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5일 목요일

공부와 마이 목과 허리와의 관계

목과 허리가 우리하게 아픈지 좀 오래됐는데, 물어보니 글쓰거나 공부하고 있는 친구들은 하나 같이 이 고통을 호소한다. 그렇다고 비스듬히 누워서 책을 읽으면 어느새 자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고, 고개를 바짝 들고 읽으려면 책도 그만큼 들어야 하기 때문에 팔이 아파서 안된다. 인류의 뇌는 책을 읽을 수 있게 만들어졌는지 모르겠다만, 몸은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아이고..ㅠ

2014년 5월 8일 목요일

FEEDBACK 마니페스토

  1. FEEDBACK. Don’t produce art or art history by making a “new” move in the game of aesthetics you learned in school. Assess the image ecology you live in and respond to it. Learn the system and counter it – make noise. Practice eco-formalism.
  2. CREATE A VIRUS. How is your image going to circulate? Use the resources of the “art world” as a base of operations, but don’t remain there. Use images to build publics.
  3. LOSE YOUR IDENTITY. Don’t believe that you’re a piece of property, a “gay man” or an “African American” whose “subject position” is the product of market research. Use icons opportunistically, and share them with like-minded people. Make an avatar!
  4. Imagine modes of art and art history that function as political science. Stop pretending to subvert commodification by demonstrating what everyone knows – that capital is everywhere. SEIZE THE WORLD AS A READYMADE and BREAK ITS CIRCUITS.

데이빗 조슬릿 <예술 이후> 리뷰

http://blog.frieze-magazin.de/art-2.0-on-david-joselits-after-art-2012/



ART 2.0: David Joselit’s “After Art” (2012)

by Ana Teixeira Pinto
Herzog & de Meuron and Ai Weiwei. Installation Piece for the Venice Architecture Biennale, 2008 Italian Pavilion, Giardini, Venice, Italy
For a number of decades now, the humanities have been collectively held captive by what one could call ‘Benjamin syndrome’: the belief that societal change can be deduced from technological development, coupled with the eagerness to sketch the fault lines of the ongoing digital seism.
This past Valentine’s Day in Berlin, the small Pro qm bookshop was packed to the brim, teeming with anticipation: the title of David Joselit’s new essay, After Art (2012) , forebode the next big epistemological quake, and the author himself was present. Published last fall by the Princeton University Press, the book was introduced by Armen Avanessian, followed by a discussion between Joselit, Isabelle Graw, and critic and researcher Philipp Ekardt.
Much as the book’s promise is bold, the talk’s delivery was lacking. Neither the author nor the respondents managed to convey an adequate notion of the book’s content. The discussion was agreeable, yet frustrating, winding about the books core claims and straying into marginal topics, without ever taking the author to task. Isabelle Graw tried to raise a crucial point: in what way do Joselit’s claims relate to the notion of experience economy? But nobody followed through. I, for one, was curious to know how Joselit’s ‘connectivity’ differs from its evil twin, Boltanski and Chiapello’s ‘connectionist’ capitalism – the new modes of exploitation arising from the neoliberal ethos of the network economy. So I bought the book.
After Art puts forth an analysis of how contemporary art became a form of currency, one whose circulation entails the power to project visibility. The author suggests that ‘connectivity’ be treated as a critical subject, before schematizing the types of links aesthetics is able to mobilize and finally moving to specific examples.
David Joselit, After Art ,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2)
The book opens with a noteworthy claim: the ‘age of art’ is over. In Joselit’s view the modern period – the period in which individual artists usurped the agency of the image– is a small glitch in history, preceded by an era of pre-modern images (icons) and swiftly outflanked by a torrent of ‘image explosion’ (lolcats and Kim Kardashian?)
Along these lines, After Art aims at shifting critical emphasis from ‘art’ to ‘images’. The logical step forward would, it seems, thus be to expand the definition of art to include the nexuses of these all-pervading digital fleets. Instead, what Joselit delivers is a rather incongruous attempt to link the vectors of digital circulation with specific artistic practices – as diverse as those of Matthew Barney, Pierre Huyghe, Santiago Sierra and Tania Bruguera – via the aesthetics of parametricism (an architectural style derived from 3D-modeling). According to the book, ‘the emergent image is a dynamic form that arises out of circulation’ and ‘aesthetic objects are forms crystallizing out of a population or currency of images.’ At this point, the notion of ‘images’ – which the author himself defines as ‘quantum of visual content’ –loses its precision. In fact, it’s hard to fathom in what way the author’s pledge to “expand the definition of art to embrace heterogeneous configurations of relationships or links” differs from the proposals already advanced by relational aesthetics.
Which brings us to the book’s most glaring blind spot. Following Joselit’s argument, contemporary art’s strength lies in its ability to beget heterogeneous formats, ‘dynamic mechanisms for aggregating content’, for instance, through the conflation of ‘social elites, sophisticated philosophy, a spectrum of practical skills in representation, mass public, discourse of attributing meaning to images, financial speculation, assertions of national and ethnic identity’. Contemporary artists should embrace their power to ‘project visibility’ by forsaking traditional object making in favour of creating ‘platforms’ – which art seems to have an unprecedented ease at forming – in order to make new ‘aesthetic, social and political circuits emerge’. The way artists are supposed to do this – contrary to the author’s assertions – is not without difficulties. ‘Connectivity’ is not a physical force, akin to wind or coal power; nor is it the spontaneous or logical result of neutral social networks.
Artists cannot simply harness the power of these so-called “platforms” at the service of artistic dissent and civil disobedience – as the author suggests Ai Weiwei does – because these ‘platforms’ themselves decide what constitutes dissent (as well as participation); it’s those platforms that determine who gets to be called an artist, who exhibits at the Tate and who, when push comes to shove, is dubbed a trespasser and gets dispersed by the riot police. Despite acumen of its opening claims, After Artfails to challenge market consensus and to engage the material conditions underpinning digital circulation. As such, it unwittingly ends up advocating for the surrender of critical criteria to the dominance of PR.

About the author

  • Ana Teixeira Pinto's photo
    Ana Teixeira Pinto is a writer from Lisbon, currently living in Berlin. She is finishing her PhD at Humboldt University, and is a regular contributor to the art magazines von100 and Mousse, among others.

2014년 4월 23일 수요일




집단 트라우마라고 했던가.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는 듯하다. 뭔가 바닥이 뻥 뚫린듯 한 느낌이 하루 종일 든다.
우연히 듣게 된 노래인데, 가사가 그래서 그런지 계속 듣게 된다.

2014년 4월 21일 월요일

지긋지긋

누군가의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는 대통령
이 상황을 정치적 상황으로 이해하는 정치인
이 상황을 정치적 상황으로 이해하길 바라는 좌파
이 상황을 정치적 상황으로 이해하길 바라지 않는 우파
선장, 홍가혜를 까는 언론
특정인을 미친듯이 비난하는 누군가
미친듯이 감정을 표출해대는 누군가
이 상황을 냉소하는 누군가
이 상황에서 손석희, 교감을 모에하는 누군가

2014년 2월 18일 화요일

2014년 2월 14일 서동진, '예술가를 위한『자본』읽기' 6강

2014년 2월 14일 서동진, '예술가를 위한『자본』읽기' 6강

예술가는 『자본』을 읽고 뭘 배울 수 있을까? 우리가 ‘예술가를 위한 『자본』 읽기’를 했었고 여러분들과 『자본』 1권을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읽었어요. 2권과 3권도 읽으면 좋겠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 제한이 있으니까. 가끔 필요하다면 그것을 미리 고려해 넣은 채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말이죠.

무엇을 배웠을까? 경제의 해석학은 어떻게 예술의 해석학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관해서 제가 여러분들께 어떤 질문을 던지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지난 몇 차례의 강연에서 공을 들여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자본주의라 불리우는 것은 어떠한 형태의 환상, 신기루. 마르크스에게는 유령적인 체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유령적인 체제인 자본주의가 가지는 가장 커다란 특징은 무엇이냐면.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관념적인 체제에요. 제가 자본의 형이상학이라고 얘기했었던. 자본은 자기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면서 굴러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불리우는 것은 무엇이냐면, 방금 이야기했던 것을 참조하자면,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와 같은 마르크스 스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령적인 성격, 즉, 허무적인 성격, 하지만 현실적인. 왜냐하면 말 그대로 유령이 현실이 돼서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시스템이 갖는. 사실 이 문제에 관해서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노동자라고 불리우는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힘에 대한 저항을 할 수 있는 예술가들이기도 하다는 거에요. 유령으로부터 유령을 푸닥거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사실 노동자 계급은 그와 같은 가능성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가능성에 근접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그 환상의 형식 안에서만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 환상을 깰 수 있는 건 우울하게도 스스로부터 출현하진 않아요. 한때 그것을 의식의 깨어있는 혁명적인 아방가르드가 노동자 계급에게 들어가서, 즉, 자기 자신의 주어져있는 삶의 조건 안에서밖에 생각할 수 없는 그들. 그걸 표현한 유명한 표현이 '즉자적 계급'이었는데. 그들을 '대자적 계급', 자기 자신을 의식적으로 반성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의식적인 교습. 바로 이제 교육을 받고 있었던 전위. 이런 사람들이겠죠. 이런 사람이 노동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노동자 더하기 전위’ 이런 거겠죠. 그죠? 우리는 이런 의식화를 위해서 많은 학생들이 공장에 들어가고 그랬었죠. 하지만 이제 그런 일은 불가능해요. 어떤 시기 안에서는 사실 의식화가 아니라, 단순하게 자기 삶에서 저항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노동 운동이 가능했었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아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직면해있다고 볼 수 있겠죠?

저는 이제 그와 같은 문제를 여러분들이,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가장 무엇보다도 물질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형식이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것이 작용하는 것은 사고의 형식이기도 하고 감각의 형식이기도 하다라는 거에요. 여러분들과 함께 ‘자본주의가 어떻게 물신성을 통해서 지배되고 있느냐?’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다고 보자면 우리가 사실 이 문제, 자본주의 비판 안에서 예술가들이 직면해야 할 문제들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물론 경제학 강의를 직접적으로 대상화로 하지 않아요. 무엇을 대상으로 할까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고 있었던 관념의 형식, 감각의 형식을 대하는 거죠. 따라서 노동자만 자본주의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은 감각의 형식, 사고의 형식, 환상의 형식이라 부를 수 있는, 상품 물신성이라 부르기도 했었고 화폐라고 부르기도 했었던, 이 모든 표현들은. 알고 보면 “우리가 어떻게 감각하고 사고하고 체험하고 살아가는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여러분들은 이런 인식의 형식, 감각의 형식이라 불리우는 것은 노동자들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 일이기도 하죠. 그런데 이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예술가들이에요. 바로 이런 점에서 보자면, 『자본』을 읽는 것은 “경제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자본』을 읽으려 할 때 가장 우리가 힘을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왜 현실은 나에게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는가”, “왜 현실은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게 되는 사고 형식이 되느냐”, 왜 우리는 그와 같은 방식, 주어져있는 경제문제를 대할 때 그것을 알고 보면은 그런 식으로 인식하게 되는 어떤 주관의 존재를 염두에 둘 수 밖에 없어요. 현실의 발생은 주관의 발생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각의 형식은 이미 자본주의를 다루고 있는 것이기도 해요.

여러분들이 경제 문제에 관해서, 가장 천박한 방식은 뭘까요? “그래, 진보적이어야지”라고 얘기하면서 경제 문제를 바로 다룰 수 있다고 예술가들이 믿게 될 때 자기가 노동자 계급의 삶의 현실을 다룸으로서 자동적으로 비판적일 수 있다 생각하는 건 제일 진부하다는 거죠. 주어져 있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감각의 형식과 사고의 형식이라 불리우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섬세하게 기울여야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부분들이죠. "도대체 어떤 형식인가?" 말 그대로 소설이라면, 미술이라면, 어떤 형식인가가 중요한 쟁점입니다. 물론 이것을 여러분들과 직접적으로 다룰 수는 없어요. 왜냐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주어진 삶의 재료를 어떠한 방식으로 형식화하고 있는가가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것을 뭐라고 부를까요? 사회관계, 사회적 관계의 조직이 그것이겠죠? 물론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관념화하는 거에요.

이와 같은 과정들을 우리가 염두에 둔다면 주어져있는 현실에 직접적으로 갈 수 있다고 하는 환상을 깨야겠죠. 왜? 우리는 예를 들어서 화폐의 매개를 거치지 않은 채, 상품의 매개를 거치지 않은 채, 추상적 노동이라는 매개를 거치지 않은 채, 무엇보다도 물신이라고 불리우는 매개를 거치지 않은 채, 신학적인 것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것이 만들어 냈었던 그 유령과도 같았던 믿음의 신비를 내가 스스로 의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채, 자본주의에 참여할 길은 없어요. 따라서 우리가 어떤 현실을 만나는 순간은 자본의 눈길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거에요. 그 눈길 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할 수 있는 가장 유일한 방식은 노동운동은 아니에요. 예술가들의 몫이기도 하고, 지식인의 몫이기도 하고, 노동자 스스로 발굴하고 개척할 수 있는 어떤 미적 감수성의 형식일 수도 있겠죠. 이 모든 것들 안에서 이 모든 문제를 매개해줄 수 있는 새로운 감각 형식의 조직자. 이런 사람들이 제가 생각하기에는 예술가입니다. 그런데 이때 말하는 예술가는 미술가 더하기 소설가 더하기 영화 감독 더하기 뮤지션은 아니에요. 방금 이야기 했었던 자본주의가 만들었던 삶의 감각 형식, 우리를 주관하는 방식에 대해서 저항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들이겠죠. 『자본』을 읽으면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이 문제는 여러분들과 깊이 있게 『자본』을 읽음으로써 그런 단서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찾아내는 겁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이야기 했었던 것은 저 주어져있는 리얼리티, 자본주의라 불리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했던 것은 ‘이 리얼리티를 이해하기 위해서 보고 있는 나는 어떻게 빚어 졌던가’라는 거에요. 왜냐하면 보는 나와 보여지는 대상 사이에서, 인식하고 체험하는 나와 인식 되어지는 대상 사이에서의 차별은 없다는 거에요. 바로 내가 그것을 상품으로 응시하는 순간 그것을 화폐로 응시하는 순간 나는 뭐냐하면 어떤 유령에 사로잡힌다는 거에요. 유령이라고 불리우는 비유는. 사실 관념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아요. 관념은 관념의 건너편에 있는 관념이 반성해야 되는 대상들이 있기 때문인 거죠.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 중에 한 사람은 이렇게 얘기해요. 마르크스주의는 변증법이고, 변증법의 목적은 두제곱이라고 얘기를 해요. 왜 두제곱이냐면 내게 어떤 대상이 주어져있고 그 대상을 나의 생각 속에서 받아들이는 것, 이걸 내 생각 속에서 조직하는 것, 무엇이 이뤄지고 있지? 내가 지금 보았던 것은 무엇이지? 라는 것을 생각 속에서 조직해내는 것을, 철학이 부르는 말은 유명한 표현인 반성이에요 Reflection이죠. 그죠? 모든 의식은 반성 작용이죠. 그런데 왜 두제곱이라고 할까요? 두제곱은 당연히 왜 그와 같은 의식형태가 필연적인지를 또 한번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또 한번 더 곱해줘야 한다라는 거죠. 그래서 그것이 바로 변증법이에요. 변증법이라 불리우는 것은, 방금 주어져있는 대상과 의식, 주어져있는 현실과 감각 사이에서 관계가. ‘왜 이와 같은 감각 형태가 필연적이었냐’라는 거죠. 이걸 두제곱이라고 보면 되요. 예술가는 거기에 제곱을 더해야 한다는 거에요. 왜? 그와 같은 의식 형태는 왜 이와 같은 미적 형태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냐 까지도 파헤쳐야 하는 거죠. 그죠? 이를테면, “금융자본주의와 하루키는 뭔 상관이지?” 그렇게 말이에요. “금융자본주의의 등장과 올드 뮤직의 횡행은 무엇 때문이지?” 이런 걸 말이에요. 이와 같은 세제곱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 현실, 의식형태, 그것이 가지고 있는 미적 형태로의 완결. 제곱과 제곱, 두 개의 변증법. 경제의 해석학을 문화의 해석학으로 다듬어내기 위한 배가된 노력. 이런 것이 우리가 『자본』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자본』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읽음이 예술가들을 위한 텍스트라고. ‘미적 형식이 관련돼있는, 보기 드물게 예술에 관해서 단 한번의 언급도 없으면서 예술의 형식과 우리가 가진 사회적 관계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희귀한, 드문 텍스트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아마 이 때문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거칠게 단숨에 여러분들과 몇 개의 용어로 요약했던 강의이긴 하지만 아마 여러분들이 저와 함께 6강 동안 만나는 동안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이 수업이 예술가를 위한 『자본』 읽기 취지에 맞게 이야기가 되었다면. 제일 마지막에 요약했었던 ‘예술가에게 『자본』 을 읽는 것은 어떤 쓸모가 있는가에 관한 나의 답변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뭐 정치경제학도 아니고 『자본』의 달인도 아니고, 이것도 찔끔 저것도 찔끔 주변 머리 없는 인물이긴 한데요. 여러분들과 함께 예술이라고 불리우는 것과 『자본』이라고 불리우는 자본주의상에서 감각과 의식의 형식에 관련된 가장 탁월한 텍스트로서 선택했었던 『자본』과의 관계를 한번 점검해보고 탐색해보려고 하려는 6주 간의 강의를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길어졌죠 그죠? 6주 동안 저와 함께 묵묵히 따라와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자 6주 간의 강의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2월 17일 월요일

김종철, 후쿠시마, 계속되는 홀로코스트 中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나치스에 의한 유태인 대학살은 실제로 인간성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속의 ‘시적 가능성’까지도 제거해버렸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아도르노의 비통한 선언은 물론 그 자신의 비범한 통찰력과 민감한 감수성의 소산이다. 그러나 그 통찰과 감수성에는 개인과 시대와 사회를 넘어서는 보편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홀로코스트적 상황에서 시를 쓰려고 한다는 것은 부도덕하다기보다 우둔한 짓일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아마도 가장 위엄 있는, 그리고 가장 진지한 행동은 근원적 의미에서의 ‘침묵’인지도 모른다."

김종철, 후쿠시마, 계속되는 홀로코스트 中
http://www.greenreview.co.kr/archive/133KimJongchul_pt.htm