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4일 목요일

서울문화재단 사태

https://news.v.daum.net/v/20190403101023286?fbclid=IwAR0IYRHMu0fhESMVmB266k6Vo5XKWS-i9tX9HLkXdIaOGX9DTZVSamOgZEs

웃기는 일이다. 재단 직원은 직원대로 관료주의의 병폐를 순진무구하고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고 예술가는 예술가 나름대로 숙달된 행정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문화재단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대부분 예술가는 예술가와 예술 생태계라고 말할 것이다. 그래, 서울문화재단은 예술 생태계를 형성한다는 명목으로 예술가에게 작업 지원금을 주는 방식을 택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술 생태계란 무엇인가? 예술가가 작업과 전시 지원금을 받는 것으로 예술 생태계가 구성될까? 이런 예술생태계에는 실로 누가 참여하는가?

서울문화재단은 서울시와 정부에서 출연한 기금으로 형성되어 있다. 즉슨, 국민과 시민이 예술생태계를 형성하라고 코묻은 돈을 낸 것이 모인 기금이라는 뜻이다. 그 예술생태계는 그래서 근본적으로 그들의 동의에 기반한다. 예술가는 작업을 할 때 이것을 생각할까?

내친김에 박찬국 선생은 아예 기금을 예술가가 운영하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https://www.facebook.com/chankookc/posts/2214232158643785?comment_id=2214988278568173&notif_id=1554342739681565&notif_t=feed_comment_reply) 더욱 급진적인가?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도 꽤 있는 것 같아 놀랍다. 그들의 논리는 예술가 지원에 무슨 이런 복잡한 절차가 많느냐에 머물러 있다. 예술가를 왜 지원하는지에 대해서는, 예술가가 왜 지원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주장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 예술가가 어떠한 예술가인지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예술가는 예술가 일반인가? 지원제도는 필연적으로 선별화 과정을 거친다. 그러니까 될 놈에게 돈을 주자는 아이디어는 박찬국의 생각에서도 다른 게 없거나 생략되어 있다.

박찬국의 이 급진적 생각을 역으로 돌리자면, 어떤 예술가를 지원할지는 시민의 투표를 통해 직접 결정할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그게 힘들다면 시민의 대표가 그 일을 대행할 수도 있다. 여기에 예술가가 토를 단다면 어떤 식으로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는 제대로 된 예술 발전을 이룩해낼 수 없다? 김남수 선생이 도발적으로 물었듯이, 공공미술이 일색임을 걱정해야 할까? 그런데 그 제대로 된 예술을 굳이 무지한 시민의 동의를 받아야 할 수 있을까? 이때 공공미술이란 미술 아닌 것을 싸잡아서 무시하는 일종의 멸칭으로, 민중미술이 모더니즘 아닌 것으로 구성된 것과 하등 차이가 없다. 말이 되나?

어떤 면에서 지금 지원 시스템은 충분히 예술가 중심적이다. 더 예술가 중심적으로 향한다면 예술가라는 특권층을 정부나 지자체에서 키우는 것이 되거나, 반대로 정부가 예술가를 돈으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 권력을 키우는 꼴이 될 것이다. 이 둘은 어떤 면에서 같다. 여기서 예술은, 최소한 그 시스템 안에 있는 예술은 탈정치화된 무엇으로 남겨질 공산이 크다. 지원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선별화 과정을 거치고 거기서 선발된 예술가는 이제 등따시고 배부른데 불만을 제기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가 중심의 지원금 시스템은 역설적으로 그 시스템 밖에 있는 예술가의 분노에 정치를 넘겨야 할 것이다. 그 분노가 만약 다시 시스템 안에 들어간다면, 또 그 분노는 다른 이에게 반복될 것이다. 여기가 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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