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민낯이라는 표제로 김의겸의 부동산 투기 건이 정치 뉴스를 달구고 있다. 비판의 논리는 전형적인 좌파의 것이다. 즉, 386 리버럴 진보는 강남좌파와 다르지 않으며, 그들은 현상황의 계급 갈등을 전혀 해결할 생각이 없으므로, 결국 내린 결론의 끝이 부동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리버럴의 무의식이 표층으로 드러난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좌파는 웃음을 감출 길이 없다. "거 봐 내 말이 맞지"라고 하면서.
그런데 이 논리가 우파에게 전유된다는 것에 좌파는 크게 관심이 없다. 똑같은 논리가 연일 보수 일간지와 종편을 도배한다. 물론 이들은 계급 갈등을 세대 갈등으로 치환시키며, 젊은 세대의 분노를 가시화하고 증폭하려 한다. 그럼에도 목표는 같으므로, 이 건에 한해서, 좌파가 우파를 공격하거나 그 반대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거듭 이 건에 한해서는, 최소한, 일종의 공동전선 위에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김의겸을 비판하는 것은 대충 어디에라도 들어가므로, 비판 자체에 도착된 자들에겐 최상의 떡밥이다. 좌파를 선택할 수도 우파를 선택할 수도 경우에 따라서 좌우파를 모두 선택할 수도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계급"의 청년 "세대"라면 사실 할 말이 많고 지원군도 많은 것이다. SNS 상의 오피니언 리더(라고 쓰고 관종이라고 읽는다)가 이것을 놓칠쏘냐? 냅다 떡밥을 물고 신나게 흔들어 제낀다. 요즘 유행하는 당사자성에 따르면, 이들은 한없는 약자이므로 못느낄 분노가 없고 못할 말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좌파는 현실 정치를 냉소하는 것 같다. 벤야민이 바랐던 것처럼 문득 어느날 계급혁명이 휴거처럼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마 모든 진보적 제스쳐에 그럴지도 모른다. 한편 우파는 너무도 현실 정치적이어서 아주 약간의 유토피아도 상상하지 못하고 냉소한다. 즉, 모든 것은 경쟁이고 싸움이고 생존이라서 지금 순간 어떻게 내 것을 지키고 보전하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좌우파의 냉소, 공동전선이 사회를 덮는다면, 지금의 정치는 서로가 서로를 재생산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무력감은 어쩌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만을 진리처럼 알려준다. 과연 그럴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건 그거대로 파국을 상상해내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라면? 우리는 현실정치와 유토피아를 기어이 연결해 내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실천은 김의겸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지키는 모순적인 일부터 시작해도 좋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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