한 방식으로부터 오는데 거기서 오토마톤들은 어펙트를 끌어내고 내부적인 작동을 은폐하고 우리 고유의 프로그램적인 하지만 충동적인 행태를 흉내낸다. 그것들의 미스테리어스한 부분은 무엇이 이성에 의해 컨트롤될 수 있는지를 넘어서는 곳에 거주하며, 이성적인 마인드의 미스테리어스한 부분은 오브젝트를 강조하거나 그것들의 모바일화를 기대한다. 미래주의자와 초현실주의자, 다다 작업이 이런 크리쳐에 의해 생겨났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것의 그 타이틀 안에서, 라울 하우스만의 아상블라주 <기계적 머리(시대의 분할)>(1920년대)는 모던 시대가 오토마티즘에 의해 정의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머리가 산업 도구를 발아하게 했다면, 음악적 기표들은 소피 타우버의 춤추는 <King Stag> 마리오네트 (1918)에서, 만 레이의 <Le Violon d’Ingres> (1924)에서, 살바도르 달리의 <마조히즘적 Instrument>(1934년경)에서 오브젝트를 인간화하고 인간을 오브젝트화한다.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티비 브라>에서처럼, 그것들의 쇼킹한 형상은 언캐니한 멜로디를 상기시킨다.
20세기 후반부에서, 페미니스트 예술가와 이론가는 오토마톤의 위반적 잠재성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가장 유면하게도, 도나 해러웨이의 1985년 논쟁, "사이보그 매니페스토"는 사이보그를 "페미니즘의 과학적이고 정치적인 지식의 가능한 알레고리"로 세운다. 그것은 가부장적이고 본질주의적 패러다임이 "자연적" 여성을 정의하는 것의 바깥쪽에 위치한다.[78] 해러웨이는 사이보그가 동시에 스킬이 있고, 욕망하며, 오가닉하며 사이버네틱하기 때문에, 전체화하기와 젠더의 부분적 정의 사이를 간섭할 수 있다고 논한다. 사이보그는, 그녀가 쓰길, "이의를 제기하며, 유토피아적이고 완전히 순수함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 . . 그 기계는 애니메이션되고, 숭배되며 지배될 운명의 그것이 아니다. 머신은 우리며, 우리의 프로세스이며, 우리의 육화의 한 측면이다. . . . 사이보그에는 전체적 이론을 생산하기 위한 충동이 없지만, 거기에는 경계의 친밀한 경험, 그것들의 구축과 탈구축이 있다."[79] 이렇게, 사이보그는 1970년대 "미국 유럽중심의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종종 무어만이 친밀한 경계, 리얼과 심볼릭 모두와 대척한 것에 의해 혼란스럽게 된 운동--에 대안적 아이덴티티를 선보인다.[80]
무어만과 백남준이 해러웨이가 딱 잘라서 거부했을 정신분석학적 로직의 측면을 일깨웠지만, 그들의 콜라보레이션은 진보한 테크놀로지와 그녀의 에세이에 기름을 부었던 래디컬한 바디 폴리틱스가 융합하는 것을 미리 형상화했다. 전자 조각으로서의 무어만의 퍼포먼스가 1960년대 표준에 의해 페미니즘적 제스쳐로 고려되지 않았지만, 비슷하게 사이보그적 재현은 다음 세대에 의미있게 젠더화된 주체성을 재교섭하는 데 요인이 됐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테크놀로지적으로 신시사이즈된 존재는 어떻게 여성 신체가 언제나 이미 매개되어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낸다고 이해되었다. <Body Art/Performing the Sbject>에서, 아멜리아 존스는 용어 "테크노현상학적 신체"를 마우린 코너와 로리 앤더슨 같은 예술가에 의해 상연된 복잡하게 만들어지고 분산화된 오토마톤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다.[81] 이런 바디 아트의 유형은 남성이 엔지니어링하는 재현을 따르는 "자연적" 여성성을 부인한다. 무어만처럼, 여성은 테크놀로지와 결합하며, 오브젝트처럼 행동하며, 그들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정한다. 존스에게, 그러한 모더니즘 데카르트주의 주체의 계승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마킹하는 교체주체성과 문화적 재평가로 대체된다.
장차 도래할 테크노현상학적 신체처럼,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티비브라>의 오토마톤은 예술비평의 본질화시키는 패러다임을 향해 대안을 제공한다. 그것은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둘러싼 법률적 담론으로 돌아가지만 그것은 판사 셜럭의 혼합 미디어의 범죄화에 대한 반박을 제공하거나 작업을 위해 책임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불확정성과 리비도적 해방을 통해 제안된 논쟁을 만드는 자유를 그것은 화해시키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하워드 아이즈 전시가 사회적 변화를 모색했던 것을 통해 보여졌던 테크노유토피아니즘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재판장에서처럼, 그것의 언캐니한 메카닉스를 디코드하거나 완화시키려는 그런 시도는 오직 구범적 제도에 그것을 재기입시킬뿐이다.[82] 그러나 필요에 의해 불안정하게 만들거나 불안정하게 된 역사와 태도와 효과가 있다. 연극적으로 살아 있는 상, 음악적으로 프랑켄슈타인 몬스터, 텔레비주얼하게 오브젝트와 무법자 사이에서, 무어만은 우리의 상상에 언캐니를 남겼다.
Sophie Landres is a curator and PhD candidate in art history and criticism at Stony Brook University. Her dissertation, “Body, Law, Instrument: Charlotte Moorman’s Early Performances with Nam June Paik,” examines how Moorman and Paik adapted musical practices to contest social and compositional control over performing bodies. She has curated exhibitions throughout New York and, most recently, in Marfa, Texas. Landres previously taught at New York University’s Gallatin School of Individualized Study and cur- rently teaches at the Sotheby’s Institute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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